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넘기셔도 좋을 고백

책을 잘 소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히 인터넷 서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입장도 아니고,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니까요. 눈 감고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균형을 어디서 잡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저로서는 처음 해 보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늘 유혹에 휩싸입니다. 무게추를 조금만 더 진지한 쪽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죠. 고백하자면, 애시당초 고물상 옆 보물창고라는 컨셉트가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거기에 쉽고 편한 책이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MD로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그러나 그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줄 상대가 누구에서부터 누구까지인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겨우 몇십 분 전, 막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무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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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끝에서 시작되다>

12월 25일에 1쇄가 나왔다는, 실수 치고는 아름다운 책 말미의 서지정보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자랑할만한 특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책이 괜찮았는데 왜 괜찮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입소문을 타고 종교분야 1위(11/26 현재 리뷰 209개)를 석권했다거나 하는 얘기는 홍보 문구로는 몰라도 제가 추천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문구는 아닙니다. 드라마틱한 실화라는 점도 진부한 자랑입니다. 스토리는 특별한 반전 없이 평탄하게 펼쳐지며, 두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얘기하는 구조 역시 특출난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징이 보이지 않는 매력. 그렇다면 그 매력은 평범함이겠죠. 그제서야 미스테리가 풀립니다. 이 책의 매력은 난 체하지 않는 무덤덤함에 있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그들 특유의 무덤덤함을 통해 색깔을 불어넣습니다.

"아니, 그냥 론이라고 부르세요."

"아니에요, 론 씨."

댄버는 단호하게 '씨'를 붙이더니, "부인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라고 물었다.

"데보라예요."

"데보라 부인." 댄버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난 부인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p.172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한 장면같은 이 무뚝뚝한 대화는 노숙자로 살아온 흑인과 자수성가한 중년 백인 남성이 만난지 몇 달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시종일관 이 둘의 대화는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건드리는 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없고, 신에 대한 절절한 찬양도 없습니다. 그 찬양의 역할은 백인 남자 론의 아내인 데보라의 몫이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이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죽음이 가져온 비극조차 신의 뜻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담겨 있지만, 왜 항상 비극이 은총의 씨앗이 되어야 하는지는 결국 알지 못합니다. 현명하게도 이 책은 여기에서 멈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것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책을 쓴 시점은 (당연히) 책에 쓰여진 모든 사건이 끝난 뒤지만, 직접 글을 쓴 두 주인공은 거기다 가타부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매 순간의 자기자신을 충실히 복기하는 데서 그칩니다. 그들은 겸손합니다. 신이 무엇이고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정으로 시련을 극복했고 감사를 통해 기뻐했을 뿐입니다.

론 홀과 댄버 무어가 직접 쓴 <끝에서 시작되다>는 이러한 단순함으로 인해 빛을 발합니다. 놀라운 우정과 신앙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리 곁의 사람들임을 고백합니다. 무리하게 신을 직접 끌어들여 운명의 깨달음을 지도 편달하려는 보통의 신앙 간증서들에 비해 이 책이 더욱 와닿는 이유입니다.  함부로 말을 던지지 않는 두 남자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C.S.루이스나 존.R.스토트 같은 인물들의 저작은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지만, 그 책들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별처럼 어떤 방향을 지시해주는 길잡이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평신도들의 곁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쉽게 빌어오지 않고, 무지한 자기자신으로부터 저 위를 향하려는 무뚝뚝한 의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이 책에 달린 아마존의 리뷰들을 떠올립니다. 209개, 평범한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 리뷰들이야말로 이 책이 누구의 가슴과 믿음을 위한 책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끝에서 시작되다>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완성 없이 영원히 걸어갈 뿐이라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각을 안겨주는,

한 편의 소중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p.s: 이 책에 인용된 책 중에 C.S.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 있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종교와 아픔에 대해 써내려간 사색록이죠. 논리정연한 루이스의 다른 책들에 비해 절절한 고통과의 사투에 가까운 <헤아려 본 슬픔>이 <끝에서 시작되다>에 인용된 것은 단지 그 내용의 유사함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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