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싸우자, 그 위로 날아오르자
<나비와 전사>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씨 "공부는 원초적 본능"
텍스트만보기   조성일(sicho) 기자   
▲ <나비와 전사>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
ⓒ 조성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고마녀'로 통하는 고미숙(46)은 자신의 직업을 '고전평론가'라고 소개한다.

아무 분야든 뒤에 붙여 자칭 평론가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고미숙의 '고전평론가' 역시 같은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3년 전 펴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펴냄)이 4만여 부나 팔려나가며 인문서치고는 공전의 히트를 쳤던 기록을 들춰보면, 이름붙이기는 자칭이었지만 그 만만치 않은 내공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타칭으로도 '고전평론가'가 되었다.

그런 고미숙은 이번에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문제작을 내놓았다.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펴냄). 제목만 봐서는 요즘 말로 '대략난감'이다. 낯선 제목 위에 얹혀진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이라는 부제를 보고 나서야 근대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미숙은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해온 공부에 대한 하나의 마디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제 그동안 잡고 있었던 물음들을 놓아버려야 새로운 길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을 공부하다 근대에 도달했다던 고미숙. 이제 다시 근대를 통해 고전을 탐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미숙을 지난 25일 서울 원남동에 자리잡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2층 찻집에서 인터뷰했다. 인터뷰 도중 이 곳에서 최근 새 책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 펴냄)를 낸 이진경 서울 산업대 교수, 연구소의 추장 고병권씨의 얼굴도 마주칠 수 있었다.

푸코와 연암, 그리고 고미숙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 10년 공부의 한 마디를 맺었다고 말하는 고미숙.
ⓒ 조성일
낯선 책제목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비와 전사>의 책등에 박아놓은 문구다. 푸코를 '전사'로, 연암을 '나비'로 비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연암과 푸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연암과 푸코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근대의 심연을 탐색한다.

탈근대·근대·18세기라는 세 개의 그물망을 교차시켜 새로운 앎과 삶을 찾아나서는 이 책의 여정은 기차가 우리의 전통적 시공간을 어떻게 해체하고 근대적 시공간을 만들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공간-인간-성(性)-몸-앎-글쓰기'의 순서로 진행된다.

물론 각각의 주제가 따로 놀지만, 다른 주제들에 인접해 있으면서 때로는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근대의 출구를 향해 나간다. '입구'에서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물음으로 던지고, '출구'에서 '미래 거기의 삶'으로 날아가는 비전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이 책을 구상할 때는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였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져 처음 의도와는 사뭇 다른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고미숙이 텍스트로 삼은 근대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균질화된 지식과 사유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균질화된 근대적 사유에서 고미숙이 일탈(?)할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이 코뮌적 지식인 공동체 공간 '수유+너머'의 정서적 분위기를 한껏 타면서 강의·발표·세미나를 거치는 동안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섞여들어와 비빔밥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연암의 내공은 유머에서 나온다

"잘 다듬어지고 완결된 학술적 보고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말과 사물들이 충돌하는 '활발발(活潑潑)한' 다큐멘터리로 감상되기를 기원한다."

고미숙은 많은 사람들이 근대나 푸코, 연암과 같은 용어 때문에 딱딱한 학술서라는 선입견을 가질까봐 그런 책이 아니라고 먼저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이 책을,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매혹적인 갈림길을 마련해준 두 사우인 연암과 푸코에 대한 '헌정 앨범'이라고 했다.

"푸코의 고고학적 삽질을 보고 역사를 보는 눈을 배웠고 그러면서 연암을 만났는데, 푸코를 통해 '열하일기'를 보니까 이건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푸코는 근대성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연암은 그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질주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단지 명문장가나 실학자 정도로만 여기던 연암을 천의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하면서, '천재와 범부의 경계를 깨뜨린 존경과 감동의 인물'로 치켜세운다.

"연암의 내공은 어깨에 힘주고 비분강개하는 것이 아니고 평이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심연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암의 시선은 어떤 대상과도 만나고 접속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로지르기에 능수능란한 선비였습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연암의 이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의 힘은 유머다. 자기를 틀에 가두지 않는 그런 유머를 구사한다.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유머'라는 달라이라마의 사유와도 맞닿아있다.

"한·미 FTA라니, 우리는 근대적 '욕망의 노예'인가"

▲ 삶과 앎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고미숙.
ⓒ 조성일
20년째 앞을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자 정작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사람이 쉽게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연암의 산문에 소개된 서경덕의 이 일화에 나오는 사람은 그동안 세상을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반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그저 우리의 시각에 의해 구성된 것일 뿐 '본래 면목'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고, 그걸 확대하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진다는 뜻이 될 터이다.

그래서 고미숙은 그동안 우리에게 들씌워져있던 근대에서 과감히 벗어나 세상을 보자고 한다.

"새만금이나 한·미 FTA를 한번 보세요. 한·미 FTA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 미국 중산층과 똑같이 되겠다는 것인데, 그건 지금의 삶의 다양성은 다 깨지는 것을 의미하고 젊어서부터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는 비참한 삶으로 가자는 겁니다. 이건 근대의 구조화한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사회적 참여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수유+너머'는 최근 연구소 외벽에 'FTA 결사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어놓는 등 실천적 참여에 본격 나섰다. 공교롭게도 바람이 이 현수막을 강제철거(?) 하는 관계로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텅 빈 그 자리가 왠지 남다르게 보였다.

"고병권은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이진경은 코뮌적 방식에, 그리고 저는 새만금에 관해 끊임없이 글쓰고 발언해오는 등 개별적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모든 회원들의 의견이 자연스레 모아지면서 한 목소리를 낸 것이죠."

'수유+너머'는 최근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미 FTA, 새만금 간척사업,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한다"는 글을 올려 "모든 이슈에 모두가 싸우자"고 선언했다.

때마침 고병권이 인터뷰하는 옆자리에서 5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새만금에서부터 서울시청까지 걸으면서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을 몸으로 배우는 행사의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고전으로 첨단을 말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공부는 더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라 삶이라고.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고. 배움이란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는 '원초적 본능'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실용적 목적이 없을 때 하는 공부야말로 최고의 지식이며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됩니다."

최근 연구소에 개설한 청소년 고전강좌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고미숙은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고전을 읽자고 했다. 역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병(?)의 발동이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않는 근대를 과감히 벗어나 모든 것을 재구성하자고 말하는 고미숙. 그래야 비전 있는 미래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삶과 앎을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이제 근대를 갖고 글 쓸 것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고미숙은 18세기 이전으로 가서 오래된 시대를 통해 첨단의 문제를 말할 것이라며 연암의 <답경지지삼>(答京之之三)의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아이가 나비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는 손가락을 집게 모양을 해가지고 살금살금 가다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바로 사마천이 글을 쓸 때의 심정입니다."

▲ 바람이 '한미FTA 결사 반대' 현수막을 강제철거한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외벽.
ⓒ 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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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다.  전반적으로 디자인이나 편집이 아주 마음에 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몇 군데 오자(誤字)가 있다.  책이 많이 팔리게 되면 - 그래야 재판할 수 있으니까 - 고쳤으면 한다. 

1) 424쪽 - 약재를 쓰는 건 물론 방위법에 따라 벽사(酸邪)를 하거나 ......  ==>  벽사의 한자 표기가 틀렸다.  '酸'은 '실 산'자이다.   마땅히 '辟邪'로 고쳐야 한다.

벽사 [―싸][辟邪] <명사>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벽사-하다 <자동사><여불규칙활용> (Yahoo 사전)

2) 435쪽 - 박지원,  《북학의》==>  박지원, <북학의서>로 바꾸어야 한다.  보리에서 나온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200쪽에서 확인.  마찬가지로 71쪽도 마찬가지로 바꾸는 것이 좋아 보인다. 박지원이 《북학의》의 작자로 오인될 수 있으니까.

3) 480쪽 - '사막에서 번역하기(Translating on the dessert) ==>  '사막에서 번역하기(Translating on the desert), the desert 앞의 전치사도 'in'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4) 527쪽 - 정조의 즉위를 돌러싸고 벌어진 '시파(時派)/벽파(酸派)'의 대결 ==> 벽파의 한자가 틀렸다. '僻派'가 맞다.

참고 :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58-byugp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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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예수는 없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당분간 책 구입을 자제하기로 해놓곤 느닷없이 오강남의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를 주문하여 버렸다.  아직 <예수는 없다>도 시작도 못했는데.  참 이상도 하다.  어떤 책은 한동안을 망설여도 잘 주문을 못하는데 이 책은 그냥 별 망설이지도 않고 냅다 주문하였다.  아마도 살기가 더욱 힘들어지니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나도 종교에 귀의하고 싶어서일까?  책장에 쟁여 놓다가 어느 순간 읽고 싶어지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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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8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없다는
너무 초등학생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써놨더라구요 ^^;
예를 들어 놓은게 꼭 그랬어요.
읽다보면 점점 질리는 것도 있고 ^^;

타지마할 2006-04-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필히 보야야겠군요.
 
 전출처 : 로쟈 > '세계의 지성' 톱10

어제 TV 등 언론에서는 노언 촘스키가 영미의 시사지들이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 선정한 '세계의 지성'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약 2만명이 참가한 투표에서 약 5000표를 획득, 2500표를 얻은 움베르토 에코를 더블 스코어로 따돌렸다고. 주로 영어권 네티즌이 참여한 것이므로 영미쪽 지식인들이 대거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프랑스쪽 지식인들은 톱10 안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어제 귀가길에 문화일보에서 이 '톱10'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대중문화'의 산물이기도 한 이런 투표 자체에 별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가늠하는 데는 유익한 지표인 듯싶어서 소개하고 몇 자 덧붙인다(내가 흥미를 느낀 건 생물학자들의 부상이었다).

1위 노엄 촘스키(미국). 직업은 언어학자로 돼 있지만, 정치비평가, 문명비평가 정도로 더 잘 알려져야 마땅한 사람이고, 주로 하는 일은 '미국 비판'이다. 네오콘 잡지의 한 편집장은 촘스키와 하워드 진을 가리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대중이 보기엔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비판의 테마와 강도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촘스키의 인지도가 높은 것은, 내가 보기에, 가장 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그의 언어학 책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프랑스의 현학적인 지식인들에 대해서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한다(푸코 등을 읽다가 좌절한 사람들에게 촘스키는 희망이다). 대중들이 읽을 글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라는 것.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힌 만큼 그의 '전략'은 유효해 보인다.   

 

 

 

 

촘스키의 책들은 국내에 '너무 많이' 소개돼 있다(국내엔 촘스키의 제자들도 여럿 된다). 수준 이하의 번역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렵지 않은' 책들이기 때문인 듯. 그의 전기로는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 1999)와 <촘스키>(시공사, 1999)가 같은 해에 나왔다(나는 전자를 읽고 후자를 사두었다). 바쁘신 분들은 <30분에 읽는 촘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도를 읽어주시면 되겠다. 책의 역자이자 전문번역가인 강주헌씨는 요즘 부쩍 촘스키에 빠져 있는 듯한데, 가장 최근에 나온 촘스키 책도 그가 번역한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2005)이다. 물론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적 인지도에다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촘스키는 우리 시대의, 미패권주의 시대의 '사르트르'이다(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뜻한다).

2위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 직업은 문학비평가로 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기호학자이고 게다가 소설가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이런 류의 투표를 했다면, 촘스키를 거뜬히 따돌렸을지도 모른다. 정치비평서들이 일부 '전문서'로 소개돼 있는 촘스키와는 달리 에코의 경우는 소설과 문학비평서, 중세미학연구서 등이 시리즈로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러시아보다 국내에 더 많은 '에코'가 나와 있다(그의 '조이스'론이 소개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거의 '에코 천국'이라고 할 만큼.

 

 

 

 

국내의 에코 전문출판사로는 열린책들과 새물결을 들 수 있는데, <움베르토 에코 평전>(2004)는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에코 붐'을 만들어낸 건 물론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초판은 1986)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에코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와 이윤기 선생의 번역을 교정해준 것으로 잘 알려진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가 부수적인 참고문헌이 된다. 개정판도 갖고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장미의 이름> 초판이며, 작년에 러시아어본도 구해왔기 때문에 나중에 개정판으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인다(<푸코의 진자> <전날밤> <바우돌리노> 등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만 하도록 한다).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장 자크 아노에 의해서 영화화됐다는 것(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 주연). 그리고 대부분이 모를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다른 역자에 의해서도 번역됐었다는 것. <장미의 이름으로>(우신사, 1986). 프랑코 모레티의 표현을 빌면 번역 또한 '도살장'이어서 살아남는 번역은 몇 안된다. 

 

 

 

 

자신의 최초 전공이기도 했던 중세미학에 관한 책으론 <중세의 미와 예술>(열린책들, 1998), 기호학자로서 명망을 얻은 책으로 <기호학과 현대예술>(열린책들, 1998)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기호학과 현대예술>은 불어본의 번역이고, 영어본 번역은 <기호학이론>(문학과지성사)이다. 이 국역본보다는 영어본이 훨씬 읽기 쉽다). 기호학자로서의 출세작 <기호학 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2005)에 대해서는 한번 소개한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대신에 추천할 만한 것은 에코가 공저한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 역자가 에코의 제자이다. 에코 기호학에 관한 국내 연구서로는 박상진 교수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 2003)이 유일하지 않나 싶고,  김성도 교수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는 에코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좀 특이한 책으론 에코의 축구광적인 면모를 기호학과 엮은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가 있다.

 

 

 

 

에코는 잡지에 기고하는 짤막한 에세이로도 유명한데, 국내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열린책들, 1995)으로 또 흥행몰이를 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1999)은 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후에도 물론 열린책들에서는 그의 에세이집들을 꾸준히 내고 있으나 내가 사거나 읽지 않았으므로 언급을 자제하겠다. 에코의 에세이들에 비교적 일찍부터 눈길을 준 출판사가 새물결이고,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1993)을 시작으로 댓 권을 연이어 출간했었다. 얼마전에 그 책들이 재출간됐다(일부는 독일어판의 번역이다). 이 정도면 에코는 촘스키 뺨치는 지성인이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영국).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일 듯하지만, 도킨스가 그래도 3위에 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영국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도킨스에 관해서는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간단하게 훑어보기로 한다.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두산동아, 1992)이고, 그의 책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이다. 물론 그때 도킨스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막연하게 '이타적 행위'라는 게 모종의 심리적/도착적 만족감을 주는 '이기적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는데, 늘 그렇듯이 서점을 두리번 거리던 차에 <이기적인 유전자>란 책이 눈에 띄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유레카!'(우리식 버전으론 '심봤다!') 이후에 원서의 개정판을 옮긴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이 출간됐고, 절친한 친구는 나의 권유에 따라 그 책을 읽고서 '유레카!'를 복창했다(그는 한동안 나만큼 도킨스를 욹어먹고 다녔다). 지금의 <이기적 유전자>(2002)는 보다 세련된 장정을 하고 있는바(표지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름하여 '고전100선'이요, 대학생/청소년 필독서이다.    

 

 

 

 

이후 도킨스의 주저라고 할 만한 책으론 <눈먼시계공>(민음사, 1994)과 10년만에 재간된 <눈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2004)이 있다. 작년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은 내가 원서까지 사둔 책이지만 아직 읽지 않았으므로 감동을 적기는 어렵지만, 하여간에 다른 책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최신간인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소개한바 있듯이 주로 칼럼모음집인데, '인간' 도킨스의 체취를 가장 강하게 내뿜는다. 도킨스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독자라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보셔도 좋겠다(다이제스트라 감질이 나겠지만).

 

 

 

 

세계석학 30인과의 대담집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가야넷, 2000)에는 촘스키와 에코는 물론 도킨스와의 대담도 실려 있다(지젝도 들어가 있다!). 내가 감히 사두지 못한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2002)에도 도킨스는 (당연히)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내 기억에 존 브로크맨이 편집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에서도 도킨스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호적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의 비교는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를 참조할 수 있다.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 이 리스트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동유럽 지식인. 직업은 극작가이자 정치인으로 돼 있는데, 대통령을 역임한바 있으니 저명한 인사이지만 국내에는 별로 연고가 없는 듯하다.

 

 

 

 

뒤져보면 하벨의 책으론 <대통령의 꿈>(들꽃세상, 1992)이 처음 소개됐었고, '하벨 대통령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사상'이란 부제의 <프라하의 여름>(고려원, 1994)과 드라마 <청중>(예니, 2000)이 소개돼 있는 정도. 동구권 희곡모음집인 <탱고 外>(현대미학사, 1994)에도 <도시 재개발 계획>이라는 하벨의 작품이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지역적 편향성 때문에 러시아/동구권 지식인들에 대한 소개/이해는 턱없이 부족한 편. 멋쩍은 김에 하벨의 나라 체코에 대한 안내서 두 권 정도만을 적어두기로 하자. 체코 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체코 문화>(한국외대출판부, 2000), 그리고 체코 여행 가이드북 <체코>(휘슬러, 2005).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 직업은 정치평론가라고 돼 있는데, 톱10의 지식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인물이다. 나의 견문이 짧은 것인가 하고 검색해 보았더니, 국내에 소개된 건 <키신저재판>(아침이슬, 2001) 달랑 한 권이다. 하면, 나의 '무식'을 탓할 수는 없는 것.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니까 <선교사의 입장: 마더 테레사의 이데올로기>(1995)란 책이 있고,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저한 <희생자를 탓하기: 사이비 학문과 팔레스타인문제>(1988), 아담 바르토스란 이와 공저한 <국제 영토: UN, 1945-95>(1994)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아마도 영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인 모양(우리의 경우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6위 폴 크루그먼(미국).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되는 현역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엔 反부시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며(뉴욕타임즈에 칼럼을 쓴다)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다고. 촘스키와 함께 MIT에 몸담고 있고, 1953년생이니까 나이도 비교적 젊다.

 

 

 

 

그의 책으론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 그가 공저처럼 돼 있는 <복잡계 경제학2>(평범사, 1998)도 갖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책정리를 하면서 <복잡계 경제학1>과 함께 쓰레기장으로 갔다. 아마도 그 책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자기 조직의 경제(Self-organizing Economy)>(부키, 2002)일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대충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데, '복잡계 경제학 개척자'로도 평가된다는 크루그먼은 이 책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사고방식과 모델을 다"룬다고. "그는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instability)'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random growth)'라는 자기 조직화의 두 원리가 어떻게 도시의 형성과 기술 집중 및 경기 순환 등 제반의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자기조직계'에 대한 책들이 한동안 붐을 탄 적이 있는데,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카오스: 현대 과학의 대혁명>(동문사, 1993)이 발단이었다(물론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 같은 신과학 천문학서도 있었다). 이어서 <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까치, 1997) 등이 나왔고, <복잡계란 무엇인가>, <왜 복잡계 경제학인가> 같은 일본서들이 번역/소개됐다. '복잡계 경제학'에서 크루그먼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수확체증의 법칙'을 주창했던 브라이언 아서인데, 크루그먼은 이를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듯. 이 '자기조직화'는 문학/예술에서도 많이 나오는 테마이며, 들뢰즈를 읽다가도 종종 마주치는 용어이다. 그러니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하는 크루그먼의 나머지 책들이다. 

 

 

 

 

7위는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작년 10월에 데리다가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하버마스와 함께 이 명단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로한 세계철학계의 원로이지만 하버마스는 언제나 '막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막내였으며(물론 그의 제자들이 2세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1세대 학자들의 파워와 명망에 미치지 못한다) 20세기 독일철학의 막내이다.

 

 

 

 

독일 관념론의 적자를 자처하는 독일의 '괴물'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에코리브르)가 지난 여름에 출간됐었다. 회슬레는 방한강연을 가진바 있으며 그때의 인연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했다)가 꼽은바, (거명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20세기 최고의 독일 철학자는 바이스체커, 가다머, 칼-오토 아펠, 하버마스 4인이었다(거기서도 하버마스는 가장 '젊은' 철학자였다).

 

 

 

 

하버마스의 책들은 국내에 '충분히'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질과는 무관하게. 예컨대,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은 오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책이며, 따라서 '대중들'은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프랑스의 난다긴다하는 철학자들을 '신보수주의' 철학자로 몰아세우며 그의 '거장적' 면모를 부각시킨 책이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이다(이 또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있다). 기억에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인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 2001)부터 <소통행위이론1>(의암, 1995, 이건 2권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대표적인 '부실'번역 사례이다)를 거쳐서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에 이르는 주저들은 대부분 국역본을 갖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의사소통의 철학>(민음사)와 대담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하버마스에 대한 국내 연구만 해도 (상대적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8위 아마티아 센(인도). 경제학자. 인도 출신으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의 책들은 수상에 힘입어 바로 출간된 바 있다. <불평등의 재검토>(한울, 1999), <윤리학과 경제학>(한울, 1999)이 그것이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도 불린다니까 그걸로도 그의 학문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도 케임브리지대의 교수이다!).

 


 

 

 

센의 신간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이며, 소개에 따르면 "아마티아 센은 이 책에서 개인을 단순히 분배된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국가, 시장, 법 체계, 정당, 언론, 이익단체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장치들이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를 충족시키고 보장하는 데 얼마나 공헌하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으로 중국과 인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검토한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유 속에 정치 참여와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진보의 능력이 어떻게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지표를 제시하며, 발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바이지만, <국부론>의 저자이자 동시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으며, 경제학의 두 축은 윤리학과 경제(공)학이다. 센은 거기서 잊혀지거나 간과되고 있는 윤리학의 전통을 경제학에서 다시 되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 이를 테면 '아담 스미스 구하기'이다. 그리고 그게 '나라 구하기'이다, 경제기술자들아! 

9위는 역시나 도킨스의 경우처럼 나를 놀라게 했는데, 미국의 생물/지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사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다이아몬드가 대중적인 인기만큼이나 지식인으로서 대우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요컨대,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며, 그의 최신간 <붕괴: 어떻게 한 나라가 망하는가>가 빠른 시일 안에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10위는 인도 출신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문제작 <악마의 시>로 1989년 이란정부(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진 작가. 그런 연유로 노벨상을 타기는 힘들겠지만(이번에 터기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파묵이 논란 끝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아마도 루시디는 노벨상 수상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루시디의 문학에 대해서는 언젠가 박노자가 한 칼럼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한바 있다). 그의 작품으론 <악마의 시>(문학세계사, 2001), <무어의 마지막 한숨>(문학세계사, 1996)가 번역돼 있고 <하룬과 이야기바다>(달리, 2005)도 올해 나왔다. 좀 오래된 번역으론 <한밤의 아이들>(하서출판사, 1989)과 <악마의 수치>(청림출판, 1989) 등이 있다.

 

 

 

 

05. 10. 18.

P.S. 이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7위,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19위에 올라 있다고. 울포위츠를 선정 리스트에 올린 시사'잡지'들의 양식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하긴 '은행' 눈치도 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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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이런게 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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