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기호학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깝쭉"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정말 그야말로 "깝쭉"거리기만 했던 시절이라, 민예총이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던 기호학이나 문화비평에 관한 강의를 한 두 개 정도 들으면서 - 요즘은 그런 강좌가 많지 않은 듯 하다 - 피해갈 수 없는 도서 충동구매로 발동을 걸던 것이었는데, 기호학에 대한 기본 개론서를 세 권 정도 읽고, 롤랑 바르트를 시작하려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와 "텍스트의 즐거움"을 사놓고, 이도흠교수의 책을 한 권 준비하고.. 뭐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기호학이라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언어학적 접근으로 시작하여 일단 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적 사념을 정리하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쉬워지는 학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책을 읽다가도 중간에 막혀버리는, 그런 점이 있었다. 물론 책을 그냥 읽어대면 그만이겠지만, 그 떄는 어쩌면 좀 더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의미로 책을 대하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인 수단이 일종의 기호이며, 그 기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감히 내가 정의내리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문화비평과 매우 근접한 학문이라는 것은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가 빠개지도록 난해한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말장난임에 분명한 문장때문에 머리속에서 마구 도표를 그려가면서 정리를 하느라 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글들. 

 이 책은 기호학자이며, 언어학자이고, 또한 언어의 유희를 즐겼던 학자 - 저 표지의 멋진 인상을 가진 - 롤랑 바르트의 낙서장이다.

물론 옮긴 이의 말에는 이 책은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과도 같으며, 그의 후기사고를 총체적으로 통합 혹은 연장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짧은 단상들을 도처에 메모해 놓은 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그의 메모장, 낙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질이 떨어진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글은, 꼭 정자세를 하고 써내려간 정갈한 원고만이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는 아니다. 어쩌면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진솔하고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짧게 적어놓은 메모글들임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게다.

책의 시작은 그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 몇 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는다. 그리고 책은 내내 짧은 제목과 그에 대한 그의 단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단상엔 당연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롤랑의 사상과 학문등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언어의 유희, 기호학의 표현 - 그 진수를 정확히 간파한 현명한 학자의 고상한 유머라고 할까.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아주 진솔한 생각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책을 기점으로 그의 정갈한 글들에 진입할 수 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인 것처럼 이 책을 종착점으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멋모르고 먼저 읽어버린 것을. 

 메모. 일기. 낙서.

그 모든 것들이 기호가 되어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는 매력적인 평전임에 틀림없다.

 

200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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