스티글리츠가 그의 마지막 불장난에 열중하고 있을 때 오키프는 다시 병원으로 갔다. 새해 전날 밤을 축하하는 대신에 그녀는 가슴에 또 다른 멍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 멍울은 양성으로 판명되었지만, 그녀의 회복은 고통스럽고 더뎠다.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중에서
연민. 존중보다도 내게는 연민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불쌍하다. 그러나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핑크 룸, 푸른 얼굴> 중에서

 

두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최근 재조명받으며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지아 오키프의 전기가 있고요. 국내 여성주의 미술가 중 가장 높은 타점을 기록중인 윤석남 씨에 대해 여러 지인들이 써 모은 작가론도 있습니다.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예술 외적인 투쟁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구요. 그 방식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조지아 오키프는 여성성을 자의식에 결부시키는 편입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예술가와 함께 살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심지어 그녀의 사후에조차 스티글리츠의 명성에 빌붙어 자신을 띄우려 한 악녀라는 이미지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생전에는 전쟁에 가까운 내적 외적 싸움이었겠지요. 이 전기는 그녀의 작품과 예술관에 더불어 한 인간으로써, 여성 예술가로써 20세기를 살아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는지를 웅변하는 하나의 수난기입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추상미술의 특성을 풍경이나 정물에 접목시켜 모호한 물질 공간으로 재생산하는 센스가 발군입니다. 모더니즘의 탈현실적 속성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꿈처럼 그려왔던 건 아니었을지, 여성의 성기를 닮은 그녀의 꽃들은 그 특유의 단순화를 통해 실재하지 않는=가닿을 수 없는 세계를 여는 열쇠로 변합니다. 그 단순화의 과정에서 떨궈낸 것들은 어쩌면 그녀를 그토록 질시하던 이 세계의 비루한 속성은 아니었을까요. 형태와 색채를 단순화시켜 어떤 본질적인 면모만 남기려는 그녀의 시도는 그 자신의 인생사에 비추어볼 때 투쟁의 일종으로 느껴집니다. 여성으로써 온전한 자아와 주체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지요. 모더니즘 예술이 개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는 지적은 잠시 미뤄두셔도 좋습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삶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 고함을 치고 있으니까요.

단순한 포맷으로 써내린 이 전기는 그래서 오히려 묵직하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결국 캔버스 밖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래서 캔버스 속에서 어떤 이상향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난이도: 중, 책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미국 모더니즘 예술계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여성분 모두에게 권해 드립니다. 버지니아 울프나 실비아 플라스의 팬들이 보셔도 괜찮을지도...> -MD 금주의 선택

 

<핑크 룸, 푸른 얼굴>: 이 책 속의 여성성은 좀 다릅니다. 더 넓은 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식만 챙기는 건 모성애가 아니고 이기심이라고, 이 세계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지고 보듬을 줄 아는 게 모성애라고 얘기하는 이 작가의 작업들은 앞서 소개드린 조지아 오키프류의 자의식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민중미술 계열의 에너지가 약동하며, 추상성보다는 직접적인 메시지의 효과가 도드라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예술이고, 무슨 뜻인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이지요.

1천 마리가 넘는 개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만나고 난 뒤 제작된 [1,025]를 사진으로 만났을 때는 놀랐습니다. 그 형식의 단순함과 시각적 효과(모든 개들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만으로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으니까요. 친절한 미술이되, 전혀 뻔하지 않았습니다. 강렬함이 있지만 그 힘은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쓰라림에 가깝지요. [1,025]에는 버려진 것들의 처연함과, 그 1천 마리가 넘는 처연함들을 조각하고 그려낸 작가의 힘 뿐입니다. 스틸 사진만 봤는데도 가슴이 쓰려서, 이건 뭐 무슨 주의니 어쩌니 하기 전에 목구멍이 좀 막혔더랬습니다.

에고, 이 하기 힘든, 그저 마음이 어떻다거나 가슴이 어떻다거나만 말할 수 있는 세계를 말로 풀라고 하면 참 어렵습니다. 설치 미술에서 소규모의 스펙터클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1,025]를 더 잘 감상하는 길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 땅의 여자-어머니들을 불러내서 온 사방을 쓰다듬다가 종내는 그 자신을 끌어안는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 이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합니다. 모르겠어요. 세상 모든 아들들의 부채감 같은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상과 그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도 많습니다. [999]같은 경우가 그러한데요. 한 방에 999개의 작은 나무토막에 그려진 여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옆 방에는 다른 조각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조각이 딱 하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완성을 뜻하는 1천에 딱 하나가 부족한 999, 그리고 그 완성을 담당할 '평범한' 나머지 한 조각. 이 땅의 민중사와 여성사를 엮었다가 다시 풀어내는데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재밌습니다.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좋은 전범이 되겠죠.

책 본문은 그녀의 지인들이 그녀에 대해 쓴 여러 방식의 작가론 형식으로 이뤄집니다(윤석남 자신의 코멘트는 틈틈이 삽입되어 있어요). 에세이 같은 글도 있고, 미술사적으로 접근한 글도 있어서 다방면으로 작가의 세계를 살피기에 좋습니다. 예술이 어떻게 세계를 보듬으려 하는지, 왜 '고급 유희'가 아니라 진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 보세요. <난이도: 중하, 약간의 미술 지식이 필요합니다. '현재' 여성성의 사회적 의미에 주목하시는 분들께 특히 추천.>

 

-and, 편안하고 친절한 미술 이야기 3종세트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는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비슷한 성향의 음악과 미술을 짝을 이루어 설명하는데, 글도 부드럽고 설명도 친절하네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모차르트와 뒤피가 짝지워지는 식입니다. 각 작곡가의 특성과 화가의 특성이 잘 조응하고 있어요. 패러다임을 깨 버린 충격작들이라는 콤비도 있고, 같은 원작을 사용한 콤비도 있고, 개인적인 절망을 이겨낸 비장한 콤비도 있고, 패러디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콤비(P.D.Q 바흐는 진짜 웃겼습니다), 미니멀리즘 콤비 등등, 그 존재론적 특성이 매우 다른 두 분야의 예술을 잘 엮었네요. 클래식 오딧세이를 담당하신 진회숙 씨의 경력이 묻어나는 편안한 문화 산책입니다. 물론 유명하지 않은 화가들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어서 '중급 유저'들도 함께 즐기실 수 있어요. 아, 여기 소개된 곡들 중 대부분은 부록 CD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레이블 NAXOS의 굳건한 연주로 함께 하시죠. ^^ <난이도:하, 잘 만들어진 대중 예술 입문서를 찾는 분께 제격!>

화가의 작품들에서 어떤 색깔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 색의 특성을 통해 만나보는 미술 이야기. <노란 누드>는 일전에 소개해드린 바 있는 <색깔이 속삭이는 그림>의 저자인 최영주 씨의 새 책입니다. 이번에도 색깔을 통해 그림들을 읽는 이야기예요.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부담없는 대중 예술서를 지향하면서도 나름 내용을 알차게 담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보너스 장점을 하나 꼽자면 소개된 작품들이 거진 근-현대 미술이라는 건데요. 레파토리(?)를 늘린다는 측면에서도 반갑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난이도:하, 색채학을 통해 만나는 쉽고 친절한 근현대 미술 입문>

<안녕하세요 세잔씨>네요.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간 답사기예요. 세잔의 그림과 그 그림의 배경이 된 실제 풍경(물론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을 찍은 사진들의 대비가 이 책의 최고 포인트입니다. 놀랍게도 그림을 기념하기 위해 '구식으로' 복원한 다리도 있구요, 관광객들을 위해 세잔이 그림을 그린 포인트에 이젤을 가져다놓은 센스쟁이 공무원(이겠죠?)들도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세잔의 에피소드형 일대기와 그 장소들을 찾아간 미술 여행자의 소회가 얽혀 있는데요. 때로는 세잔이 느꼈던 것들을 함께 느끼면서, 때로는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이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장점들과 함께 편안히 읽을 수 있는 미술 이야기인 것만큼은 분명해요. 잠시 산책을 떠난 기분이었습니다. <난이도:하, 세잔 팬 여러분, 혹은 마음이 팍팍해서 느즈막한 이야기와 함께 문화 산책을 떠나고 싶은 분들께>

 

-and

책 소개당 분량을 줄여야 되나.. 아니면 더 많은 책을 소개하려는 욕심을 줄여야 되나 고민입니다. 여러 방식을 생각해 보는데 확실히 결정을 못하겠어요. 혹시 아이디어가 있는 분들은 알려주시면 제가 뭐... 드릴 건 없네요. -_-;;; 더 좋은 소개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 시간까지 꼭 행복하세요. 약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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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2008-12-2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많이 소개해주셔도 괜찮습니다 :-)
블로그 링크 위치가 바뀌어서 찾아오느라 살짝 헤맸네요..^^
현재의 분량과 권수 정도라면 적당하지만 더 늘리시면 기다리는 기쁨이 배가 되겠군요..ㅎㅎ
그보다도 이 책들을 다 읽으시는건가요...멋지십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8-12-2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소가 바뀌었었나요? 그랬던가(기억이..)
어쩄든 분량을 좀 더 늘여볼까요. 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책을 전부 정독-완독하냐는 질문이시라면, 그건 아니예요.
챕터별로 이루어져 있거나 발췌독을 가능하게 하는 책들의 경우에는 일부러 랜덤하게 펼쳐서 읽기도 하고요.
(그 쪽이 오히려 책의 완성도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특히 MD들에게는 책의 포인트를 잡기 위해서 얼마만큼 읽어야 하는가를 빨리 알아채는 감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뭐 이렇게 전권 완독이 아님에도.. 이번처럼 조지아 오키프 전기라도 완독할라치면 아주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하죠. ㅎㅎ)

또치 2008-12-29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핑크룸 푸른 얼굴>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

외국소설/예술MD 2008-12-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괜찮은 책입니다. 대중적으로 어필을 못하는 컨셉이라 좀 안타까울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