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보이지 않는 식민지>를 다시 읽는다. 5년이 지난 책임에도 얻을 것이 많다. 5년 전 이 책이 생기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책말미에 '43340217'이라는 메모가 있다.  아무튼 다시 읽어도 약간의 답답함은 가셔지지가 않는다.  과연 김대중은 외환 위기의 극복을 그런 식으로밖에 하지 못했을까? 김민웅의 다른 책 <밀실의 제국>을 읽기 위한 워밍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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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이규태의 지하실에 들어가다

24년동안 칼럼을 연재하고 세상을 떠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의 서재
1만권이 넘는 책들과 엄청난 메모들이 행복한 글쟁이의 인생을 증명한다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24년 동안 8391일에 걸쳐 6702회까지 이어진 초유의 신문 고정 칼럼(‘이규태 코너’), 스스로 주도한 대형 신문 시리즈물 37개, 120여 권에 이르는 저서….

지난 2월25일 별세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이 평생에 이룩한 기록은 한국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은 저널리스트들이 꾸준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와 경험이 일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과 생명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실 서재를 물리적 원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 서재 모습. ‘이규태 코너’의 아이디어와 글 재료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 서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 전 고문의 장남인 이사부(41·<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부 부장대우)씨는 <한겨레21>의 취재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고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을 모시고 살아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전 고문의 자택에 들른 것은 3월8일 오후 2시였다.

사람 얼굴을 다룬 책만도 30권

20~25평 정도 돼 보이는 지하실 서재는 책과 각종 스크랩,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니 도서관’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했다. “책이 정확하게 몇 권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만2천~1만3천권 정도 될 것 같다”며 “원하는 자료를 모으는 기쁨과 행복으로 한평생을 산 분이었기 때문에 이 공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말했다. 이 공간을 마련한 때는 10년 전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온 집안의 벽이 책으로 가득 찼죠. 10년 전 이사를 하는 데 가장 먼저 고려하시는 게 이 공간이더라고요. 이런 곳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무리를 해서 이사한 겁니다.”

이 전 고문은 평생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너무 많이 사다 보니 대형 서점들에서는 아예 일본 책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책 제목과 간략한 내용이 담긴 리스트를 부친께 먼저 보내줄 정도였다”며 “새로운 전집류가 집에 들어올 때면 ‘우리나라에 한 질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흐뭇해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 그는 <조선일보> 입사 뒤 45년 동안 근속하면서 글을 썼고 퇴직 뒤에도 2년 동안 계속 글을 써왔다.

책들은 대부분 한글과 일본어, 그리고 한자로 된 것들이었다. 영어책은 거의 없었다. 전집류는 한쪽 벽에 몰아서 정리됐다. 국사책에서 제목만 외웠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연려실기술> <성호야설>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불교대장경>…. 최근에 발간된 것보다는 1960~80년대에 나온 것들이 많았다.

전집류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주제에 맞게 분류됐다. 도서관처럼 고유번호를 붙여서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분류법이 있는 듯했다. 설화와 신화, 시조·한시 등 한국문학, 삼국시대, 한국전쟁, 한국의 건축, 한국의 음식, 한국의 의류문화, 인간관계 등 주제에 따라 책들이 따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방대한 주제의 자료들이었다. 그에게 ‘한국학’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유를 알 만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에 관한 연구를 다룬 책들만 해도 족히 30권은 돼 보였다. 어떤 책들에는 책 겉표지에 색깔이 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책갈피에 메모지가 붙어 있는 책도 있었다. 책을 사지 못한 경우에는 책 전체를 복사해놓기도 했다.

이 전 고문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는 점은 나름대로 만든 색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인 분류 도구를 서재 한쪽에 마련한 그는 ‘창기’(娼妓), ‘향약’ ‘기후’ 등 각각의 주제별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내역을 정리해놨다. 예를 들어 기후나 풍속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고려사 공민왕편 몇 년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 자료가 있다는 식으로 돼 있다.

둘째형 월북으로 마음 고생

이 전 고문은 ‘자료수집광’인 동시에 ‘메모광’이었다. 서재 한쪽엔 수십 권의 노트와 스크랩들이 모여 있었다. 신문기사들을 모아 오려붙인 기사 스크랩과 직접 손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메모한 것들이었다.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는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이 나오면 항상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못 버리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했다.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없는 재료들로 글을 쓸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듯했다. 미처 쓰지 못한 새 대학노트들도 스무 권이 넘어 보였다.

이 전 고문은 인터넷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수리 타법’으로 기사를 쓰고 그것을 이메일로 보내는 정도까지만 컴퓨터를 활용했다. 모으고, 분류하고, 재활용하는 모든 행위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문구점을 사랑했다. “새로운 파일이 나오면 꼭 사야 하고 노트도 항상 새것이 몇 개 이상씩은 있어야 했다”는 게 아들 이씨의 말이다. 이 전 고문은 마지막 칼럼(2월23일치)에서 자신을 “어린 시절 종이를 처음 보고는 너무 신기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소년”이라고 일컬었다.

물론 그의 칼럼이 항상 호평만을 들은 건 아니다. 9·11 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특징에 대해 “극단을 오가는 기후 틀에 마음도 틀이 박혀 매사에 극단적”이며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라고 썼다가 “환경결정론이며 인종주의적 편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1994년 10월에는 하루치 칼럼의 상당 부분이 일본 <아사히신문>의 논설위원이 쓴 글과 겹친다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시민사회와 충돌했던 것에 견줘보면 1990년대 이후 계속 높아져만 간 반조선일보 기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가 비교적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내용의 글로 일관했던 배경에 대해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고 털어놨다. “한국전쟁 당시였는데 둘째 큰아버지가 좌익 고위 간부였다가 월북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을 포함한 가족과 친척이 연좌제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도 잘못하면 돌아가실 뻔한 위기까지 갔는데 당시 경찰서장이 봐줘서 살아났다는군요.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로도 조카들이 취직할 때 보증까지 서야 했다고 하셨죠.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도 ‘데모하는 것은 좋은데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숨이 멎기 3일전까지 칼럼 써

서재의 책들은 3월 말께 연세대 도서관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수십 년간 때를 묻힌 책들에 대해서 이 전 고문은 “그렇지만 나만큼 책을 정독하거나 완독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시치미를 뗐다고 한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발췌해서 봐야 하는 기자들의 노동 방식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셈이다. 아들 이씨는 “장례식장에서 한 스님이 이규택 코너 24년치를 모두 복사해서 보관해오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친께서 행복한 삶을 사셨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이 쓴 모든 글을 한데 묶어 ‘이규태 전집’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전 고문은 숨이 멎기 3일 전까지 칼럼을 썼다. 폐암 말기 증상 때문에 마지막 몇 회는 기력이 달려 구술했다. ‘독자와 세상에 대한 유언’이나 다름없는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글로 먹고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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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Bang 2008-03-2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4년간 쓰신 이규택
코너칼럼이 CD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구입할수는 없는지요.
있다면 연락 주세요.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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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수많은 제도를 생성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물인 제도는 인간을 구속함으로써 자신의 창조자에게 보답(?)한다. 인간행동과 구조가 제도를 매개로 상호 작용을 하는 양상을 연구하는 이론이 신제도론이다. 이는 1980년대 이후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니, 기존의 폐쇄적, 수동적인 인간관에 대한 반기랄까? 하지만 이는 학문상, 관념상의 개념일 뿐 대부분의 우리는 제도를 형성하는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오히려 대다수의 제도는 형성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듯해 보인다.

운동경기의 규칙은 어떨까? 종종 규칙이 변화하기도 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공격자에게 유리한 오프사이드 규칙을 도입하겠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운동에 적용되는 규칙 역시 변화가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변화는 미시적일 뿐이다. 11명의 선수가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인 축구는 4-4-2, 3-4-3, 4-3-3 등 다양한 전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한된 범위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수비 지향적인 전술을 펼치는 감독이라 하여도 골키퍼를 두 명 둘 순 없는 것이다. 장갑을 끼고 경기 도중 손을 사용할 수 있는 골키퍼는 11명의 선수 중 오로지 1명 만이 허락될 뿐이다. 모르겠다. 포지션 따위는 논하지 않는 동네 꼬마들의 축구에서는 골키퍼도 여럿이 허용되는지도 만약 그렇다면, 동네 축구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토탈 싸커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 물론 농담이다;;)

 

우리 사회의 기준은 남성이다.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수많은 성폭력들이 성매매를 금지한 여성부 때문이라고 토로하는 이들의 시각 역시 남성의 것인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남성의 성욕은 자제할 수 없는 것이며, 얼마나 많은 여성과 관계를 했는가는 그 남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듯 무용담처럼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성은 다르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순결을 유지하는 천사와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몸을 대줘야 하는 악한 여자로, 사회는 여성을 이분화하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교류도 허락되지 않는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여성들은 (남성의 입장에서) 순수한 자신의 혈통을 생산할 수 없기에 위험한 존재일 뿐이다.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정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결혼 제도는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이다. 몇몇 문화권을 제외하고는 일부일처제가 옹호되고 있으니, 이는 한 남성은 한 여자와만 가정을 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명목적으로는 일부일처제이지만 제도권 외에 또 다른 가족을 꾸리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제도는 제도일 뿐 현실을 모두 포용할 순 없는 법인지라,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줘야 하는 것이 남자들의 세계란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뒤바꾸어놓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남성을 만나서 가정을 꾸린다면? 남성에게 성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성욕은 정숙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남성에게 바람 피우는 것은 한 때의 무용담이기에 참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그와 동일한 행위는 집안 망신이요, 더 나아가 가정 해체를 위한 지름길일 뿐이다.

 

, 이 발칙한 아내를 어찌하면 좋을까?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남편을 탐한 아내 앞에서 는 할 말을 잃는다. 자신과 다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라니,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성관계를 할 수 있고,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역시 가능함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

그렇다 하여 작가가 엄청난 페미니즘의 소유자는 아니다. 아내는 자신의 도덕적 타락(?)을 보상받으려는 듯 슈퍼 우먼으로 돌변했으니, 한 집 살림도 힘들어 죽겠건만, 그것도 직장까지 다니면서 아무런 불평 없이 가사에 목을 맨다. 자신은 투톱을 구사하는 감독일 뿐이며, 어느 선수가 골을 넣었건 팀은 점수를 얻는다고 그녀의 말하지만 투톱을 위한 그녀의 희생은 실로 크게 느껴진다. 끝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편을 받아들이진 못한 체 그놈이 자신과 절대 마주치지 않도록 2층 출입구는 따로 내야 한다는 의 이야기나, 자신의 두 남편과 함께 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나고자 하는 아내의 생각, 이 모든 것은 이 소설의 한계라면 한계이며 동시에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제약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누구가 되었건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고 항변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호탕하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탈착식 자전거를 언급하며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수하는 병수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상상 외라고도 할 수 있는 의 태도까지 접하고 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조차도 내 감정을 헷갈리게 된다.

 

선수들은 은퇴할지라도 축구는 끝이 없으며, 누군가는 골을 넣고 또 누군가는 골을 막을 것이다. 사랑이 축구와 같다 할 순 없겠지만 사고를 뒤흔드는 글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으니,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골을 먹었을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 번쯤 천지를 흔들고픈(?) 사람이라면 말 없이 두 손에 쥐어주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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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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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7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란다. 인터넷 서점 메인 화면에 떡하니 뜨는데 익숙한 이름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카트에 담아버렸다. 그녀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던 것일까? 제목이 끌렸던 것도,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글도 안 읽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렇게... 만나야만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하던데, 어쩌면 책도 그와 같은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보다. 읽어야만 하는 책은 언젠가 읽게 마련이라고 할까나.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을 경험치 못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태도는 각자 다를 것이다.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자 안간힘 쓰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혹자는 스스로 ‘끝’을 결정지으려 든다. 자살, 스스로 생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은 종교에서는 이를 ‘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와 같은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불문하고 말이다. 아니,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태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기에 우리는 아직 너무 어리니 말이다.


사형. 초등학생 때도 이 주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이는 충분히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그만큼 특정 결론을 선택하기 힘듦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삶은 고귀하고 다른 누구의 삶은 저속한 것이 가능한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 그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 등등. 수많은 사례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각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지배적인 사고는 존재할 것이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혹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 그들의 삶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이고, 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을 긁어모은 것에 불과한 듯 하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그곳을 드나들며 작가는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100% 착하거나 100% 악하진 않다는 사실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범죄인으로 지목된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그린 ‘윤수’라는 인물은 그러했다.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강간한 파렴치범, 사회는 그의 가슴에 빨간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경직된 눈빛의 내가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까지 마친, 어떻게 보면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겐 감당하기 힘든 상처가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그래도 나만은 감싸줄 것이다 믿었던 어머니마저도 창피하게 여기며 외면하게 만든... 이미 세 차례나, 타인 아닌 나를 살인하기 위해 애썼던 인물. 나는 타인을 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가 허락한(?),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윤수의 얼굴을 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지난 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인물을 마주 대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치고자하는 강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상처 입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윤수였기에,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동생마저도 앗아간 지독한 가난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 그는 외로웠다. 냉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사형은, 타인이 자신의 삶을 멈추게 해준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가 자신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죽음은 축복이었다. 밑바닥만을 기어다니던 자신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유명인이 되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윤수 못지않게 내 안에도 상처가 많았다. 신뢰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 듯 했다. 힘겨워 비틀거릴 때마다 오히려 그런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게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다. 그것도 아주 짜릿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과 상대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기 자신을... 그것은 삶을 포기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을 손가락질 한다 할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꼴통’이라 정의한다 할지라도...


감정 몰입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 아니,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존재하는 상처들을 헤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겨우 딱지가 생겼는데 그 딱지를 잡아뜯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맺힌 선홍빛 핏물을 대하는 듯, 그렇게 한 움큼 눈물을 쏟아냈다.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고 싶을 땐 울어야만 하는 거라며...


언젠간 나도 죽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진 나 역시도 하루하루 불안히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일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가장 맑은 영혼을 발견하는 것이 나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 결코 끌어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궁극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버려왔던 내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것... 이 숙제들을 완수할 수 있을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는진 잘 모르겠다.


크게 한 번 울고 또 한 번 웃자. 지저분히 쌓인 복잡한 감정들을 잠시 접어두고, 그렇게 나를 치유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행복이 뭔지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는 말을 뱉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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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을 떄 <전쟁과 사회>와 <에로틱 문학의 역사>를 예약하고 왔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은 촌 동네 도서관이라 없는 책이 많다.  그래서 다른 도서관에 있는 책을 예약하고 빌려 볼 수 있는 제도가 있나 보다.  아주 좋은 제도이다.  오늘 도서관 직원에게서 책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3일안에 대출해 가야한다고 한다.  나는 토요일 전에는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니 그렇게 편의를 봐주겠다고 한다.  도서관에 근무하는 건 직업치고는 참 좋은 것이다.  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문자 정도로 연락이 오겠거니 했는데 직접 전화까지 걸어준 직원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말소리가 다소 사무적이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눈감아 줄남하다.  이러다가 왠만한 책은 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지 않게 되나 싶다.  그도 좋은 일이다.   어차피 읽고 나서 좋으면 사게 될 것이니..

 

 

 

 

'매일 아침'에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주문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종교적인 색채가 나는 종교인들(중,목사,신부,수녀)의 책은 읽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가 되는 분들도 있다.  오강남목사, 이현주목사, 김민웅목사(최근엔 교수가 되었다)의 책은 예외다.  오강남이 번역한 <도덕경>을 가지고 한동안 도덕경을 공부한 적도 있다. 그가 번역한 현암사에서 나온 <장자>는 책장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지만...  예전에 이슈가 된 책을 5년쯤 지나서 읽어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한다.  책값도 무척 싸지고.(사실 난 이책을 3,800원에 주문했다.  포인트 2,000점+OK Cashbag 1,000점이 삭감하니 참 싸다.)

이현주 목사의 책은 아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이아무개 목사의 열린 사고를 존경한다.

 

 

 

 

 

유.불.선을 넘나드는 이현주 목사님의 관심과 식견에, 그리고 끊임없는 저작활동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저 많은 책 중에 제대로 본 건 <노자 이야기>를 비롯하여 몇 권이 채 안되지만 그럼 어떠랴.  책장에 꽃힌 책만 보아도 바보처럼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걸.  최근엔 대학과 중용을 번역한 책도 나왔다.  잘하면 그 책도 내 책장에 눕게 되겠지.

김민웅교수의 책은 단행본으론 딱  두 권이 있다.

 

 

 

 

<보이지 않는 식민지>는 지금 내 가방에 있다.  예전에 한 번 본 걸 재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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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3-2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강남은 목사가 아니고 비교종교학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