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의 왕 vs 기타의 신
제게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 D.960과 미완성 교향곡으로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슈만이 천상의 길이라고 했던, 마치 영원할 듯한 반복의 선율 말이죠. 특히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노라면 새하얀 벽의 미로를 한참이나 걸어가는 듯합니다. 돌다 보면 아까 거기인 듯하고, 다시 먼 길을 떠났는데 문득 여기가 아까 거기가 아닌가 싶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고, 이렇게 이 미로 속에서 영원히 헤메다 죽을지라도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천장 없이 트인 미로의 벽 위로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날씨는 화창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간지옥이 또 있을까요. 영원히 홀로- 그러나 결코 슬프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애잔함이 가득합니다. 제게 슈베르트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긴 시간과 미묘한 반복이 안겨주는 담담한 절망. 낭만주의가 피워올린 소박한 모양의, 그래서 더욱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
그런데 "국내 최강의 아마추어 말러 전문가" 김문경 씨의 슈베르트 이야기 <천상의 방랑자>는 또 다른 그의 매력을 들추고 있습니다. 아참, 그는 가곡의 왕이었지! 가사와 악상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변화무쌍한 분위기 전환을 꾀하죠. 고딕 호러 분위기의 섬짓한 노래는 물론, 로시니를 패러디한 유쾌한 노래도 있습니다. 저 유명한 가곡 '보리수'가 [겨울 나그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절망의 노래(자살 유혹에 대한 묘사라는)라는 흥미로운 이야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스토리와 함께 읽어가는 미뇽과 하프 켜는 할아범 연가곡도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해 한층 친근함을 가져다 줍니다. 아마도 저자가 직접 번역했을 가사 번역도 상쾌하고 젊습니다. "그런거야? 그런거야?" 하고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따져묻는 자는.. 슈베르트가 아니라 포로리...네. 여튼.
더욱 좋은 점은, 음반으로 듣기 쉽지 않은 곡들까지 죄다 추려서 이 책의 보너스 CD로 제공된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곡을 들으며 읽어가는 책만큼 친절한 구성이 또 있겠어요? 왕비를 죽이고 그 자신도 영영 물가로 돌아오지 않는 '난장이'를 들으면 정말 저 멀리 사라져가는 난장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 슈베르트는 제가 알던 슈베르트가 아니었어요. 이건 마치 폴 매카트니와 리치 블랙모어의 퓨전... 진짜로요! ;;
'조사 보고서'에 가까운 김문경 씨의 대표작(?) 말러 3부작에 비하면 저자의 목소리가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농담은 별로 재미가 없어요(죄송).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약간 더듬더듬하는 저자의 유머가 꼭 슈베르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재밌긴 합니다(설마 이걸 노린건?!). 표지가 더 예뻤다면 평이 훨씬 좋지 않았을까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난이도: 중하, 슈베르트가 왜 천재인지를 알고 싶은 분들, 클래식은 점잖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또는 가곡이나 클래식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고 싶은 분들께>
<에릭 클랩튼>은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입니다. 네, 에릭 클랩튼이 직접 썼습니다. 영미권에서는 발간 당시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죠.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 서태지 자서전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어쨌든. 기타리스트가 직접 쓴 글이다보니 굉장한 말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가정사의 반전!)은 책 초반부에 나와 버리고, 이후는 평탄한(?) 연대기입니다. 이러저러하다보니 '에릭 클랩튼은 신이다'라는 문구가 런던에 나붙고, 비틀즈랑 재밌게 놀았고, 누가 자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더니 지미 헨드릭스였고... 그런 대단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듯이 써 놨어요. 그야말로 천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난 그냥 기타를 치고 싶었을 뿐이고... 뭐 이렇습니다. 기타를 치고 블루스를 하고 싶었던 한 소년이 어느새 기타리스트 버전의 지구방위대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죠.
물론 영미권의 천재들을 놓아주지 않는 마약 이야기는 역시 꼭 끼어 있으며(이것도 어쩌다보니 헤어나올 수 없었다는), 수많은 비틀즈 팬들과 등을 돌리게끔 만든 조지 해리슨과의 마눌님 쟁탈전도(이것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인데, 그래도 내 곁에는 기타가 남았다... 재능과 영혼을 동시에 쏟아버린 천재가 남길 말 치고는 상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무덤덤함과 소박함이 오히려 와닿습니다. 그는 화려한 기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니까요.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의 명성에 걸맞는 차분한 분위기가 참 어울립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굉장한(제가 너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윤병주 씨의 감수를 통해서 음악적 고증이 탄탄합니다. 매니아 분들도 마음 편히 즐기셔도 된답니다. <난이도: 중, 60년대부터의 황금기 Rock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경고: 난이도가 중급인 이유. 록 음악의 역사에 전혀 무지하다면 대체 뭔 소린가 하다가 책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림이 그녀에게>는 미술 '에세이'입니다. 서른을 넘겨가는 여자-직장인의 이런저런 소회를 걸작 그림들에 엮어 풀어갑니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동갑내기 이말삼초 여성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죠. 예쁘고 인상적인 그림들을 고른 솜씨가 좋고, 컬러도 잘 뽑힌 편입니다. 공부한다기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그림 견문도 넓힐 겸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우아해 보이는 문화담당 기자 생활이란 사실 물 아래에서 쉼없이 첨벙거리는 백조같은 삶이라는 것(뭐 도서MD도 그렇습니다), 결국 청춘을 슬슬 떠나보내는 나이에 이른 우리네 친구 중 한 명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난이도:하, 고급 타임킬링 책을 찾는 분들, 또는 이유없는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말삼초의 여성 직장인들께>
<내 영혼의 그림 여행>은 좀 더 본격적인 에세이입니다. 사적인 이야기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미술(아기공룡 둘리도 나옵니다!) 이야기에 접어들면 질곡의 근현대사와 얽히고 설켜 때로 좌절하고 때로 절망하는 인간 군상들과 마주치게 되죠. 이 수많은 동서양의 그림들 속에서 저자가 찾아낸 것은 어떻게든 전진하려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무너지지 않게 꼭 붙잡는 여러가지의 사랑입니다. 정지원 시인의 글은 차분해서 좀처럼 솟아오르지 않고, 아마도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을 쓰라린 그림자들을 조용히 쓰다듬고만 있습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절망적인 현실에 맞딱드린 젊은 혁명가와 [빨래하는 사람]에서 엄마 손을 꼭 잡은 예닐곱 살짜리 꼬마는 이 책 안에서 서로를 보듬고 조응합니다.
게다가 골라낸 그림도 인상적인데요, 민중 화가들의 그림들이 종종 섞여 있어서 독특한 반향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저도 신순남 화백의 [달은 우리의 푸른 조국 2]를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봤네요. 글과 그림과 주제가 잘 엮여 들어간 아름다운 책입니다. 거창한 역사 이전의, 마음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이야기 그림책은 만나기가 참 어렵지요. <난이도:중하, 미술과 에세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대한 애호가들. 또는 아픈 역사와 고뇌하는 개인이란 무엇이었던가를 아직 기억하고 계시거나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예술MD 금주의 선택-
미술 에세이가 '머리에 쌓는 게 좀 모자라'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요걸로 하시죠. <색깔이 속삭이는 그림>입니다. 세계 명화들을 이용해서 풀어가는 색채론 전반이예요. 기본적인 색 이론에서 시작해서 색채심리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교양 지식을 함께하실 수 있어요. 로트렉의 그림에서 노랑과 파랑의 색온도 비교를,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푸른 색 그림자의 신비를, 마케의 그림에서 녹색과 적색의 대비가 주는 긴장감을 함께 읽어갑니다. 각 챕터마다 색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다량의 지식 섭취가 가능한데요. 특히 좋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쉽다는 겁니다. 근래 만난 미술 교양서 중에 대중들의 눈높이를 잘 맞춤과 동시에 성공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몇 안되는 사례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난이도:중하, 미술을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분들, 에세이 말고 조~금 더 본격적인 미술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께>
그리고, <서양미술거장전>입니다. 렘브란트 전으로 알려져 있죠. 사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딱 한 점에 에칭 십여 점 정도입니다만, 어쨌든 다른 그림들도 상당히 볼만한 게 많습니다. 이 책은 서양미술거장전의 도록인데요.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예습하면 나쁠 게 없다는 건 고대로부터의 진리죠. 가족, 연인, 친구들에게 1일 큐레이터가 되어 주세요. ^^ 아참, 이벤트 기간에는 이 책을 구입하시면 전시회 티켓이 1매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값 빼면 책값이...싸죠...;; <난이도:하, 미술관 갈 때 예습하면 더 좋다는 걸 깨달은 앞서가는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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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벌써 이렇게 써 버렸네요. 아직 책들은 남았는디.. 아쉽게도 차회 예고만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네 전통 춤판의 뒷 이야기 <춤과 그들>, 쌩초보를 위해 만화로까지 만들어진 DSLR 입문서 <디카툰>, 조선 후기 인물화와 카메라 옵스쿠라의 관계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한국과 이탈리아 비평가들이 반반씩 담긴 한국영화 감독론 <한국의 영화감독 7인을 말하다>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또 좋은 책들이 쏟아질 터이니... 네. 행복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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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서비스! 에필로그. <내 영혼의 그림 여행> 중에서.
둘리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버려지거나 쓸쓸한 처지이다. 둘리는 영희와 철수가 자신을 기쁘게 반겨주었듯이 도우너와 또치, 옆집 사는 가수 지망생 마이콜까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다. 혈족 중심의 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 관계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둘리의 생각은 길동 씨와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길동 씨 역시 이 불청객들을 통해 어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착한 본성으로 회귀한다. 이 집에서는 아기 희동이부터 어른 길동 씨까지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도우너는 길동 씨를 애완동물이라고 부를 만큼 가부장적 권위가 통하지 않는 집이다....(중략)...고모집에 맡겨진 아기 희동이나 마이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들은 계속 행복한 어느 가정의 주변을 겉돌 뿐이다. 그 집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나 둘리의 초능력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마법을 건다. “호이호이”는 고대부터 금기된 주문이다. “호이호이”를 외치면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리는 이런 권위지향적인 사회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고향이 되어주는 능력을 가르쳐 준다.
- 본문 215~217쪽 중에서 (붉은 색 강조는 제가 그냥 넣은 겁니다)
호이호이!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