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무 힘들어서 하루 쉽니다. ㅠㅜ 

 

 

제가 무지 좋아하는 책입니다. 

스터즈 터클 만세! 노동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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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소설MD김효선 2011-04-0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 말아요.... 근성맨...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2   좋아요 0 | URL
근성을 어디다 발휘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고랑 2011-04-0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요즘 켈로그의 주 6시간 노동에 대한 책이 그렇게 좋더라고요.....노동자 만세!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4   좋아요 0 | URL
이후 책 말이죠.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스터즈 터클은 저의 완소 저자시죠. 담에 함 읽어보세요. ㅎ

stella.K 2011-04-0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성실하시군요.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4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
 

원작 vs 영화 

원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코이즈미 타카시) 

 

             

봄 쌍둥이

 

  -대부분의 수학 소설들이 실패한 이유는 수학을 미스테리로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천재들의 암투는 아무리 쉽게 해설해 봐야 해설 따로 소설 따로가 되기 일쑤였다. 풀 수 없을 것같은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과정은 미스테리적인 전개에 가장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들이 그 풀이의 전개를 따라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해설에 신경쓰다간 죽도 밥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수학 소설은 대개 교양(을 위주로 한) 소설이 되거나 수학자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소설로 변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 가운데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이 소설에서 수학은 그저 신기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비밀을 말해줄 뿐이다. 천재 수학자의 맞상대는 꼬마와 가정부이기 때문에, 이 소설 속의 수학은 어떤 공식도 필요로 하지 않고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자유롭다. 꼬마에게 말해주는 수학의 세계. 이 가벼움이 성공의 비결이다.<박사가 사랑한 수식> 속의 수학들은 더이상 숫자 공식이 아니라 현자의 깨달음, 명언이나 잠언 같다. 수학자들이 발견한 우아한 진리를 쉽게 공유하기. 심지어 오가와 요코는 수학이 오히려 얼마나 써먹기 쉬운 아름다움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 어떤 멋진 광경이나 생물체도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퇴색하지만, 수학은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티없이 착하고 순박한 이야기와 수학은 서로를 북돋아준다. 등장인물들은 수학의 명징함을 사랑하게 되면서 더욱 순수한 이미지를 얻게 되고, 수학은 이 착한 사람들의 언어가 됨으로써 호감을 북돋운다. 이 소설에는 어떤 계몽도, 지적 충족을 위한 해설도 없다. 수학은 투쟁 대상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신비한 질서를 찾아내는 이야기, 그것도 예상외로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다. 소설의 설정과 수학의 멋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얽혀들어간 경우는 무척 보기 어렵다. 좀더 수학에 단련된 독자들은 테드 창의 단편 '0으로 나누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봄볕처럼 따스하고 선한 수학 이야기는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울 듯하다. 투쟁하는 수학, 생과 맞바꾸는 수학, 몰락하는 천재들, 비극적인 사건들. 여름, 가을, 겨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이런 것들이 없는, 아마도 유일한, 볕 좋은 봄날의 수학이다. 

  영화는 신기할 정도로 원작과 닮아 있다. 부드러운 볕이 영화 내내 비쳐온다. 집 안은 단촐하고 정갈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카메라는 늘 인물들을 안정된 위치에 잡아준다. 그래서 영화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이 정직한 연출은 담백함 외에 딱히 장점이 없는 많은 일본영화들의 공통점이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화는 대개 괜찮은 영화가 아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도 마찬가지다. 기지가 번뜩이지도 않고, '평범하지만 과감'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담담한 연출이 원작 소설과 마침 잘 들어맞았다(결국 원작 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원작의 미덕까지 그대로 계승한다. 계속 뭔가를 더 전해주려 애쓰던 수많은 실패작들과는 달리, 그저 함께 웃고 격려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것 말이다. 어쩌면 그게 요즘 국내에서 사랑받는 일본영화들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해지려들지 말고 그저 함께 누워 쉬는 것. 편안한 휴식. 길고 따뜻한 봄.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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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책도 영화도 모두 본 작품이 나와서 무지 반가워요! ^^

외국소설/예술MD 2011-04-05 10:52   좋아요 0 | URL
근래 너무 뻑뻑한 것들만 하지 않았나 싶어서..^^;
 

원작 vs 영화 

원작- 배틀 로얄 (타카미 코슌) 

영화- 배틀 로얄 (후카사쿠 긴지) 

 

          

뜨거운 안녕

 

 -일본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소설 <배틀 로얄>은 한국에서는 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아마 설정이 우리나라 정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침 소설 출간 당시 일본문화 수입에 따른 쓸데없는 논쟁이 과열되어서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배틀 로얄>은 문제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반 고등학생들이 단 한 명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설정은 너무 노골적으로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폭력이 직접적이고 시각적이냐, 아니면 시스템 속에 녹아들어서 눈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었다. 최소한 일본과 한국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이 공격적인 '현실성'은 한일 양국에서(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작가인 타카미 코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했던 스티븐 킹의 <롱워크>와 비교하면 더욱 그 점이 눈에 띈다. 

  지원자 중에 무작위로 뽑힌 청소년들이 단 한 명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끝없이 걷는 게임(멈추면 뒤따라오는 군인들에게 사살당한다), <롱워크>는 무한경쟁의 폐해와는 거리가 있다. 빗나간 사춘기의 여러가지 욕망, TV중계로 이 살인 서바이벌을 보고파 하는 대중의 어두운 욕망, 그리고 그 살인 서바이벌 쇼를 기획하는 파시즘 국가의 욕망. <롱워크>는 욕망들의 충돌이었다. 그에 반해 <배틀 로얄>은 강제적이다. 누가 억지로 등을 떠미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이것은 미국 청소년과 일본(한국) 청소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롱워크>만큼이나 <배틀 로얄>이 중요한 작품이다. <배틀 로얄>은 <롱워크>만큼 신선하지도, 더 많은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숨겨놓고 있지도 않았지만, 지금 여기, 극동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가장 노골적이고도 슬픈 위로였기 때문이다.

  <배틀 로얄>의 남녀 주인공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매력이 없다. 대신에 선과 악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작품을 끌고 간다. '뺏기는 쪽이 되느니 뺏는 쪽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급우들을 거침없이 죽이는 학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거기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은 어차피 죽을 판이 되고 보니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했네, 걔가 너를 좋아했네 같은 숨겨진 사연들을 공개하면서 소설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만든다. 지금 죽나 사나 하는 판에 그게 중요한가?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른들의 세계에 먼저 눈뜬 아이들이 급우들을 죽이기 시작하는 순간, 아직 소년소녀로 남아있는 아이들은 목숨만큼 소중했던 비밀들을 하나둘 터뜨리면서 죽어간다-어른이 되어간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 이 세계'다. <배틀 로얄>의 이 허망한 청춘 고백들은 결코 위대한 성취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결코 위대하지 못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배틀 로얄>이 있다. 이 영화는 흥행용으로 생각하면 실패작에 가깝다. 원작의 소년소녀 감수성이 거의 다 삭제당한 영화 속에서는 감상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가끔 있는 플래시백은 환상이거나, 죽기 직전 찾아오는 주마등같은 추억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를 포기하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장면에 주목한다. 여자아이들끼리의 강력한 커뮤니티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철없는 남자애들은 아니나다를까 뭔가 하나 싶더니 죽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는다. 무슨 사연을 가졌든간에 죽는다. 비주얼이 동기를 압도한다. 죽음이 지나온 세월을 압도한다. 대낮의 환한 햇빛 아래서 기관총탄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여고생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피와 죽음만큼은 맹렬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이래서야 주인공들이 살아서 섬을 떠난대도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가 없다. 일본(소설에서는 대동아공화국) 전역에 지명 수배가 내려질텐데 그 기약 없는 투쟁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피투성이의 삶을 연장한 것뿐이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감독인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였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로 유명한 그의 세계는 빠져나올 수 없는 폭력의 늪이었다. 그의 영화 속에서 가치판단은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누가 어떻게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뽑았느냐가 생사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니 이 부질없는 목숨 외에 신경쓸 것이라고는 간지 뿐이다.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안하게 폼이 나는 선굵은 액션들이 빛을 발했다. 어떤 '인간'도 그 빛나는 늪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야쿠자들이 아닌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배틀 로얄>도 얼핏 그렇게 보인다. 후카사쿠 긴지 스타일의 늪.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영화 버전에는 원작에서 살아남은 소년 감성이 딱 하나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아무 이유 없는 의욕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일단 희망한다. 일단 희망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없다면 의심하지 않는다. 일단 믿는다면 서로의 목숨을 걸어줄 수도 있다... 이 희망은 영화 내내 아무런 근거가 없이 발생해서 좀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단지 주인공이라서 살아남는 건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선생 역할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다. 학생에게 칼을 맞고 교사를 그만두었다가 배틀 로얄의 진행자로 돌아온 다케시는 영화 내내 표정이 없다. 그러나 감정 자체가 거세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열쇠다. 그는 마지막에 주인공들과 대치하는 순간 총알이 없는 총으로 주인공들을 겨누고, 그들의 총에 맞아 죽은 뒤 여주인공의 꿈속에 다시 등장한다. 그는 그제서야 웃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세대)는 이미 끝났어. 그리고 그 꿈의 마지막, 혹은 영화의 마지막은 "달려라" 라는 커다란 자막이다. 나는 그제서야 기타노 다케시가 후카사쿠 긴지였다고, 배틀 로얄의 세계를 인생 내내 그려왔던 감독이 최후에 '아이들에게' 남겨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희망을 어떻게 불러와야 하는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너희들만큼은 꼭 다른 인생을 살아가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의리 없는' 영화 속으로 초대한 다음, 힘겹게 그 손에 희망을 쥐어 주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 막무가내의 희망을.

 <배틀 로얄>은 후카사쿠 긴지의 마지막 영화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막은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뜨거운 유언, 작별인사다. 이렇게 하나의 세태 고발 SF는 한 거장이 다음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주문이 되었다.  

-외국소설MD 최원호 

 

p.s: 사실 후카사쿠 긴지는 <배틀 로얄 2: 레퀴엠>도 만들고 있었다. 첫 촬영 이후 사망했기 때문에 마지막 작품이 <배틀 로얄>인 것은 맞으나, 다음 영화를 만들었으니 배틀 로얄의 마지막이 유언은 아니냐고 해도 할 말은 없다. 

p.s 2: 원래 절판된 작품은 쓰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입니다.; 

p.s 3: 재미있는 배틀로얄 영화판을 찾으실 분은, 헐리우드판 배틀로얄인 <헝거 게임> 시리즈 영화화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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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로드 (코맥 매카시)

영화- 더 로드 (존 힐코트) 

 

           

아버지들은 왜 매일 살아남으려 할까

 

 -코맥 매카시는 한 인터뷰에서 <로드>를 쓰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는 늦둥이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여행 중의 어느 날 밤, 매카시는 상상 혹은 환상을 접했다고 한다. 아들이 곤히 자고 있는 가운데, 창밖이 온통 불타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아들과 창밖의 끝없는 화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했고, 그 장면의 기억과 느낌을 바탕으로 소설 <로드>를 썼다. 

  <로드>의 세계는 지옥 그 자체다. 인간은 물론이고 생물 자체를 구경하기가 힘든 잿덩어리 땅 뿐이다. 미 대륙 전체를 날려버린 대화재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긴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매일매일을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재앙의 기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마실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은폐된 공간 뿐이다. 이 강제된 소박함 사이에서 탐욕은 금방 눈에 띈다.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여러모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온갖 쓸만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데다 식욕 성욕을 모두 채울 수 있다. 슬프게도 이 '대재앙 이후'를 다룬 소설 속의 세계는 지금 여기와 무척 닮아 있다.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사람이 살겠다고 주장하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하물며 가장 현실적인 방법들을 택한다는데. 

  그리고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 가장 용기를 낸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살아야 할 이유란 게 있는가? 그는 인간이 '굳이' 생존을 유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회의적인 인간이 된 동기로는 대재앙을, 그리고 부인의 자살과도 같은 가출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그는 대재앙 이전에는 행복했는가? 그는 모범적인 중산층 남자였는가? 아무도 모른다. 매카시는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코맥 매카시 자신일 '아버지'의 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그의 내면이 예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허무가 표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 폐허는 소설가의 내면이므로 <로드>는 대종말을 다룬 SF가 아니다. 이 폐허는 고도를 기다리던 두 남자가 죽어 파묻힌 숲이다. 부조리 연극의 배경이고 아버지 자신의 내면이며, 그가 어른이 된 이후 줄곧 살아왔던 바로 그 세계다. 그는 자살에 대해 생각한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예전에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들은 그의 짐이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인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 아들은 추호도 쓸모없는 완전한 짐이라서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운다. 그가 아니면 아들은 처참하게 죽어갈 테니까. 그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이 열성이 어디서 오는지는 그역시 모르며, 심지어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 무기력한 존재는 그의 신비다. 그는 오직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살아남는다. 그가 윤리를 지키는 이유 역시 아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의 모든 것이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은 거의 무정부적인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고 자기보호적인 인간이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다 격렬한 폭력과 거대한 허무를 동반한다. 그 허무가 이 세계와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그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로드>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소설 전체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로드>가 정말로 그의 고백이건, 아니면 어떤 상징이건간에 맥카시는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다. 비록 그 희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그 희망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원서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son 대신에 boy라고 불렀다) 그는 그 희망을 신뢰한다. 이 결론은 슬프다. 그러나 이 슬픔이야말로 코맥 매카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대한의 것이다.

  영화는 원작을 옮겨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과연 재로 가득찬 풍경은 재난 영화를 자주 만든 헐리우드의 위력이 느껴진다. 비고 모텐슨의 연기도 좋았다. 때에 절은 잠바와 꾀죄죄한 수염 속에서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그의 열성이 느껴진다. 그도 아들이 있어서일까. 어쨌든, 좋은 비주얼과 좋은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원작과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는 과거 회상 장면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재난 이전에는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무너진 현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아내를 도울 수 없었던 무기력함이 그를 무표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원래 친절하고 강직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아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코맥 매카시가 아니다. 영화가 원작의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서 적절한 연출과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는데도 어딘가 가볍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영화 역시 지옥을 헤쳐가는 부자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원래부터 세계를 믿지 않던 남자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누가 어울릴까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본 <스토커> 생각이 났다. 이미 죽어버렸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면 그 지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깊이 잠겨들듯이.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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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안소니 밍겔라)

 

          

내가 사막이 되면, 내 안에 사막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안소니 밍겔라는 원작이 좋을수록 그에 비례한 좋은 영화를 만드는 재미난 특성을 가진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의 '퀄리티'를 가늠한다면 보통은 들어맞는다. 그리고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안소니 밍겔라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밍겔라 특유의 감성적인 장점과 더불어 평소의 그답지 않은 특징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무척 집중했던 이 감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핸들을 반쯤 놓아 버린다. 등장인물들의 전후사정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삼각관계에 빠진 사람들은 힘싸움을 벌이지만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미스터리가 있고 로맨스가 있는 시대극임에도 밍겔라 감독은 스토리에 압력을 넣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호소력있는 영화 캐릭터 대신에 눈앞에 있는 인간의 말과 몸짓밖에 볼 수 없다. 이 영화는 그 유명세에 비하면 확실히 불친절한 축에 속한다. 그러나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이런 불친절한 영화들에 다소 익숙치 않은 사람들마저 반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랄프 파인즈와 월렘 데포는 사막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사에 버금가는 무게를 전달한다. 랄프 파인즈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길 때, 관객들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이 남자의 과거 속으로 초대받는다. 월렘 데포가 누군가를 주시할 때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다. 이 남자들은 욕망하는 듯, 미워하는 듯, 사랑하는 듯 싶지만 정확히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인물이 아닌 오브제가 되고, 그대로 사막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거꾸로 사막을 자신의 내면 속으로 불러온다. 고독을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다. 그리고 이 침묵들 속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종종 새처럼 날아오른다. 한번은 정말로 공중에 떠오르기도 한다...

원작소설은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한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영화가 그토록 침묵했는지 알 수 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신기루의 폭풍이다. 시점이 변하고 주체가 바뀐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싶다가 갑자기 사막의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과거가 플래시백처럼 번쩍 나타났다가 꿈처럼 끝을 흐리며 사라지기도 한다. 실체가 아니라 영상 혹은 흔적들이다. 배경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섞여드는(그래서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끝내 이루어지거나 완결되는 것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잃어버렸음을 알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망 역시 거의 품지 않는다. 절망도 희망도 이들을 비껴 지나가고, 다시 남은 것은 사막의 풍경이다. 모든 감정과 욕망을 흡수하고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계의 무자비한 황홀함. 알마시가 가지고 다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자꾸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 신기루 같은 현재들이 쌓여서 저렇게 단단하고 굳건한 역사가 발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질문에 함께하기 위해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의 한 형태는 아닌지를. 

아참, 저 혼란스러운 신기루 폭풍은 정말로 아름답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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