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하나로 묶으면 좋아하고 싶지 않으니까가 됩니다. 왜 좋아하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또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다시 하나로 묶으면 내가 원하지 않거나, 혹은 미워하기를 원하니까가 됩니다. 물론 이 질문을 뒤집어 왜 사랑합니까? 라고 물어도 같은 길을 걷게 되지요.

나는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의 다른 존재들에게 호불호를 가릴까요. 내 욕망은 그 호불호를 보증할만큼 정확하거나 옳거나 혹은 '좋은' 것일까요. 사회적인 생물이라는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는 그 보완책이 될 수 있을까요? 미셸 우엘벡의 놀라운 소설 <소립자>가 떠오릅니다. 세계는 발전했지만, 사랑에 고뇌하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않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가 거기까지이며, 영원히, 영원히 그 고뇌를 재생산하면서 살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니까요.

이에 수많은 이론과 학문이 수천 년간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거대한 사변의 강줄기를 따라가면 발원지 즈음에서 꼭 이 분을 만나게 되죠. 부처님입니다. 불교라는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 우주까지 다다른 뒤, 다시 그 우주를 지워내기까지의 과정이니까요.

아는 분들께는 사족에 불과할 뻔한 불교 소개를 부득이 한 이유가 있습니다(양해를...).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책이 불교를 막 탐구하려는 분들께 참 좋은 책이라서요.

 

                                <-- 요 독송집은 자매품

부처의 신화를 보지 말고 그의 말씀을 들으라 -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이번에 소개드릴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은 매우 뛰어난 입문서입니다. 우선 빠알리 경전 자체가 담백합니다. 붓다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상상력이 첨가될 여지가 없지요. 그래서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이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매우 유명한 전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거나 하는 일화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요건 다른 본격 경전들도 그렇긴 하지만요). 대신에 수많은 대화와 사색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불교 신화가 아닌 불교의 철학과 세계관을 배우기 위한 발원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일아 스님의 요약은 '한 권으로 보는' 류의 다이제스트를 싫어하시는 분들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문장도 일반 산문처럼 평평하게 다져져 있고요. 쉬운 문장으로 경전을 풀어내기란 어렵기도 하거니와 꽤 위험한 시도입니다만, 일아 스님은 무심결에 흐르듯 쓴 것처럼 편안한 글을 선사합니다(그런데 사실은 2년 여를 두문불출하면서 매우 어렵게 써 내셨다고 하지요). 진입 장벽이 높은 원전은 커녕, 해설집조차 그 내용의 알참과 읽기 수월한 문장을 함께 갖춘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의 소중함이 더합니다.

물론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부처님의 인생, 팔정도나 사성제와 같은 세계 인식, 수행과 그에 따른 계율 등이 촘촘히 들어차 있어요. 입문서의 자격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성과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책은 여타 해설집들과는 달리 (각주를 제외하면) 일체의 첨언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경전 요약본이죠. 갑자기 인생 에세이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초심자용 경전 해설집들에 비해 참 깔끔합니다. 이 깔끔함 또한 원래 텍스트가 담백한 빠알리 경전을 바탕으로 삼았기에 가능했으며, 그 경전을 일아 스님이 풀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참 행복한 만남입니다. 텍스트와 편역자의 콤비 플레이가 이렇게 죽이 잘 맞다니! 읽는 중에 기분이 다 좋아졌어요.

책 이야기를 더 해 봐야 상찬을 반복하는 일만 되지 싶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겉핥기 불교 지식만 가진 저같은 범인은 무릎을 탁탁 치며 행복하게 읽었다는 말씀까지만 드릴께요. 발췌한 부분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기본 태도를 말하는데, 흥미롭게도 똘레랑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붓다의 말씀이구요. 왠지 앞에서 언급한 소설 <소립자>가 생각나서 저는 또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분 함께 보시면서, 이 다음을 또 기약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

p.s:  <-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입니다. 관심가는 분은 함께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까빠티까라는 브라흐민 청년이 있었다. 그는 (중략)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님, 구전으로 내려온 고대 베다의 찬가와 경전에 대하여 브라흐민들은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들은 다 가짜다.' 라고 합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중략) 브라흐민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브라흐민의 스승 가운데서 7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승의 스승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중략)

"이와 같이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브라흐민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고따마 존자님, 브라흐민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써 존경합니다."

"어떤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또한 어떤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그러므로 진리를 지키는[보호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진리를 보호하는 길-

"그러면 고따마 존자님, 어떻게 진리를 보호합니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께 진리의 보호에 대하여 여쭙니다."

"바라드와자(까빠띠카의 가문 이름),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나의 믿음은 이와 같다.' 라고 말할 뿐 '나의 믿음만이 진리이고 다른 믿음은 전부 가짜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받아들일 때 '나는 구전을 받아들인다.' 라고 말할 뿐 '구전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엉터리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견해를 찬성할 때 '나는 그 견해를 찬성한다.' 라고 말할 뿐 '그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p.260~262

이어 -진리를 깨닫는 길- ... 까지 하려니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한 권 구입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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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사랑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人 소립자를 읽고있습니다만.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랑이 있을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08-12-1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른다는 것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해야겠지요. 사실 사랑을 논리게임화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겠습니다. 그저 분명한 정신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