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카포티)

영화- 카포티 (베넷 밀러) 

 

          

 

-<인 콜드 블러드>가 번역돼 나왔던 2006년에 나는 가난한 학생이라 책 한 권 사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딱히 고집스러운 취향도 없어서 사람들이 입모아 칭찬하는 책만 쫓아다녔다. 그렇게 읽게 된 책들 대부분이 만족스러웠고 <인 콜드 블러드>는 대단히 그랬다.

1959년 미국 캔자스주 한 농장의 일가족 4명이 두 남자에게 살해당한다. 신문에서 기사를 읽은 트루먼 카포티는 직감적으로 '될 이야기'임을 알아채고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살인자를 취재하러 나선다. 소설이자 저널인 <인 콜드 블러드>는 그렇게 탄생하고, 카포티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 됐다. 그 구원의 책을 쓴 과정에 또 만만치 않은 드라마가 있어 그 얘기만으로 한 편의 영화가...

작가가 제아무리 실감나게 그려놓은 인물이라도, 눈 앞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의 강력한 존재감을 어떻게 따라갈까. 그 편견이 가볍게 배반당한 것이, '페리'가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 나한테 와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나를 장악해버려 낭패감마저 들었다. 책을 읽었을 땐 감탄했지만, 영화를 본 후엔 비난했다. 카포티가 살인마에게 접근한 방식과, 그 목적이었던 원고, 징그러운 탐욕이 못마땅해서. 어떤 소설들, 아니 많은 소설들이 타인에게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범죄 수준이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와서는 그건 그냥 귀여운 반응에 불과했다는 생각하지만.

경외심을 느낀다. 인생도 작품도 지독하게 설계하고, 연출하고 그 결과물이 무자비하게 눈부셨다는 것은. 그것을 직감하는 아찔한 순간의 환희와 광기가 영화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엉뚱하게도 일을 하려면 저만큼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자기계발의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든다. <인 콜드 블러드>를 읽고 한참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스산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나는 감정이 무디고 무딘 3년 차 주부고, 한글로 옮긴 이 책의 제목은 내 남편의 별명과 같다.

  

-어린이MD   이승혜 님의 특별 기고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작 vs 소설 

원작-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필립 K. 딕 앞에서 해선 안될 말

  

 -그럭저럭 먼 미래. 앤더튼 국장은 범죄를 미리 예측해서 예비 범죄자를 잡아 가두는 경찰이다. 그는 이 범죄 예측 시스템을 신뢰한다. 세 명의 예언자 중에 두 명 이상이 같은 결론을 내리면 범죄는 실행된 것으로 간주된다. 세 예언자 중 한 명이 '범죄 불성립'의 영상을 보여주었을 경우 이 법 집행은 33%의 틀렸을 확률이 있지만, 이런 '마이너리티 리포트(소수의견)' 사건은 발생 자체가 거의 없다. 따라서 발생 확률과 틀렸을 확률을 곱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지루한 재판 공방을 벌이면서 잘못 판결을 내릴 확률보다는, 차라리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묵살하고 예비 범죄자를 잡아두는 쪽이 확률적으로 안전하다.

  그런데 위 얘기를 들으면 어딘가 미심쩍다. 확률적으로 안전하다니. 이 범죄 예방 시스템은 절대적인 안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함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확률이 등장하면 이 시스템의 순결함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확률이 등장해 버린다면, 온갖 인간적인 것들, 감정, 음모, 욕망들 역시 이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이유가 없잖은가? 절대 체계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절대 체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인간이 관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류의 투입이 아닌가? 우리는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앤더튼 국장을 따라가며 이 질문들을 함께하게 된다... 소설이 좀더 그렇다. 왜냐하면

  원작에는 톰 크루즈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앤더튼 국장은 피로에 쩔은 배불뚝이 중년남이다. 본의아니게 음모에 휘말린 것을 알고 허둥대며 도망친다. 왕년의 실력을 깨워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는 현장에서 뛰는 경찰이 아니다. 그는 완벽해야 하는 시스템의 신봉자였고 그 시스템의 어딘가로부터 배반당했으며,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내었는지 깨닫는다. 그는 내내 힘겨워하고 후회하고 의심한다. 애당초 미래를 볼 수 없는 인간은 그 어떤 데이터를 통해서도 여전히 미래를 완벽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러나 이 결론을 인정하려면 자기자신의 과거부터 부정해야 한다. 수없이 처넣은 인간들과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나 자신'. 즉, 서구 합리 문명이라는 매트릭스 안에 빠진 불쌍한 인간. 필립 K. 딕은 우울한 중년남 앤더튼을 거의 지옥까지 밀어넣는다. 그때 같이 위기에 빠지는 자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이라 믿고 있는 시스템 외에는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자들. 앤더튼은 우리의 친구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옥 구경을 잠시 한다. 그러니 필립 K. 딕을 조심하시라. 그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지만 '합리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엄청 화를 낸다. 왜냐면 그거 다 거짓말이니까. 이 단편집을 포함한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서구적 합리를 신봉하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다.

  ...그렇다면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는 어떨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대충 만들었을 리는 없다. 물론 '간지쟁이' 앤더튼 국장은 사건의 실체를 찾아가는 순간에도 철학적 고찰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걸 폄하할 생각은 없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정해져 있다. 적절한 액션 씬을 유지하면서 음모를 진행하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하다(생각보다 이 영화는 액션 장면의 비율이 높다. 총질 주먹질을 덜 할 뿐이다). 따라서 앤더튼은 의심할 시간이 없고, 결국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불합리한 시스템은 앤더튼의 합리성에 의해 고발당한다. 필립 딕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영화에서는 더 나은 합리가 옛날 버전의 합리를 정복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액션영화이면서 동시에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를 만들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뿐이다. 스필버그는  '톰 크루즈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원작의 미래 예측 시스템을 가져다가 권력암투와 미남 액션을 잘 버무린 괜찮은 작품이다. 타겟이 분명하고 연출은 그에 따라 철저히 합목적적이다. 재미있는 영화... 잠깐? 합목적적이라고? 당신 그거 필립 딕이 얼마나 싫어하는...

 

-외국소설MD 최원호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1-03-2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지막에 결국 웃게 만들어주시는 엠디 님.
저는 근데 아마 '액션영화이면서 동시에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로 보이지 않아서 이 영화를 안 본 모양이에요. 스필버그에게 따 당한 관객. ㅋ 톰 크루즈의 왠지 미욱해보이는 - 저에게만 그렇겠지만 - 인상도 늘 별로구요.
하지만 소설은 은근 재미있어 보이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3-29 18:41   좋아요 0 | URL
소설 재미있어요. 저는 PKD 좋아합니다 ㅎ.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그의 단편집 중 하나인데요, 수록된 단편들은 웃긴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어요. 주로 암울한 소재들이지만 재미들이 있죠. 장편들은 좀 루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저는 좋아합니다).

PKD의 경우, 역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블레이드 러너구요. 원작소설/영화 모두 좋았던 사례로 늘 꼽히기도 하죠. '있어보이는 액션영화'이기도 하겠군요. 그러고보면 토탈리콜도 있고.. 아... 그걸 할 걸 그랬나? -_-;;;
 

원작 vs 영화 

원작- 렛 미 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영화-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스웨덴 버전)  

 

            

피와 눈송이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랑에 대해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성별과 연배와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에 감탄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다들, 그 하얀 눈에 튀던 피에 반한 거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감부터 멀어보이는 스웨덴의 교외.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작은 하얀 눈송이고, 마지막은 아시는 대로 커다란 수조 속에서 (붉은 연기처럼) 피가 느리게 퍼져나가는 장면이다. 아니 기차가 떠났고, 또 눈이 내렸던가.

이제와서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특히나 그 기억이 제법 찬란한 (그래서 희미한, 노출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종류라면? 잊기는 쉽지만 기억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을 요하므로, 게으른 사람들은 통상 말해지는 황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나 또한 그렇고, 그래서 아쉽다.

묽게 퍼지던 피처럼, 녹아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처럼, 그런 성질을 가진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일 테다. 당시엔 감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쏟아져나와 아우성치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끔찍했던가 이 말이다. 용솟음치는 기억들이 거창하고 담백하지 못한 어휘와 얽히는 장면들.

너와 나의 사랑, 흘러가버린 기억, 기억을 품은 공간과 그 공간 속에 무수하던 인간들의 속삭임. 어린 사내아이를 탐하는 늙은이, 얼큰하고 부패한 실업자, 다소 헤픈 여자의 우는 소리와 철분 섞인 도시 먼지가 나뒹구는 느낌이 영화에서는 꽤 탈색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끔찍한 전제를 깔고서도 오히려 순결해보이는 영화에 감탄했고 찬양을 바쳤던 게 아닐까? 나 또한 이 영화를 사랑하지만 말이다. 소설에는 고요하고도 시끄러운, 파랗고도 빨간, 차갑고도 뜨거운 이야기가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다. 양쪽 모두 좋지만 소설에 영화보다는 좀 더 찐득한 피가 흐른다는 얘기다. 영화가 첫사랑이라면, 소설은 조금 오래된 연애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해서 이 사랑 같으면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통째로 사랑인 이야기의 정체는 가늠하기 힘들게 되었다. 인터뷰를 보아하니 아마 작가도 잘 모르는 듯 싶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연처럼 일어나 사람들을 감흥시킨다. 그런 것들은 보통 기적이라고 불린다. 대수로울 것 없으면서도 소중한 기적이란 게 세상에 있다면, 이게 바로 그런 이야기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것들은...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되시겠다

 

-만화MD 김재욱 님의 특별기고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탐정소설은 일찍이 유행했던 다양한 종류의 문학 속에서 진화해 태어난, 보다 새롭고, 심오하고, 통렬한 문학이다. 일체의 예술의 전통정신과 형식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심리를 보다 깊이 파헤치고, 분석하고, 극약화劇藥化하고, 독약화하고, 나아가 원자화하고, 전자화하기 위한 예술계의 이단아였다. 예술의 신을 모독함을 전문으로 하는 반역예술이었다. 

  과거의 예술은 겉치장을 예찬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것이 진화해 그 겉치장을 벗겨낸 육체미의 감상을 주류로 하는 중세 예술로까지 진화했다. 그것이 현대... 즉 탐정소설 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진화하여, 그 육체를 갈기갈기 찢고 폐부를 끄집어내고, 해골을 토막 내, 혈액에서 분뇨까지 분석하고, 현미경으로 검사하여 그 기괴하고 추악한 아름다움을 폭로하고 전율하려 하는 것이다. 

  탐정소설의 사명은 거기서 탄생했다. 탐정소설의 진정한 사명은 이에 있다. (...) 이 때문에 이 천고불멸의 탐정본능을 과학이 낳은 사회기구로 향하게 하여, 이 양심없고 염치없는, 유물唯物 공리도덕이 낳은 사회악을 향해 잠입시켜, 그 기괴하고 추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그 그로데스크하고 에로틱한 맛을 살린 변태적인 아름다움을 움직이게 하여, 결론적으로 그 깊숙한 곳에 숨은 양심과 순정을 밑바닥까지 전율시키고, 경악시켜, 실신시키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을 탐정소설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 갖가지 허영과 허식에 우쭐대는 공리도덕과 과학문화의 장엄... 눈부시게 찬란한 과학문화의 외관을 찢어발겨, 그 밑바닥에 위축되어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 같은 인간성...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초미세 현미경적인 양심을 절대적인 공포, 전율을 느낄 정도로 폭로하는 그 통쾌함, 심각함, 처절함을 마음껏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읽을거리여야만 한다. 

  

-유메노 큐사쿠, '고가 사부로 씨에게 답함' 중에서. (단편집 <소녀지옥> 역자 후기에서 재인용) 

 

부담스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하고 자아도취적인 저 문장들. 범인류적인 사명감. 역시 희대의 괴작 <도구라 마구라>를 쓴 유메노 큐사쿠죠. 그러나 이 단편집 <소녀지옥>은 보다 '일반적'으로 매력적입니다. 정신이상 계열의 탐미주의랄까, 지옥 버전의 <설국> 이랄까 그런 느낌입니다. 예전엔 정말 간지라는 게 있었구나 싶네요. 20세기초의 로망이 이런 것이었겠죠. 비정상 전문가인 미치오 슈스케나 히라야마 유메아키도 아직 이런 기품(?)을 가지진 못했군요. 어쩌면 시대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위의 발췌를 읽어 봅니다. 야 역시...(웃음) 

아, <소녀지옥>은 3/31까지 추가적립금 2천원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작 vs 영화 

 

원작- 안개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 수록, 스티븐 킹)

                                               영화-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B급 몬스터 공포물, 아리스토텔레스를 호출하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음)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서 재밌는 축에 속하는 중편 '안개'는 초중기 스티븐 킹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공포, 그리고 극한 상황에 부딪힌 인간 군상의 자발적 붕괴. 특히 후자의 경우는 스티븐 킹의 초자연 공포물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안개'는 킹의 팬들에게는 작은 선물상자다.

  가시적인 공포 없이 불안감만을 쌓아오던 전반부가 지나면 서서히 '압력'이 가중된다. 고립된 슈퍼마켓 안에 갇힌 사람들의 불신과 불안이 어떤 임계점을 향해 다가간다. 이 불안의 압력은 어떻게든 배출되어야 하는데,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깥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형형색색의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압력은 계속 출구를 찾아 헤매지만 출구는 없다. 당연히 폭발은 내부에서 먼저 발생하고, 광기가 슈퍼마켓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주인공만은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가 슈퍼마켓을 빠져나와 안개 속으로 피신(!)하는 장면은 어딘가 계몽적이고 냉소적이다. 주인공은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불안 압력이 자신에게 끼칠 위험 정도를 계속 가늠하다가 내부의 위험이 더 강해지는 순간 미련없이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행동하는 회의주의자다. 겉보기에는 괴물이 인간보다 훨씬 무섭지만, 인간 내부에서 발생한 위협이 괴물들의 그것보다 더할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 '안개'의 열린 결말은 그래서 냉소적이다. 인간들 사이에 남느니 차라리 불확실한 위험들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씁쓸함.

  문제는 영화다. 영화는 소설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쇼생크 탈출>로 각색 실력을 인정받은 프랭크 다라본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원작자 스티븐 킹이 격찬했다는 그 결말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희대의 낚시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더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이 비극적인 결말은 원작에서 성큼 나아간 것이다. 냉소적인 원작은 각색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좋은 비극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늘 열성적이고 최선을 다하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최대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드라마에서는 어색할 정도로 완벽한 인격체이며, 회의주의자가 아닌 뜨거운 영웅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비극의 주인공이다.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음에도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소설의 가장 큰 적은 인간 군상이지만, 영화의 가장 큰 적은 절대적인 운명 그 자체다. 이 결말이 영화 전체를 한 단계 올려 버린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으로 차갑게 마무리된 원작을 밀어붙여서 고대 비극의 '뜨거운' 구성을 완성시켰다. 이 결말을 반전이라고 한다면, 배반당한 것은 관객들의 평범한 기대다. B급 외계 괴수 영화에서 설마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 그것이 이 영화의 '낚시'였다. 마지막 순간의 절망에 존속살인의 요소가 있다는 점은 감독이 고대 비극에 바친 작은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다른 미덕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저예산으로 최대한 열심히 만든 독창적인 괴수들의 비주얼, 그리고 사람들의 눈높이를 유지하며 불안하게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카메라워크가 그렇다. B급 영화만이 가진 미덕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감독판 DVD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은 원래 감독과 스티븐 킹이 개봉 버전으로 쓰려고 했던 '흑백버전'이 들어 있다. 흑백 화면 속에서 괴수들은 더욱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안개는 화면의 명암 대비를 지우면서 그야말로 장막처럼 들어찬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은 저예산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 같다. 이 흥미로운 버전을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길. 어떤 소설이 영화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극히 드문 사례이니까.

 

-외국소설MD 최원호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