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흉내내고 관능을 찬양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라.

   

-현존하는 최고의 고딕 비평가라 할 수 있는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처>가 출간되었습니다! 보통 미술이나 문학, 드물게는 건축, 혹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언급할 때에 종종 그 부분만을 드러내는 고딕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딕의 발생(후기 낭만주의가 대세였던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라니!)이 다분히 계급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애시당초 본질이란 게 없었고 사라짐과 죽음에 대한 모사로 가득찬 그 자신의 특성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하위 문화로써 변화무쌍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흔히 고딕 문화를 얘기할 때 이용하는 인간의 원죄의식이라든지 심리학적 고찰 대신에 문화사적인 추적을 함께하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즐겁습니다.

죽음과 어두움을 직접적으로 지향한다는 이유로 주류 문화의 영원한 공격을 받는, 그러나 오히려 그 피학성으로 인해 생명력을 유지하고 때로 이용되기까지 하는 (자본주의는 모든 추상들마저 자신 속에 내재화시켜 환전 가능하도록 만든다) 고딕 문화의 허허실실스러움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본격 하이 퀄리티 문화 비평서입니다. 번역도 깔끔합니다. 강렬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난이도: 중상, 여러 예술 작품들이 등장하므로 배경지식을 다소 필요로 함) -MD 금주의 선택

 

-다빈치 출판사에서 나왔던 <팜므 파탈>이 개정판으로 버전업되어 다시 나왔습니다. 고딕 문화의 거대한 축이며, 동시에 근현대 예술 작품들의 어둠의 어머니인 팜므 파탈들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팜므 파탈의 여왕 살로메로부터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허구의 인물들과 실존한 인물들이 그야말로 드림팀의 진형을 갖췄습니다.

주제 자체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탐색보다는, 팜므 파탈을 계열별로 구분한 뒤 각각의 특성에 대한 예술 작품을 탐색하고 그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례로 '롤리타' 꼭지에서는 소설 롤리타와 발튀스의 그림, 에곤 쉴레와 최규태의 그림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페도필리아(소아성애)적 특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소개를 하는 정도랄까요. 가이드북 정도라고 봐야겠기에 그 깊이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성성과 파멸이라는 매혹적인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는가를 살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성입니다. 교양 입문서 수준에서 친절하게 쓰여져서 읽기에도 편해요. (난이도: 중하, 독특한 주제의 문화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 혹은 여성성의 문화적 위력이 궁금한 분들께)

 

-드디어, 여왕님의 차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뒤늦게! 완역 출간되었습니다. 그것도 오브리 비어즐리의 오리지널 일러스트와 함께요.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앗아간 미녀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풍기던 정치 음모극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냄새를 풍깁니다. 등장인물들의 온갖 욕망이 얽혀 있고, 성욕은 비틀어진 채로 점점 고파가기만 합니다. 단순히 오스카 와일드가 20세기초 반문화의 기수였기 때문에 위악적인 설정을 사용한걸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각종 설정을 통해 은연중에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는 사드의 작품들에 비하면 <살로메>는 완전히 맹목적이고 파괴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요한을 제외하면) 자신이 무엇무엇을 원한다는 얘기 이외에는 거의 꺼내지 않습니다. 극 전체가 하나의 에너지에 홀린 듯이 맹렬하게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 중심에 완전한 욕망의 여왕인 살로메가 서 있습니다.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입니다. 요한을 죽인 이유도 성경에서처럼 어머니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애정을 거절한 요한을 죽여서라도 자기 곁에 두고 싶어서였죠. 저 유명한 씬, 죽은 요한의 시체 냄새를 맡으며 그의 잘린 목을 들고 키스하는 장면은 죽음과 관능이 스스럼없이 결합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뒤늦은 여왕님의 행차를 그저 반길 뿐입니다. (난이도: 중, 어둠의 포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은 모두 일어나서 영접합시다. 단, 희곡 알레르기 환자는 제외함)

 

 

 ...그러고보니

   

-심지어(?) 데이빗 린치의 책도 나왔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은 원제에 비해서는 다소 모호한 제목이네요. '월척 낚기'라고 쓰여진 원제처럼 어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데이빗 린치만의 방식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딱 펼쳤을 때 우파니샤드가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트윈 픽스를 만든 이 남자가 평정심과 고요함에 대해 끝없는 예찬을 펼치고 있어요. (작품의 기묘함과는 별개로) 그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가에게 보다 괜찮은 삶을 보장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영화감독답게 실제 영화 제작과정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어서 해 봐요'라고 유혹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영화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양념처럼 뿌려져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네요. (난이도: 중하,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모르는 분들은 내내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고딕류 팝아트랄까.. 아니.. 일본 풍의 고스(goth) 쪽이 더 가깝겠네요. 마리 킴의 작품집 <EYEDOLL>입니다. 최근 국내 유명 팝아티스트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는 솔직히 좀 어려운데요. 앤디 워홀 류의 자기(자아)소비가 시나브로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변한 채 심드렁한 '작품'들만 양산되는 게 재미가 없거든요. 그래도 이 책을 브리핑하는 이유는, 낸시 랭 류와는 달리 마리 킴의 작업에는 싸이월드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이 진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의 소비 문화로부터 출발한다는 팝아트의 원칙을 되새겨보면, 마리 킴의 스타일은 요시토모 나라 류의 일러스트와 싸이의 인기가 식지 않은 이 땅에 대한 적합한 소재 구성입니다. 아직 그 소재간의 결합은 어색한 편이지만, 이 노골적인 혼성문화(짬뽕) 작업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에, 모처럼 나온 작품집이기도 하구요. (난이도: ?, 팝아트 지망생,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있는 분들, 혹은 싸이월드가 어떻게 아티스트의 자의식 구축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구하는 미학도 및 사회학도)

-마지막으로... 퐁피두 센터 특별전 도록입니다. 좀 이상한 마무린가요? -_-;; 서양미술 거장전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른 전시회죠. 근-현대의 거장들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가의 자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때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해진 시대의 미술을 만난다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죠. 다크 포쓰 특집인 이번 페이퍼에 맞는 테마 관람도 가능합니다. 19세기의 세기말적 감수성에 연이은 방종과 전쟁과 다시 방종과 전쟁을 통해 미술이 그 자신 속에 어떻게 그림자를 품게 되었는가를 추적해보는 것이죠. MD의 일일가이드를 원하는 분께서는 리플을 달아주세요. ㅋㅋ

 

 

// 에고, 원래 다뤄보려던 책들은 쓰질 못했네요. ㅎㅎ 다음주도 있고, 또 언제 기회가 있겠죠 뭐. 모처럼 주제를 관통하는 책들이 함께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즐기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그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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