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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시핑 뉴스 (애니 프루) 

영화- 쉬핑 뉴스 (라세 할스트롬) 

 

          

 기적을 다루는 능력

  

-삼류 신문기자 쿼일은 날라리 여자에게 넘어가 어쩌다 결혼을 했다. 그 여자는 다른 남자랑 바람이 나서 하나뿐인 딸을 '업체'에 팔아먹고 도망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쿼일은 우여곡절 끝에 딸을 찾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무능력한 인간 패배자. 그것이 쿼일이 생각하는 쿼일이다. 결국 그는 친척의 권유로 고향인 뉴펀들랜드로 돌아간다...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 초반부를 읽다 보면 이 소설의 나머지가 예측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단편집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어 본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척박하고 비린내 나는 뉴펀들랜드의 자연, 밥벌이의 지겨움, 사랑의 실패, 뒤틀어진 기억, 온갖 오해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그리고 소설은 정말로 그렇게 진행된다. 순수 문학이 좋아하는 주제인 '생의 비루함' 따위를 향해 애니 프루는 부드럽게 클러치를 밟는다. '미국 현대소설들은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뉴펀들랜드의 거칠은 파도와 펄떡거리는 생명체들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루한가. 때마침 근친상간에 얽힌 과거가 터지고,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는 찜쪄먹는 엉망진창 가족사가 등장하면서 스토리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그런데 어느 순간 쿼일이 일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서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마술적 리얼리즘이 소설 속에 깃든다. 뭐? 애니 프루인데?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가? 그렇다. 애니 프루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등의 예수님스러운 기적을 소설 속에 뿌려 버린다. 그런데 그 기적 배포 작업은 무척 매끄럽고 교묘해서, 독자들은 애니 프루의 묘기에 반하고, 쿼일은 이 신비들이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적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가만, 그렇다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이 삶이 앞으로도 꼭 불행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이 사람들, 다 살고 있잖아?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쿼일은 저렇게 중얼거린다(혹은 생각한다). 동의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러나 <시핑 뉴스>는 그 희망을 (대부분의)독자들에게도 안겨주고야 만다. 이 소설은 지금 '설마요'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쓰여진 소설이니까. 그리고 애니 프루는 좋은 소설가니까. 

...영화는 길게 험담을 늘어놓으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케빈 스페이시 + 줄리언 무어 콤비에다가 <길버트 그레이프> 감독인 라세 할스트롬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법하다. 그러나 라세 할스트롬은 조목조목 원작 장면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성실하고 심심한 각색과 연출로 일관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그랬어도 됐지만, 아니, 차라리 브로크백 마운틴을 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라세 할스트롬은 <시핑 뉴스>의 기적을 다룰 줄 몰랐다. 영화는 원작이 가속하는 부분에서 깜짝 놀라고는 쫓아가기에 급급하다가 헐떡이며 끝난다. 저 아까운 캐스팅을 감안할 때, 좋게 생각해도 범작 수준이다. 케빈 스페이시나 줄리언 무어의 팬이라면(나는 그 둘 모두의 팬이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보시기 바란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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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서 C. 클라크)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언어 너머의 시 

  

 "이제 커다란 판은 아무런 특징 없이 똑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 속에 서 있는 빛의 기둥이었다. 원숭이인간들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흔들고는 곧 오솔길을 따라 자신들의 은신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자신들을 집으로,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로, 별들이 빛나는 우주로 인도해 주는 이상한 빛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p.42 

 SF계의 그랜드마스터 중 한 명인 아서 클라크가 문장의 마술사라고는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아서 클라크는 발상 자체가 시詩다. 문장은 평이하게 그 발상을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서 클라크는 시인이다. 다만 시는 글 속에 있지 않고 글이 전달하는 아이디어의 상태로 존재한다. 시는 글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글 속에 숨어 있다. 그렇게 치면 모든 글이 다 시가 아니냐고? 물론 모든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 그러나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더라도 아무나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 아서 클라크는 역사에 남을 시인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인들처럼 신에 대해, 초월적인 존재(신이 아닐 수 있음)와 우주에 대해, 그리고 인류의 본성에 대해 썼다. 아서 클라크는 과학과 감각과 상상을 동시에 저글링할 줄 알았던 고대 시인들의 후예다.

 그리고 이 작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하나의 경지다. 이 작품 속에 클라크의 시들이 모두 들어가서 서로 얽혀들었다. 인류는 초월적 존재로 인해 재창조(급속 진화)되고, 인류 역시 AI를 창조하며, AI는 우주에 대해 고찰하다가 초월적 존재 양식을 예감하고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간파한다. 다시 (불완전함이 간파당한) 인류는 초월적 존재와 마주친다. 각 소재들은 떼어놓고 보아도 흥미롭지만, 시간축에 맞추어 순환 구조를 취하는 구성으로 인해 한 권의 굳건한 장편소설로 '이루어졌다'. 보기 드물게 우아한 나선형 상승 곡선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거대하고 느린 시다. 호메로스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사랑할 것이다. 이 소설이 한물 갔다거나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서 클라크의 발상이 사실상 고전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SF가 스타워즈인 걸로 착각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전쟁도 로맨스도 없다. 더없이 우아한 사고와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 역시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이다. 사실 이 영화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형 스크린에서 보아야 한다. 시야를 메우는 스탠리 큐브릭의 강박적인 세트 구성은 현란한 특수효과 없이도 이미 스펙터클하다. 적극적인 음악의 사용, 대사를 통해 '서술'하는 대신 등장인물과 배경의 움직임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기'. 이 시청각의 스펙터클은 "거의 말하지 않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원작의 핵심을 분명히 잡아내고 있다는 증거다. 소설과 거의 동시에 작업이 진행된 이 영화는 소설의 결과물, 즉 '글'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서 클라크의 아이디어에 매개체 없이 거의 곧바로 접근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큐브릭 역시 시를 쓴 셈이고, 결국 원작보다 더욱 축약되고 신비로운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 속의 모노리스는 원작과 달리 일말의 설명도 주어지지 않는 신비 그 자체이며, 이 영화는 그 절대 신비를 둘러싸고 음악과 시각 효과와 꼼꼼히 짜여진 미술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 제의, 탐색(고대에 그것은 하나였다)이다. 

 이만큼 위대한 소설-영화 콤비도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원작'이 없다.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두 쌍둥이가 모두 밝은 빛을 발하는 기적을, 한 번 뿐인 인생이 끝나기 전에 꼭 느껴보시기 바란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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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3-2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어머무시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
MD님의 혈관 어디쯤에도 고대 시인들의 뭔가(?)가 숨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1-03-22 17:12   좋아요 0 | URL
저는 감격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물 좀 닦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만세! ㅠㅜ

카스피 2011-03-2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스페이스 오딧세이 4부작중 왜 나머지 3권은 재간 혹은 첫간행을 하지 않는답니까? 버럭 3:< 외국소설/예술MD 출판사에 압력좀 너주세용^^

외국소설/예술MD 2011-03-23 11:30   좋아요 0 | URL
그게, 장사가 잘 되느냐 아니냐는 약간 어려운 문제니까요 ㅎ. 아 자랑하자면 저는 3001 오디세이(어디서 만들었는진 아시죠?)를 갖고 있습니다. ㅎㅎ

카스피 2011-03-24 12:12   좋아요 0 | URL
아니 그 100명중의 한분이신가요.MD님도 상당히 SF팬이시네요.넘 부럽습니당^^

외국소설/예술MD 2011-03-24 18:59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 1퍼센트- 보다 더 희귀하군요. ㅎ
 

원작 vs 영화

원작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영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코맥 맥카시의 소설들은 사실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는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대사와 지문은 섞여 있고, 인물들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들은 독자에게 일정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마찬가지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며 이동할 때마다 맥카시는 흐름을 잘라 버린다. 거두절미하고 새로 도착한 장소를 묘사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범행 경로를 추적하는 사진 기록이다. 두 장의 사진 사이에 있는 흐름은 눈에 드러나지 않고 그저 '느껴진다.' 

이 불친절한 방법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잘 어울린다. 등장인물들의 추적/도망이 고립된 장소들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옮겨 다니는 모텔들은 비록 현대의 마을이나 도시 안에 있더라도 (맥카시의 다른 소설들의 배경인) 황무지/서부의 야생만큼이나 고립된 장소다. '커뮤니티가 없는 방랑자들의 집합소'인 모텔은 한 야수로 인해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변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야수(안톤 쉬거)가 이 문명 세계를 서부 개척시대로 단번에 퇴화시켜버린다. 

아무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는 '인간적인 이해'라는 범주 밖에 있다. 때문에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에게서 도망치는 '인간'과 그를 쫓는 '인간'들 모두 무기력함에 파묻힌다. 보안관의 늘어나는 독백이 그 증거다. 처음에 성실하게 세계를 관찰하던 그는 점점 자신 안으로 빠져든다. 독백 혹은 대사가 서술/묘사(세상을 관찰하기)를 잠식한다. 그가 이해하던 세상이 안톤 쉬거로 인해 서서히 붕괴하는 것이다. 결국 보안관은 이 세계가 사실은 이해 불가능한 곳이라고 고백하고야 만다. 그때 보안관의 시야에서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묘사는 없고) 그의 독백만이 그 자리를 메꾼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부정당하는 순간, 보안관에서 한 무기력한 노인으로 전락한 남자의 독백.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계가 <로드>에 등장하는 대재앙의 지옥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불친절한(?) 전개를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의 순간들 뿐이다. 나머지는 사족이므로 지워졌다(고 생각한다).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코엔 형제의 영화도 원작에 뒤지지 않는 걸작이다. 접근성으로 따지자면 영화가 더 쉽고 볼거리가 많다. 원작에서 거의 야수에 가까운 살인마 안톤 쉬거는 영화 악역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어 관객들을 압도한다. 액션 씬도 짜임새가 아주 좋으며, 액션이 폭발하기 전후의 긴장감도 잘 살려 놓았다(사실 코엔 형제의 주특기다). 이 액션 장면들이 각각의 작은 하이라이트가 되어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테렌스 말릭의 <황무지> 비슷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소수는 열광하고, 대다수의 관객은 아무 관심도 없고(혹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결코 아카데미 상은 탈 수 없는 영화 말이다. 

코엔 형제는 원작의 메시지를 전부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말이 필요없고, 직접 보시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처음부터 대사가 거의 없다. 그들 모두가 동물처럼 움직이고 침묵 속에서 힘을 드러낸다. 실패에 가까워질수록 필사적인 도망, 무기력한 추적, 한 야수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의 압력(동전 하나로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모두 아무런 말이 필요없다. 소설을 무용이나 시로 풀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의 액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울 정도로 리듬감이 있는, 사람 죽이는 장면들.

종합하자면, 둘 다 좋다. 굳이 스타일을 나누자면 원작이 에스프레소, 영화는 아메리카노 정도 되겠다.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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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1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영화는 보고나면 반드시 원작을 읽고 싶어지는데, 코엔의 영화는 그 반대가 되는 단점이;;; 아, 물론 저에게 그렇단 소리.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 된다' - 캬, 좋아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3-21 11:49   좋아요 0 | URL
아마 읽어보셔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 책이 될 것 같은 분이 있고 안될 것 같은 분이 있는데요. 치니님께선 되는 축에(..-_-;) 속할 거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단골의 매력이란 게 이런 거군요.;

달빛향기 2012-11-3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스타일을 나누자면 원작이 에스프레소, 영화는 아메리카노 정도 되겠다.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된다.

-이 구절에 감동 받고 즐겨찾는 서재에 추가했습니다.
앞으로 인간사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편식 없는 소설읽기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되네요;)

유익한 정보와 멋진 글들, 감사합니다! ^_^*

p.s. 그런데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잔인한 묘사가 많은가요?
저는 빅픽처에서 살인 후 뒷처리-_ㅠ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정 떨어질 뻔하다가,
추스리고 나서 겨우 다 봤는데..말이죠..ㅠㅠ

하드보일드 절대 싫어하는데...
비정한 현실에 대한 묘사가 궁금해서요...-_ㅜ

이 책, 읽어도 될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12-12-07 07:48   좋아요 0 | URL
어어 답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칭찬까지 해 주셨는데 ㅠㅜ

잔인한 묘사는..음. 빅 픽처에 뒤진다고는 할 수 없고요.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
사실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라, 잔혹한 액션하고는 되려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일종의 변종 서부 활극이랄까요.

그래도 서부 시대를 다룬 코맥 매카시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수위가 좀 낮은 편이긴 합니다만..
잔인한 묘사에 거부감을 갖고 계시다면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으실 거예요..ㅎ
 

원작 vs 영화

원작 -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영화 - 나는 전설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소설만 전설이다

 

-무려 반백년도 전에 나온 원작 <나는 전설이다(1954)>는 슬슬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걸작 장르소설이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리메이크된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평범한 헐리우드 좀비-액션물이다. 슬프게도 리처드 매드슨보다 윌 스미스가 더 유명하기 때문에 나는 주연 덕에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원작에까지 누명(?)을 씌우는 경우를 수차례 목격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작품은 그 출발점과 초기 설정을 제외하면 아예 다른 작품이다. 단순히 작품의 질 문제를 떠나서 이 둘을 원작-영화화 사이로 묶기조차 부적절하다. 

가장 큰 차이는 원작 소설의 적들은 뱀파이어, 영화에서는 좀비라는 점이다. 단순한 설정 차이처럼 보이지만 작품 전체의 색깔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다. 뱀파이어들은 어느정도의 지능이 있고 말도 할 수 있어서 매일밤 주인공 네빌의 집 앞에 장사진을 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방구석에 혼자 처박힌 그를 비웃는다. 네빌을 소리쳐 부르는 자는 한때 그의 친구였던, 지금은 흡혈귀인 남자다. 네빌은 매일밤 공황상태에 빠진다. 낮에는 혼자라서 외롭고, 밤에는 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함께 모여 그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외롭다. 그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는 바이러스 감염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커뮤니티에서 축출당한 왕따다.

낮에는 그가 흡혈귀를, 밤에는 흡혈귀들이 그를 사냥한다. 불리한 쪽은 네빌이며 전세는 꾸준히 기운다. 그는 점점 커지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영원히 혼자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 사실은 혼자 남은 자신이야말로 괴물이 아닌가라는 되물음. 엔딩에 다다르면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이렇게 지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이 한물 간(?) 공포 소설이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알게 된다. 세상 어떤 괴물도 유행 따라 퇴락하고 생멸하지만, 이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고독은 아직까지도 굳건히 사람들의 목을 죄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 자신, 그것도 홀로 남은 나 자신이다. 

영화에서 이런 딜레마는 깨끗이 세탁되어 있다. 좀비들은 지능이 (거의) 없는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네빌과 좀비들의 관계는 '고독한 사냥꾼과 소떼들의 싸움'과 진배없다. 네빌은 고민하지 않는다. 좀비들의 열등한 지능으로 인해 그의 인간성은 보장된다. 그러니 영화 속 네빌의 외로움은 그저 독수공방의 슬픔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시시껄렁한 엔딩이 나온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영화 엔딩은 두 가지가 공개되었는데 도토리 키재기다). 그래도 장점을 찾자면... 초반부의 황량한 도시 풍경을 보는 재미는 있다.

아, 그리고 개 얘기를 해야 한다. 원작에도 개가 나오고 영화에도 개가 나온다. 원작의 개 이야기가 훨씬 슬프다. ㅠㅜ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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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1-03-17 21:16   좋아요 0 | URL
네 오메가맨이 더 낫죠. 그렇지만 오메가맨 역시 원작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게 중평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탠다드 B급 영화랄까요. 요거는 누군가 다시 원작만큼 해 줘야!

stella.K 2011-03-1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은 안 읽어 봐서 모르겠고, 영화에선 나름 고독이 표현이 안 된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 고독 보단 혼자 버려진 황량함이 더 많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나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원작에서 말씀 하시는 고독을 어떻게 다뤘는지 궁금하군요.
하긴 그런 얘기는 들었습니다. 영화가 원작을 가리웠다는.
그래도 영화는 고독을 말하려 하기 보단 허리우드식 영웅주의를 여지없이 깔았다는 느낌이들더군요.
홀로 남겨져도 폼생이다 이거지? 하는.

외국소설/예술MD 2011-03-18 16:5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독수공방의 슬픔이라고 표현.. 아 그건 그냥 여자가 없어서라고 읽힐 수도 있겠군요.;

원작을 읽어보시면 제목이 얼마나 멋지게 적용되는지를 잘 알 수 있는데요, 영화에서도 제목을 의미심장하게 쓰려고 했나 봅니다만, '나는 영웅이다' 정도가 더 맞는 제목 같습니다. 님이 짱입니다 같은거죠. 원작은 그 반대입니다. 그냥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와도 싸워야 하거든요. 여러모로 고생 많이 한 사람한테 정이 더 가는 게 인지상정인가봅니다.;
 

원작 vs 영화

원작 -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스티븐 킹) 

영화 - 쇼생크 탈출 (프랭크 다라본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걸작 콤비  

 

-93년, 원작이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을 때 소설가 장정일은 그의 독서일기에서 '이게 심심풀이로 쓴 소설이면 죽어라 노력하는 다른 소설가들은 넥타이 공장이나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영화 사이트 IMDB에서 독자투표 1위를 달리고 있다. 과연 이 콤비는 원작-영화 콤비계의 엄친아 1순위다. (참고. 심심풀이로 쓴 소설이란 말은 스티븐 킹이 직접 한 얘기다. 쇼생크 탈출이 포함된 네 개의 중편을 모아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고, 킹은 이 중편들은 원래 각 장편들을 집필하는 사이에 그냥 재미로 쓴 거라고 말했다)

둘다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빼어난 (교도소 탈출)드라마다. 사실 여기서 소개가 끝나도 상관없다. 그러나 이 원작과 영화를 한 자리에 놓고 보면 특이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호흡, 혹은 분위기다. 두 작품을 모두 접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원작과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고 말한다. 세세한 설정에 차이가 있음에도 (특히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오페라를 트는 앤디'가 원작에는 없다) 두 작품은 거의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 이 닮음은 스토리가 비슷한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다. 분위기다. 소설의 문장이나 전개가 나아가는 속도와 무게감을 영화의 연출이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각색에서부터 쇼트의 길이와 카메라 앵글, 배우들의 캐릭터까지 거의 모든 변수가 작용한다. 특히 각색이 중요하다. 일례로 원작에서 교도소장은 (현실적으로) 여러 번 바뀌지만, 영화에서는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교도소장을 단 한 명으로 끌고 간다. 그래야 원작의 무게감과 같은 입지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작의 설정을 자신에 맞게 바꾸어야만 원작의 무게와 속도를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어렵고, 거의 본능적인 감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원작과 영화가 각각 걸작인 경우는 많지만, 그 둘이 같은 호흡을 느끼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쇼생크 탈출> 이후 스티븐 킹이 프랭크 다라본트에게 자기 작품의 영화화를 맡기다시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열 번 넘게 보았다. 영화가 끝나가고 레드의 나레이션이 펼쳐지는 순간, 'I wish...'로 시작하는 그 시 같은 혼잣말이 들려오면 소설의 마지막 장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이렇게 원작과 영화가 멋지게 닮아 있는 경우는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쉽게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한 쌍이다.  

-외국소설MD 최원호 

  

 

p.s: 오늘부터 한 달 동안(근무일 기준;) 영화와 원작에 대한 짤막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연재 도서들은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영화 티켓 보관 수첩을 드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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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시내 2011-03-18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네요. 건필하세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3-18 11:41   좋아요 0 | URL
열심히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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