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4 夫子之得邦家者①, 所謂立之斯立②, 道之斯行, 綏之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③, 如之何其可及也.


부자지득방가자, 소위립지사립, 도지사행, 수지사래, 동지사화, 기생야영, 기사야애, 여지하기가급야.

번역 - 선생님께서 제후나 경대부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면), 이른바 民生을 세워 (民生이) 서고, (백성들을) 인도하여 (백성들이) 행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어 (백성들이)모여들고, (백성들을) 감동시켜 (백성들이) 화평하게 되어 선생님이 삶은 영광스럽고, 죽음은 슬프니, 어떻게 (내가) 선생님에게 미치겠는가?

① 논어주소에 得邦, 謂爲諸侯. 得家, 謂爲卿大夫 <得邦은 제후가 되는 것을 이름이오, 得家는 경대부가 되는 것을 이름이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者는 김원중의 허사사전의「조건구의 종속문 말미에 쓰이는데, 어떤 구의 앞에는 가설접속사가 있어 ' '者'와 호응하지만 가설접속사를 생략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721쪽)」와 같은 설명에 의거하여 문두에 '若'이나 '如'같은 접속사가 생략되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② 이 문장에서 斯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斯를 혹자는 則의 뜻으로 보아 번역하기도 하지만, 나는 앞의 之를 받는 지시대사로 보고 싶다.

③ 其生也榮, 其死也哀를 나는 단순하게 其는 공자를 받는 인칭대사이고 生과死는 단순명사로 榮과 哀는 형용사술어로 본다. 때로는 단순하게 보는 것이 좋다.

集註 -  立之, 謂植其生也. 道, 引也, 謂敎之也. 行, 從也. 綏, 安也. 來. 歸, 附也. 動, 謂鼓舞之也. 和, 所謂於變時雍④, 言其感應之妙⑤, 神速如此⑥. 榮, 謂莫不尊親. 哀, 則如喪考비⑦. 程子曰, 此聖人之神化, 上下與天地同流者也⑧. ♥ 謝氏曰, 觀子貢, 稱聖人語, 乃知晩年進德, 蓋極於高遠也. 夫子之得邦家者, 其鼓舞群動, 捷於부鼓影響⑨, 人雖見變化, 而莫竅其所以變化也, 蓋不離於聖, 而有不可知者存焉⑩. 聖而進於不可知之之神矣, 此殆⑫難以思勉及也.

번역 - 立之는 (백성들의)생계를 세움을 말한다. 道는 인도하는 것이니, (백성들을) 가르침을 말한다.  行은 따른다는 것이고, 綏는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다.는 모여드는 것이다. 動은 (백성들을) 고무한다는 말이고, 和는 이른바 '오! 변해서 화목해졌구나!'란 말이니, 성인이 백성들을 감응시키는 妙가 이와 같이 신속(하게 효과를 본다)하다는 것을 말한다. 榮은 존경하지 않거나 친해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이름이다. 哀는 바로 부모가 돌아가신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이는 성인의 神妙와 化育이란 위와 하늘에 같은 작용이 있으며, 아래와 땅에 같은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사씨가 말하였다."子貢이 성인을 칭찬하는 말을 살펴보면 만년의 (子貢의) 德의 진보가 아마도 지극히 높고 먼 곳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께서 제후나 경대부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가 군중들을 鼓舞시키는 움직임이 북채의 그림자와 북(을 두드려서 생기는) 소리보다 빨라서, 비록 사람들이 변화는 보지만 그 변화하는 까닭은 엿볼 수가 없다. 아마도 성인(의 작용)에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인이 알 수 없는 神妙함에 나아간 것이어서 이는 생각이나 노력으로는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

④ 於(오)變時雍은 서경에 나오는 말로 時는 허사이다.

⑤ 其感應之妙를 나는 이렇게 분석한다. 其(주어)感應(동사술어)之(관형격조사)妙. 여기서 其는 성인을 받는 인칭대사이며 感應의 목적어는 民으로 생략되어 있다고 본다.

⑥ 神速如此는 구조상 2가지의 번역이 가능하다. 神速을 형용사 술어로 보느냐 <이와 같이 신묘하다> 아니면 神速을 주어로 보느냐<신묘함이 이와 같다>이다. 다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나 나는 전자로 번역했다.

⑦ 考비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한다.

⑧ 此聖人之神化, 上下與天地同流者也는 국내의 번역자들은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1) 김도련 - 이는 성인의 神妙가 위아래로 천지와 더불어 흐르는 것이다.
2) 김동길 - 성인의 신묘한 교화는 상하가 천지와 함께 더불어 흐르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잘 모르는 와중에도, 이 문장에서 上下與天地는 上與天과 下與地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마치 父生母育之恩<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신 은혜> 이란 글귀가 원래는 父母生育之恩이어서 <부모님이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로 번역해야 옳고, 도덕경에 나오는, 영화제목이기도 한 天長地久가 원래 天地長久인 것처럼 말이다. 四書集註全譯의 번역을 보자 .這是聖人神妙化育, 在上與天有一樣的作用, 在下與地有相同的功能. 번역은 위의 집주의 번역과 같다. 번역이 신통치가 않지만 그래도 훨씬 이해가 잘 되지 않은가. 불행히도 나는 여기서의 天,地,上,下의 개념 설명을 할 수 없다.  이 글을 보시고 아시는 분은 설명해 주시면 고마운 일이겠다.

⑨ 捷於부(북채)鼓影響에서 위와 마찬가지로 부鼓影響를 부影鼓響으로 놓고 보면 훨씬 이해가 쉽겠다.

⑩ 蓋不離於聖, 而有不可知者存焉을 김도련은 '이는 대개 聖의 경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 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나는 李申의 四書集註全譯의 번역이 더 옳아 보여 그를 따라 번역하였다.

⑪ 대개 '성스럽고도 신묘한 경지로 나아가다'로 번역하는데 이 문장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접속사 而이다. 而는 접속사로 쓰일 경우는 동사+而+동사, 혹은 형용사+而+형용사로 쓰이지, 앞의 번역처럼 형용사(聖)과 동사(進)을 연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而를 허사로 보고 번역에서 빼어 버렸다. 而는 때로는 '만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어색한 것 같다. 번역은 위의 집주 번역과 같다.

⑫ 殆는 難앞에 쓰여 부사로 '거의'라는 뜻으로 보면 좋겠다.

집주 -  입지, 위식기생야. 도, 인야, 위교지야. 행, 종야. 수, 안야. 래. 귀, 부야. 동, 위고무지야. 화, 소위오변시옹, 언기감응지묘, 신속여차. 영, 위막불존친. 애, 즉여상고비. 정자왈, 차성인지신화, 상하여천지동류자야. ♥ 사씨왈, 관자공, 칭성인어, 내지만년진덕, 개극어고원야. 부자지득방가자, 기고무군동, 첩어부고영향, 인수견변화, 이막규기소이변화야, 개불이어성, 이유불가지자존언. 성이진어불가지지지신의, 차태난이사면급야. 433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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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3 夫子①之不可及也, 猶天①之不可階而升也.


부자지불가급야, 유천지불가계이승야.

번역 :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① 여기서 夫子나 天은 주제어로 의미상 목적어가 된다.
 
集註 - 階, 梯也. 大可爲也, 化不可爲也. 故曰不可階而升也.
계, 제야. 대가위야, 화불가위야. 고왈불가계이승야.

번역 : 階는 사다리이다. 大는 할 수 있지만 化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사다리를 놓아 오를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남곡왈 : 위 집주에서 大와 化의 개념을 알고 싶은 분들은 孟子 盡心下 25章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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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2 子貢曰:" 君子一言以爲①知, 一言以爲①不知, 言不可不愼也."


자공왈:" 군자일언이위지, 일언이위부지, 언불가불신야."

번역 : 자공이 말하였다. "군자란, 한마디의 말로 (사람들이) 군자를 지혜롭다고 여기고, 한마디의 말로 군자를 지혜롭지 않다고 여기니 말이란 삼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생각난 김에 살펴보자. 먼저 같은 구조의 다른 문장을 보자. 제 17편 陽貨 23장에나오는 君子義以爲上이다. 이 문장은 君子(주어)義以(부사어)爲(동사술어)上(목적어)로 분석되어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쉽게 번역이 된다. 그러면 위의 문장 君子一言以爲知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이는 구조가 같다고 하여 <군자는 한마디 말을 지헤롭다고 여긴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가?  以~爲구조에서 以는 전치사(개사)이고 爲는 동사이다. 여기에서 爲의 목적어로는 명사, 동사, 형용사가 올 수 있다. 심하게 말하면 영어에서 주어와 보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어느 경우에도 전치사 以의 목적어 = 동사 爲의 목적어 관계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 의미상의 주어와 술어 관계(주술관계)로 볼 수 있다.  위 문장에서 義와 上은 이런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보는 문장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선 다른 분들의 번역을 보기로 하자.

1) 김도련 - 군자란 한 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기도 하니,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 번역은 以를 원인을 표시하는 전치사(개사)로 보고 以의 목적어로 앞에 놓인 一言으로, 爲는 되다라는 뜻으로 본 것 같다.

2) 김동길 -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써 知가 되고, 한 마디 말에 써 不知가 되니, 말은 삼가지 아니함이 가하지 아니하니라. - 그야말로 직역이니 이 말로는 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설을 읽어 보면 김동길은 문장의 뜻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3) 이기동 - 군자는 한 마디의 말만 듣고도 지혜로운 자로 여기고, 한 마디의 말만 듣고도 지혜롭지 않은 자로 여기게 되니, 말은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다. - 이 번역만 보아서는 군자가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알 수가 없다.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다.

4) 정후수 -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워지고, 한마디 말로써 지혜롭지 못하게 되므로,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 정후수는 과감하게 군자를 주어로 번역하였다.

5) 성백효 -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지혜로다 하며 한 마디 말에 지혜롭지 못하는 것이니, 말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 한 마디로 주술관계가 어지럽다.   

이제 조금 헛갈리지 않는가? 이제 잠시 이글을 그만 읽고, 스스로 전체적인 주어와 술어가 무엇인지, 以의 목적어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참고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인들의 번역 및 해설을 보자.

6) 陽伯峻 - 高貴人物由一句話表現他的有知,也一句話表現他的無知, 所以說話不可不謹愼.(論語譯注) 어설프게나마 번역하면 <고귀한 인물은 한 마디 말이 그의 지혜로움(지식)을 들어내고, 또 한 마디 말이 그의 지혜롭지 못함(무식)이 드러낸다. 따라서 말을 할 때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양백준은 그의 책에서 知와 智를 엄밀하게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知를 '지혜롭다' 보다는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부연하면 양백준의 번역을 한국말로 번역할 때 나는 전치사 由를 마치 주어처럼 번역하였다. 만약 이유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보면 <고귀한 인물은 한 마디 말로 그의 지혜로움(지식)을 들어나고, 또 한 마디 말로 그의 지혜롭지 못함(무식)이 드러난다. 따라서 말을 할 때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다. 그게 그거 같은데....

7) 논어주소의 설명 - 言君子出一言是, 則人以爲有知; 出一言非, 則人以爲有知, 知與不知, 旣由一言,則其言不可不愼也. 번역하면 <군자가 한 한 마디 말이 옳으면 사람들이 그가 有知하다고 여기고, 그가 한 한 마디 말이 그르면 그가 不知하다고 여긴다, 知와 不知가 한 마디 말에서 말미암으니 그의 말이 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솔직히 여기서 知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알다(know)'의 뜻이 아닌가 한다.

여러분은 누구의 번역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나요? 나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以~爲 句에 대해 잠시 더 짚어 보는 게 좋겠다. 김원중의 허사사전에는 " '以~爲~,以爲~: 이것은 한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후자는 '以'의 목적어가 생략된 것이다. 모두 '~을~으로 삼다', '~라고 생각한다'등으로 해석한다" "때로 '以爲'는 동사로써 '~라고 생각한다'라는 뜻이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常務印書館에서 나온 古代漢語虛辭詞典에는 以의 목적어가 以앞에 나올 수도, 생략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여담이지만 이 이유 때문에 한문의 개사를 전치사라고 부르는 데 異意를 다는 분들이 있다.
그럼 이 간단한 문장에서 以의 목적어가 무엇일까? 가능성은 2가지이다. 古代漢語虛辭詞典에 따르면 앞에 나온 '一言'일 수도 아니면 생략되었을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논리대로라면 以의 목적어로 一言으로 보려면 一言과 知가 의미상 주술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겠다. 따라서 나는 以의 목적어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以의 목적어가 구체적으로 무언지 밝히기 전에 문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君子一言以爲知. 먼저 君子가 문법적으로 문장성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문장 맨 앞에 위치하였으니, 우선 주어가 될 수있고, 둘째는 제시어, 주제어가 가능하다. 주제어로 번역하면 '군자라는 것은' 혹은 '군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으로, 심지어는 '군자는'으로 번역도 가능하다. 한국어의 '은/는'이라는 보조사는 앞에 나온 체언을 '주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번역의 모호함이 생긴다. 어쨌거나, 나는 이 문장에서 君子는 동사의 주체이기보다는 객체라고 보아 주제어로 번역하고자 한다. 그럼 一言은 문장성분이 무엇인가? 아까 나는' 一言'을 以의 목적어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一言'은 부사어로 번역이 된다. 부사어가 될 수 있도록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보면, '한 마디 말로' 혹은 '한 마디 말때문에'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제 우리는 생략된 以의 목적어를 찾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以의 목적어가 君子라고 본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장의 주어를 찾으면 번역이 가능하다. 나는 생략된 주어가 일반 사람 즉, 人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나의 이론대로 문장을 재구성하여 분석하면 - 물론 이렇게는 아무도 안 쓴다 - 君子[주제어](人[주어])一言[부사어]以[개사](君子[개사빈어(목적어)])爲[동사술어]知[목적어]가 될 것이다. 사실 知의 번역은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어 그냥 기존의 번역을 따르겠다. 글자대로 기계적으로 번역해 보면 <군자란, 한 마디 말에 (사람들은) (군자를) 지혜롭다고 여긴다>가 되겠다. 따라서 나는 논어주소의 풀이가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 가장 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문장 가지고 너무 장황하게 설명한 것 같다.  하지만 한문에 있어서도 또한 그걸 번역한 한국어에서도 주술관계를 분명하게 밝혀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어쩌면 나의 번역 작업은 그것을 하기위한 자기-연습이다.한 가지 더 부연하면 뒤에 나오는 문장에서도 言은 나의 이론에 따르면 주제어로 문장 속에서는 동사 愼의 의미상의 목적어다.

여러분들의 반론을 환영한다.

集註 - 責子禽不謹言.
책자금불근언.

번역 - 자금의 말을 삼가지 않음을 꾸짖은 것이다. 433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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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 陳子禽謂子貢曰:" 子爲恭也①, 仲尼豈賢於子乎?"


         진자금위자공왈:" 자위공야, 중니기현어자호?"

번역 : 진자금이 자공에게 일러 말하였다."당신은 겸손하군요, 설마 중니가 당신보다 나을 리가 있겠는가(어질 리가 있겠는가)?"

① 일반적으로 이곳에는 '언정'으로 현토한다.  동아판 국어사전에는 '(이)언정'을 "자음으로 끝난 체언 앞에 쓰이어, '일지언정'의 뜻으로, 앞의 사실을 인정(가정)하되 뒤의 말이 그에 매이지 않음을 나타내는 연결형 조사"라고 풀이하고 있다. 현토에 의거하여 누구나 아무런 의심없이 '당신이 공손해서 그렇지'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사실 이 문장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번역할 필요는 없다. 양백준의 번역을 보자. "nin對仲尼是客氣罷,是謙讓罷, 難道他眞比nin還强ma?" 한국어로 번역하면 <당신은 중니에 대해 공손하고 겸손하군요, 도대체 그가 정말 당신보다 훨씬 낫단 말입니까?>이다. 나는 양백준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nin은 당신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글자가 지원되지 않는다.

 集註 -  爲恭, 謂恭敬推遜其師也②.
        위공, 위공경추손기사야.

번역 : 爲恭은 (자공이 자신의) 스승을 공경하여 스승에게 양보한 것을 이른다.
 
② 나는 恭敬과 推遜의 목적어가 其師라고 본다. 433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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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 叔孫武叔毁仲尼.子貢曰:"無以爲也①! 仲尼不可毁也.他人之賢者,丘陵也,猶②可踰也, 仲尼,日月也,無得而踰焉.人雖欲自絶③,其何傷於日月乎④?多⑤見其不知量也."

번역 - 숙손무숙이 공자를 헐뜯었다. 자장이 말하였다:"그래봐야 소용없다.! 중니는 헐뜯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어진 것은 언덕과 같아서 (높기는 하지만) 여전히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중니는 해와 달과 같아서 넘을 수가 없다. 사람이 비록 (해와 달을) 끊으려 한들, 어찌 해와 달을 손상시키겠는가? 다만 그가 분수를 알지 못함을 나타낼 뿐이다."

① 無以爲也는 여러 가지 번역이 있다. 먼저 양백준은 "不要這樣做"라고 번역하였다. 다시 말해 無는 勿로 보고 以는 此로 보아 부사어로 번역하였다. 양백준의 번역을 한국어로 옮기면 <이렇게 하지 말라> 정도일 것이다. 또 이기동은 以의 목적어로 毁仲尼로 보아 중니를 헐뜯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없다, 즉 상관없다라고 번역하였다. 다들 참고할 만한 의견들이나 나는 여기에서는 주자의 의견을 따라 번역하였다.

② 한문의 번역에서 또 하나 어려운 것이 부사의 해석이다. 나는 부사가 실사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부사가 일정한 뜻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문장 속에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가진 자전에는 '오히려, 차라리'의 뜻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 뜻으로는 제대로의 번역을 할 수 없다. 부사는 일반적으로 강조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김원중의 허사사전의 설명대로 '어떤 상황이 계속 변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원문을 보면서 설명하자면, 다른 사람의 賢者는 구릉과 같이 넘기에는 조금 높아 보인다. 하지만 그래봐야 별 상황은 변하지 않고 넘을 수 있다. 뭐 이런 의미가 猶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③ 絶의 목적어는 日月이다. 타동사가 쓰여 목적어가 생략되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목적어를 찾는 연습을 하자는 의미에서 적어 보았다.

④ 其何傷於日月乎을 흔히들 '해와 달에 손상이 있겠는가' 혹은 '해와 달에 손상을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번역한다. 모두가 전치사 於에 너무 집착하여 번역한 이유이다. 이 문장에서 傷은 타동사이다. 그렇다면 목적어가 바로 타동사 傷 다음에 오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치사 於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日月을 傷의 목적어로 보면 번역이 훨씬 매끄러워진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기탄없이 비판하여 주기 바란다.

⑤ 여기서는 多가 '다만'의 의미이다.

集註 - 無以爲,猶言無用爲此.土高曰丘,大阜曰陵.日月,喩其至高,自絶,謂以謗毁自絶於孔子. 多,與祇同,適也.不知量,謂不自知其分量也.

번역 - 無以爲는 이렇게 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말과 같다. 흙이 높은 것을 丘라 하며, 큰 언덕을 陵이라 한다. 日月은 (공자의 어짐이) 지극히 높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自絶은 헐뜯어서 스스로 공자를 끊음을 이른다. 多는 祇와 같아, 다만이라는 뜻이다. 不知量은 스스로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19-24-1 숙손무숙훼중니.자공왈:"무이위야! 중니불가훼야.타인지현자,구릉야,유가유야, 중니,일월야,무득이유언.인수욕자절,기하상어일월호?다견기불지량야."

        집주 - 무이위,유언무용위차.토고왈구,대부왈릉.일월,유기지고,자절,위이방훼자절어공자. 다,여지동,적야.부지량,위불자지기분량야.433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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