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원숭이>의 저자인 <벌거벗은 여자The Naked Woman>를 읽기 시작하다.  나야 뭐 공부라는 걸 별로 안했지만 만약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했다면 분명 생물학과에 갔으리라.  인간을 다른 살아있는 것과 차별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를 무척 싫어하는 나는 이런 종류의 '발가벗기'거나 '발가벗는' 책을 좋아한다. 1장 진화을 읽고 재미있는 내용 하나 적어본다.

"오랜 세월 진화하는 동안 남자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신체적으로는 어린 아이의 특징을 점차 벗어던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어린 아이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변해왔다. 이에 반해 여자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린 아이의 신체적인 특징은 유지하면서도 행동은 어린 아이의 기질을 일찌감치 벗어던지게 되었다."

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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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의 만화집 <부자의 그림일기>와 안인희 선생님이 번역한 <초콜릿 전쟁>을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오세영이란 작가는 박재동 화백이 극찬한 작가라 하여 그가 쓴 다른 책도 같이 빌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대출중이러서 <초콜릿 전쟁>을 빌렸다. 

멍한 가운데 박종채의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읽었다.  내게는  김택영의 <여한십가문초>에 들어 있는 연암의 산문들을 포함하여 박지원의 산문 문장이 번역된 책이 몇 권이 되다 보니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나중에 짬을 내어 누가 누가 잘 번역했나 나름대로 심사(?)해 볼 생각이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진주님에게서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을 선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진주님.  

-  그나저나 리뷰를 쓸 일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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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3-1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종일 나갔다가 지금 막 밥도 안 먹고 컴 앞에 앉았는데, 새글 올리시네요^^
리뷰...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얼른 읽고.. 나의 아버지 박지원-도 참 재밌겠네요. 전,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갖고 있는데^^;
 
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나는 꽤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내 시간의 일부를 교회에서 보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과 불완전함에 유난히도 일찍 눈을 뜬 덕(?)에, '혹시나 종교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던 것 같다. 두터운 외투를 뚫고 매섭게 들이닥치는 겨울철의 찬바람도 내 존재의 영원함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때론 세상 사람들을 잠들게 만드는 어둠마저 헤칠 정도로, 무릎 꿇고 작은 두 손 모은 체 보내는 나의 시간은 끝이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기도는 나를 바꾸지 못했고, 세상 역시 변화를 몰랐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몹쓸 일 앞에서도 '강함을 위해 시련을 예비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면의 상처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내 귓가를 맴돌던 웅장한 찬양도, 뜻은 몰라도 습관 마냥 읽어나가던 성경 구절도 어느 순간 헛된 것으로 돌변해 버렸다.
시간이 내 머리를 크게 만들면서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만 내게 들렸다. 이전엔 알지 못했던 남성 중심적인 목소리가 설교 중간중간 느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도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극대화되었던 가장 큰 일은 바로 세례를 앞두고 발생했다. 세례를 위한 어떠한 과정도 밟지 않았고 교회도 드문드문 나가던 내게 어머니는 세례를 권하셨다. 내가 과연 세례를 받을 만큼 진실된 믿음을 소유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다음 기회에 제대로 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받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때 나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데, 왜 거절하는거니? 그렇게 지옥에 가고 싶어?"라는 어처구니없는 응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내겐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부는 더더욱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세례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세례를 받았지만, 난 아직도 내 믿음에 대한 어떠한 확신성도 가지지 못했다. 여전히 교회는 어쩌다 한 번 나가고 있으며, 기도 한 번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어버렸다. 세례는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가 있다.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가져다 준 <운명>, <좌절>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자신의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미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15살 때 자신을 덮친 그 기억들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나갔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상처 가득 들어선 고름을 짜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고통스럽게 내뱉은 신음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를 떠올리는 까닭은 이 책의 작가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임레 케르테스는 작가는 지난 경험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이 책의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 역시 끝없이 자신의 경험을 파헤침으로써 종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를 부정적으로만 평할 순 없을 것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도, 그녀의 마음은 이 책을 써나가면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진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7년 동안의 수녀원 생활은 그녀 스스로 자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하여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이었을 1960년대, 평등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맴돌기 시작할 그 무렵 그녀의 눈과 귀는 완전히 닫힐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에겐 알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온 마음을 바쳐 기도를 해야만 했다. 정해진 규칙을 엄수해야만 했고, 그 틀을 벗어날 때마다 부족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 신체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도 무시해야만 했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마저도 어쩌면 버려야 했다.
수녀원을 벗어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세상 어느 곳에도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느꼈다. '전직수녀'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과대 포장되었고,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마초적 시각에 의해 평가될 뿐이었다. 마음은 그 어떤 아름다운 시에도 반응할 줄 몰랐던 그녀는 정해진 원칙에 입각한 논리성은 보여줄 수 있었으나 창의적인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긴장했다.

그녀의 삶은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된 듯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지만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렇게 끝났더라면 특정 종교에 자신을 바치려다 실패한 이의 무용담으로 이 책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을 얻었다. 어이없이 박사학위를 상실하고 간질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그녀가 살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접한 또 다른 종교들이 그녀를 크게 만들었다. 의식에 얽매여 자기 안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었던, 신앙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욕구를 붙들어 매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유대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통해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폐와 간질, 자기 안에만 갇혀 지내는 제이콥이 보여준 믿음이야말로 진실된 믿음이 아닐까?

그녀의 글은 그녀의 삶을 담고 있다. 억지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려 들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녀의 깨달음까지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순 없다. 마음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니 말이다.
세상은 여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일부는 종교의 이름을 빌어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짓밟아야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것처럼...
내가 믿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면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이까지 구원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제대로 된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종교로 타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걷고 있고, 그 방향은 아마도 좋은 쪽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녀가 그렇게 믿고 지금도 걷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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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심작가를 만나다

 

 

 

 

 

오늘은 ‘달의 제단’의 작가 심윤경님이 글쓰기에 관한 강의를 한 날이었다. 수업을 들은 예과 애들 중 오늘의 강의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아챈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일부 애들은 토익 공부를 했고, 어떤 애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바빴다. 물론 대부분은 심작가의 강의를 잘 경청했고, 수업 후 질문도 몇가지 했지만.


작가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는 나는 심작가가 수업 후 그냥 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고, 심작가는 점심을 함께 한 데 이어 커피까지 먹고 갔다. 그리고 그 동안 걸려온 전화는 “저희 신문에 칼럼 좀 써주세요.”나 “다음 책은 저희랑 같이 합시다.”같은 게 아니라 “고객님!”으로 시작하는, 별반 영양가 없는 전화였다.


심작가의 강의를 들으며 느낀 건, 그녀가 참으로 똑똑한 작가라는 사실이다. 말을 하다보면 한두번 정도는 말이 꼬이는 게 우리네 삶인데, 심작가의 말엔 하나의 삑싸리도 없었다. 전에 이런 사람을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다. ‘패닉’이란 그룹을 만들었던 이적 씨, 별밤을 맡은  첫날부터 그는 완벽하기 짝이 없는 진행을 했다. 말실수가 하나도 없어 별밤 작가들로부터 ‘기계’란 소리까지 들었던 이적, 오늘 심작가의 강의를 들으면서 난 그를 잠시 떠올렸다. 처음 쓴 장편을 가지고 바로 등단을 해버린 건 심작가의 천재성 때문이지 결코 우연한 건 아니었을 거다.


강의 중 심작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관심법, 나는 밥을 먹으면서 그게 정말이란 걸 확인했다.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심작가는 “서울 가는데 모셔다 드릴까요?”라고 했다. 내가 스케줄을 확인한다며 바쁜 척을 하자 그녀는 관심법의 진수를 보여준다. “할일 없는 거 다 알아요.”

결국 난, 학교로 돌아가 내방 불을 껐고, 심작가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 동안 나눴던 주옥같은 얘기들을 여기다 쓸 수는 없겠지만 심작가의 유머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만 밝힌다. 유머평점 10점 만점에 8.3 정도? 점심을 같이 먹은 심작가의 친구도 보통은 아니어서 그 둘이 구사하는 유머에 난 그저 웃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유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중국집에서 점심용으로 나온 코스요리를 둘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고-난 배불러서 빵을 약간 남겼다-커피를 마시면서 케이크까지 먹는 여유를 보였다. 여기서 난, “좋은 글은 밥에서 나온다.”고 말했던 에릭 시걸의 경구를 떠올렸다.


심작가는 그때 교보 싸인회에 와준 알라디너들에게 감사한다고, 언제 한번 번개에 나가겠다고 했다. “토요일보다는 평일이 좋아요.”라고 했던 심작가는 “생각해보니 주말이 좋아요.”라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녀의 스케줄에 맞춰서 번개를 한번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심작가님, 강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미모와 유머를 갖추신 친구분께도 좋은 시간을 같이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 추신: 강의 후 심작가의 싸인이 담긴 책 세권을 나눠줬다. 문제를 내서 맞춘 사람에게 줬는데, 3번째 문제가 이거였다.

“심작가가 몇 살로 보이나?”

눈치빠른 애들이라면 정답으로 생각한 스물둘을 고르겠지만, 이것들이 정치적인 마인드가 없어서 그런지 91학번의 나이를 계산해 “서른셋!” “서른넷”을 외친다. 어떤 애가 “서른!”이라고 하기에 “정답에 근접하고 있다.”고 힌트를 줬는데, 그 다음 애가 “서른 다섯!”이라고 한다. 정답은 결국 스물다섯이라고 한 학생에게 돌아갔지만, 애들이 이렇게 직언만 해서야 어찌 큰사람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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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0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개 스크린 퀘트에 대한 수많은 한국인들의 지지를 외국신문에서 "민족주의" 내지 "문화 민족주의"라고 평하더랍니다. 저는 민족주의와 별 인연은 없지만 그럼에도 스크린 쿼트의 현상 유지를 지지할 것입니다. "사수"까지는 몰라도 ("사수", 죽으면서까지 지키기... 사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 만약 노무현 정권이 스크린 쿼트를 축소시킨다면 이걸 이번 중도 우파 정권의 주요 실책 중의 하나로 꼽아야 할 듯합니다.

물론 보호 무역이란 어떤 절대선도 아니지요. 필요악이라면 필요악일 뿐입니다. 그리고 외국영화라고 해서 배타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만 해도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과거의 천카이거나 이미 돌아간 일본의 아키라 쿠로사바이거든요. 그리고 한국 영화관에서 제발 이란 영화나 베트남 영화를 조금 더 많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램이기도 합니다. 우리와 아시아 사이의 벽이 너무 두꺼워서 문제 중의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다 아시다시피 이 스크린 쿼트는 이란 영화나 베트남 영화를 막으려고 설정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축소를 감행한다면 돈을 놓고 돈을 보는, 약육강식의 시장 구조상 득을 볼 것은 흥행 기대치 높은 고예산 영화를 팔아치우는 오직 한 나라, 즉 미국일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상업 영화 중에서도 - 아주 드물긴 하지만 - 볼 만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 시장에서는 외국 영화들이 겨우 6%의 점유율 보이는 반면, 다른 나라들의 시장들에서  현지 영화들이 많아봐야 독일이나 영국에서처럼 10-15%, 아주 많으면 프랑스처럼 34%쯤 장악하고, 홀리부드가 어떤 경우에는 거의 시장의 98% (벨기에와 캐나다의 경우)를 장악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무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을 아주 싫어하는 아랍지역에서까지도 미국 영화들이 현지 시장의 80-85% 가까이 잡아먹는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세계적 지배"라 불러야 됩니다. 그 지배의 비결이 미국 영화에 대한 "흥행 기대"를 많이 거는 배급 구조에도 있고 미국 고예산 영화의 기술 효과 수준에도 있고 하지만, 그 부작용은 한 둘 입니까? 돈을 많이 벌고 자신과 자신 가정만을 챙겨주고 소비를 "멋지게 잘" 하고, 아주 영웅이 되자면 절대선의 화신인 미국을 위해서 북한이나 아랍인 같은 "악의 자식"을 때려치우는 것은 미국 영화 주인공들의 "인생 주기"지 않습니까? 그 영화들이 아무리 스토리가 재미있고 효과 수준이 높다 한들, 어떤 보편적인 가치관도 내포하지 않더랍니다. 잘 해봐야 "뮌헨"처럼 이스라엘의 직업 살인자들의 "직장에 대한 의심" 정도를 반영해주지, 그러면서도 그 살인의 "멋진 모습"을 끝까지 "만끽"하게 해주는 겝니다. 물론 한국 영화들이 그것보다 과연 나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 영화가 미국 영화와 경쟁하느라 나쁜 것을 많이 배운 것이야 사실 같지만, 그래도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영화를 만드는 만큼, "영량가"가 있어보이지요. "실미도"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초 영화인데, 일단 박 정권의 무자비함을 실감나게 보여준 게 "교육 효과"라 하고 싶습니다. 하여간, 제가 한국의 상업 영화를 "차악"으로 보는 차원에서랄까, 결국 스크린 퀘트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yhunsong 난세가 있으면 치세가 있고 또 치세가 있으면 난세가 있는 것이 동양의 현자들이 천하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었죠. 옛날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의 압력에 자기들의 경제에 역사적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역사주의학파들처럼 스크린 쿼터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더군요.인간의 죄많음이 하늘과 땅에 차서 멸망밖에 다른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도 어쩌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 처럼 스크린 쿼터의 의미도 시대의 다변성때문인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군요.언제나 그렇듯 자본주의체제에서 약자인 노동자와 무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단지 노동자와 무산계급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가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인 것 처럼 스크린 쿼터의 의미도 그것이 단지 한국영화에 국한 되는 사실이 아니라 영화발전이란 각도에서 보아져야 할 것 같네.. 2006/03/05 14:58
yhunsong 요... 2006/03/05 14:58
gundal 미국영화가 질이 높지않다면 스크린쿼터를 폐지하는게 우리나라에 더 이득 아닌가요? 2006/03/07 12:19
yhunsong 영화가 종합예술이라서 그런지 단순히 수요공급법칙처럼 마이크로한 분석으론 결론이 잘 안 날 때가 있는 것 같더군요.... 2006/03/07 16:32
시민 스크린쿼터가 예술영화나 작품성 있는 영화를 효과적으로 보호해주고 있다면, 해외에서까지 냉담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껍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스크린쿼터가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상스러운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상업용 조폭영화들이니 국민들이나 해외에서 쉽게 등을 돌리는거죠....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하는 것도 문화 다양성 같은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 방어적 차원 때문이고요.

나는 장동건이 스크린쿼터 사수 시위하면서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겠습니다!'라는 매우 국가주의적인(문화제국주의적인) 발언을 하는걸 보고 황당했습니다.

세계에 성조기를 휘날리는 것을 반대하러 나왔으면서,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겠다니???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이 좀 더 지지를 얻으려면, 이런 국가주의-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문화다양성을 위한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2006/03/09 11:07
시민 현재처럼 대기업이 투자한 상업용 블록버스터 한국 영화들이 극장가를 독식하고 나머지 한국영화는 완전히 죽는, 한국 안에서의 약육강식 질서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영화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자정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니 공감을 얻지 못하는 거죠.
그것도 '한류 스타'라는 문화제국주의적인 측면이 다분한 부르조아 배우들이 나와서 '국수주의적인' 언동을 하니 더더욱 공감 제로 인거죠. 2006/03/09 11:08
시민 어떤 평론가가 말하기를,

영화인들도 '국익' (세계에 태극기를 꽂아라~한국 영화 만세! 수준의...)을 외치며 스크린쿼터 사수를 하고, 정부도 '국익'을 외치며 스크린쿼터 축소를 결정했으니 결국 국익 vs 국익의 싸움이라고 하더군요.

국익을 넘어선 '문화다양성' 내지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논리였다면 해외에서도 크게 지지를 했을껍니다.

한류 열풍에 대한 영화인들의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영화계 내부에서도 '애국주의'는 뿌리 깊은겁니다. 2006/03/09 11:18
yhunsong 아마 그러한 것들이 비단 한국영화계만 그런 것이 아닌 한국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한계이지만, 국제화니 세계화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기회가 될 듯 합니다.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는 애국주의의 한계와 문화다양성과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이니만큼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이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이 발전하는 데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6/03/09 15:25
박노자 시민님, 제가 잘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멀리에서 그 "스크린쿼트 옹호 운동"을 바로 미제 영화에 대한 일종의 문화다양성론적인, 방어적인 움직임으로 알았는데, "세계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겠다"는 수준이라면 정말로 할 말이 없네요. 글쎄, 제가 한국 영화들을 학생 교육용으로 이용하면서 느끼는 점인데, 별로 "한국적인" 점이 없는 대다수 블록버스터들이 쓸 모가 없어도 "박하사탕"이나 "실미도", "취화선" 정도라면 꽤 교육적 가치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영화의 마초주의적 특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 담겨져 있는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듯합니다. 2006/03/0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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