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호는 '지승호'고 김경은 '김경'이다!
[서평] 김경의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텍스트만보기   정민호(hynews20) 기자   
인터뷰집하면 지승호가 떠오른다. <마주치다 눈뜨다> <유시민을 만나다> <7인7색> 등 국내 유일의 '인터뷰어'라고 불리는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집을 보면 지승호의 그늘부터 찾게 된다. 지승호가 워낙에 기둥처럼 있기 때문인지 어쩔 도리 없이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 나름대로의 평가를 매겨보곤 하는데 대부분 지승호를 향해 손을 들어주게 된다. 과거에 했던 강연,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말부터 비판의견에 대한 생각까지 인터뷰이의 모든 것을 쫓는 인터뷰어 지승호의 그늘은 그만큼 짙고도 넓은 것이었다.

▲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겉그림.
ⓒ 생각의나무
그런데 분야막론하고 주현, 주성치, 신성순, 장동건, 김훈, 크라잉 넛, 노무현 등 22명과의 인터뷰가 담긴 김경의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는 달랐다. 도무지 지승호의 그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지승호는 지승호고 김경은 김경이다'는, 당연한 것임에도 다른 인터뷰어들은 오랫동안 만들지 못했던 생각을 이제야 하게 해주는 인터뷰집인 것이다.

지승호와 김경은 어떻게 다른가?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김경의 '감각'이다. 지승호가 '당신'을 인터뷰 한다고 가정해보자. 지승호는 '당신'의 블로그에 들어가 첫 번째 글부터 마지막 글까지 모두 읽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방문자들의 글에 남긴 댓글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이제껏 바꾼 메인화면의 사진들이나 문구의 의미까지 해석하려 할 것이다. 더불어 '당신'과 친한 관계에 있는 이들의 블로그까지 찾아가 '당신'이 어떤 내용의 방문자글을 남겼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김경은 어떨까? 김경은 '당신'의 블로그에 접속한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고 어떤 감각으로 블로그를 꾸몄는지 3초 만에 훑어볼 것이다. 스크롤바 몇 번 잡아끄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다음으로 김경은 '당신'을 만나는 순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 '당신'을 인터뷰할 것이다. '당신'을 도발하거나, '당신'과 한바탕 놀 준비를 하거나.

지승호는 정통 인터뷰어를 연상케 한다. 미련해보일 정도로 우직하게 인터뷰이의 과거부터 오늘까지 샅샅이 추적하고 그것으로 인터뷰의 살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김경은 어떤가. 물론 김경도 과거부터 샅샅이 추적하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으로 남겨둘 뿐, 그보다는 '오늘'에 주력한다. 오늘에 주력한다는 건 무엇인가? 순간순간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술 먹느라 바쁘다는 주현에게 술을 사들고 찾아가 인터뷰를 청하는 것이나 당시 차기 대권 주자면서 패션무식인 노무현과 정치무식인 패션가들을 삼겹살 앞에 불러온 것부터가 김경의 그러한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놀라운 건 김경의 진짜 반응이다. 김경은 무지개 빛이라도 지녔는지, 아니 그 몇 배의 빛을 내는 스펙트럼을 지니기라도 했는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

DJ.DOC의 인터뷰를 보자. 인터뷰하기 쉽지 않은 대상인지라 김경은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김경은 "나는 다행히 진지한 뮤지션인 양 가식을 떨기보다 양아치스러운 걸 더 좋아하는 남자들을 좀 다룰 줄 안다"고 하더니 한때 좀 놀았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인터뷰가 아니라 '쟤들이랑 한번 놀아보겠다'는 마음가짐이면 만사 오케이"라는 말을 한다.

인터뷰는 정말 그렇게 흘러갔을까? 그렇다. 덕분에 DJ.DOC가 했던 인터뷰들 중에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뻑'가는 인터뷰가 나왔다. DJ.DOC를 아는 사람들은 '기절'할 내용들이 담겨 있다. 물론 이건 DJ.DOC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인터뷰한 다른 인터뷰이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김경은 놀랍게도 만나는 이들마다 빛을 바꾸며 인터뷰이의 생각과 마음을 끄집어냈다! 참으로 쉬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어의 생명은 각자의 개성이다. 그런 면에서 김경은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더욱이 지승호의 인터뷰가 '당신'이 걸어온 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고 내일 걸어갈 길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면 김경의 인터뷰는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며 '당신'의 신경은 어디로 뻗어있는지를 알아내려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쌍수를 들고 반길 또 한명의 인터뷰어의 등장을 알렸다는 점에서 김경의 인터뷰집은 의미심장하다.

지승호는 지승호고 김경은 김경이다.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는 이 반가운 메시지를 던지며 가장 매혹적인 텍스트인 '인간'을 감각적으로 해독했다. 아주 쉬크하게!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3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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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호=알라딘 비숍.
 
 전출처 : 파란여우 > 그래, 알은 깼어?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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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을 쓰면서 불현듯 스친 생각이지만,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적어 보낸 이 구절을 거의 예외 없이 기억하고 있다. 데미안의 전문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귀동냥을 통하여 알을 까고 나오는 새의 이야기가 데미안의 이야기임을 익히 알고 있다. 데미안의 이 한마디는 고뇌에 찬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정도까지 심각하게 이르지 않더라도, 맥베스가 제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유명한 대사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는 기록된 시간 마지막 음절까지 조금씩 기어든다” 보다는 더 뚜렷하게 독자들의 머리에 새겨있다. 맥베스의 허망한 이 한마디를 들으며 마침내 죽음으로 향하는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가슴을 쓸어내렸건만 데미안의 알 깨는 이야기가 더 또렷함은 왜 일까.


10대 초반에서 20대에 이르는 동안 에밀 싱클레어가 겪는 체험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 저마다가 섣불리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을 법한 제2성장기의 아픔과 흡사해 보인다. 그래서 대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데미안을 만나는 필수 코스를 선택하는 것인가. 데미안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난 나로서는 이 말에 십분공감한다. 성장의 진통은 생각보다 아픔이 컸다. 당시 나는 상당히 심각한 가출을 결심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삶의 지루함과 모멸감에 싫증을 느껴 학교 수업에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방을 하나 꾸려 가지고 집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 작은 수공업 공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해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의 으슥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한 마리 짐승의 몸으로 으슥한 밤공기를 가르며 이 재미없는 시들한 세상, 실컷 떠돌며 살아야겠다는. 그것이 알에서 깨어나는 길이라 다졌다. 그 후 어찌되었냐 물으신다면 그 발칙한 프로젝트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지금, 자판기 앞에서 깨지 못한 알 속의 평안을 찬양하고 있잖은가.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가 특정한 나이 또래의 관심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가 모험담을 호기롭게 늘어놓는 제 또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속셈으로 실제 있지도 않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것이 약점이 되어 프란츠 클로머의 협박에 끌려 다니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채 자신만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의 보호와 사랑으로도 막아낼 수 없고, 오직 개개인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뭣 좀 알기 시작하는’ 과정이 막막한 아픔 속에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싱클레어가 성장과 변모의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은 많은 경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심리묘사와 강한 흡입력을 지닌 문체로 그려진다. 해서, <데미안>은 대다수 독자들이 사춘기를 전후한 시기에 품었을 만한 죄의식이나 은밀한 욕망을 공공연하게 형상화함으로써 그 죄의식과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위안을 던져준다. 이러한 위안의 ‘보편성’은 삶의 광대무변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그러나 사는 게 뭐 다른 게 있겠나 하는 시니컬한 ‘그들’의 혼란스러움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값진 것임은 틀림없다. <데미안>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이성에 눈떠가는 싱클레어가 육체적 욕구와 정신의 명령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바로 ‘나’이므로. 그러므로 이것은 ‘내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의문을 품은 부분은 어린 싱클레어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종교적 경건함으로 무장한 가정과 경건함이 통하지 않는 외부 세계사이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성격을 건드리게 된다. 그런데 데미안이 등장해서 프란츠의 협박을 차단한 후 싱클레어의 경험이 품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갈등 문제는 점차 슬그머니 사라지고 추상화된 내면세계의 관념 대립이라는 형태로 변모한다는 점. 이것은 이성에 대한 갈망이나 종교적 고뇌를 겪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성격을 띤 외부와의 문제와 잠시 만나는 듯하다가 추상적 관념으로 돌아버린 구도. 이러한 문제는 데미안이나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이라는 추상적 인물설정으로 어느 새 연결된다. 데미안은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부리는 소년으로, 나중에는 텔레파시나 초감각적인 인물로 확대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도 ‘초능력자’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성별과 시간의 흐름, 선과 악을 초월하는. 신비하다 못해 추상적이고 입체파 화가의 그림 한 점을 대하는 듯하다. 무수히 연결된 꼭짓점으로 통하는 선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하나의 형체를 형성하는 면이 탄생되는. 누가 그랬던가. 입체파는 허세라고. 얼마 전 작고한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은 “모든 예술은 다 사기성을 띤다.”라고 인정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결말로 나아간 <데미안>은 소설적 허세다.


감정의 동화를 오버랩하면서 스무 살 이전의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독자에게 ‘이건 우울하고 은유적인 방황에서 헤매는 내 얘기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미안>. 인간적 성장의 지향점에서 사회적 성격으로 연결되다가 신비화 전략으로 추상적으로 매듭을 지은 미완의 이야기. 여전히 알은 깨지 못한다. 원래부터 알은 깨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단단하거나, 알을 깰 만큼 강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제3의 돌발발언을 찾자면 인간은 원래 알 속에 있지 않다. 공중에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씨앗을 맺고 바람처럼 흘러 다니다가 분해 되어 사라지는 존재. 그러니 깨어야 할 알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독일 문학의 거장인 헤르만 헤세를 욕보이는 일이며 억지다. ‘알 속에 갇혀있다’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복지부동의 명제.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알은 그래 깼어? ‘안간힘’만 쓰고 있을 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스무 살 이전에 <데미안>을 읽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명작고전’이라고들 하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는. 그런데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읽어보니 이것이 명작인 이유는 첫째는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명성 둘째,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인 1차 세계대전의 탄생(20세기의 인류사의 지각대변동)을 위한 구습의 파괴였다는 해설 셋째가 선과 악을 비롯한 통념적인 도덕관을 초월하고 있다는 신비적 매력. 이십여 년이지나 다시 만난 <데미안>의 결론은 ‘난 변했어요! 그러니 알 속에서 어울렁 저울렁 산답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인생이란 변하는 것. 책이라고 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알' 누가 깬 사람 있다면 연락 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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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을 향한 두 개의 방법론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힘들지 않게 떠오르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에게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코드이자 강인한 인상이다. 전작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도 열하를 건넌 연암이 만난 청과 서양문명의 접선을 현대판으로 재조명했다. 동, 서양의 문명, 시대를 나눈 문명, 인종과 가치관을 나눈 문명. 이번 책에서는 국가적 상황을 나누는 공간과 문학적 공간을 이분법으로 잘라내어 문명을 말한다. 나비와 전사 두 갈래의 길은 동양과 서양, 시간과 시대, 근대와 중세, 정신과 육체, 문명과 자연으로 세분화되고 나중에는 소월과 만해의 여성성 투영으로 합의가 모색되어 푸코와 연암으로 결론이 난다. 둘은 상대성이다가 적대적이다가 비슷하다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분되었지만 독립적인 공간형성을 하기도 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집합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도 띤다. 방금 컵에 따라놓은 부글거리는 콜라처럼 저자의 감각적인 글쓰기 능력은 여전히 도약적이다. 하나의 소재에 줄줄이 달려 나오는 문제와 주장이 다층적 스펙트럼을 연상하도록 독자를 잡아 이끈다. 저자가 보여준 프리즘에 도취되어 읽다보면 정작 의문제기를 위하여 메모를 해 놓은 조각들을 놓쳐 버린다. 그만큼 전작에 비하여 이번 책은 도발적이고 더욱 마취성분이 강하다. 책을 덮고 나서야 책을 읽으며 기록해 놓은 공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녀의 광기’라는 말이 써 있다.


그녀가 갖는 근대와 문명에 대한 광기는 푸코와 연암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대한매일신보>는 계몽주의의 선두에서 지휘하고 무덤 속 영혼까지 놀라게 하는 철도가 달린다. 철도로 비유되는 근대 문명의 속도와 그 속도에 함몰되는 근대인의 자화상이 휙휙 지나간다. 계몽주의는 시,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세계를 한 장의 도면으로 일원화하는데 성공했다. 중간과정이 생략된 시대. 여기서 다시 연암 예찬론자인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별한 열하일기’의 가치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 공간”-(53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암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이 공간이었음을 상찬한다. 저자의 사이 공간의 중요성에 관한 역설은 제국주의로 곧장 나아간다.


“‘사이성’이 사라진다는 건 대상과 대상 간에 확연한 위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인과 노예의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관계 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는 물론 주인조차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우주를 소유할 수는 있되, 결코 그것과 함께. 혹은 그 속에서 공명의 춤을 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시공간이다.”-(58쪽)


출발과 목적을 중요시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사이 공간 궤멸하기’가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요즈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지은 <미국 패권의 몰락>을 읽고 있는데 이런 구절이 보인다. “속도가 더 빨라질수록 길이 점점 더 갈짓자를 그리듯이 변동들은 점점 더 기복이 심해지거나 ‘혼돈스러워질’것이고, 그 궤적이 나아가는 방향은 훨씬 더 불확실해질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국가구조가 정당성을 점점 더 상실해감에 따라 집단과 개인의 안전이 어쩌면 아찔할 정도로 위협받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세계체제내에서 일상적 폭력의 양을 증대시킬 것이다.” 철도가 보여주는 직선의 매혹은 폭력적인 직선의 힘으로 전이되고 이것은 근대적 시공간 탄생의 주체가 되었다. 근대이후 문화는 일정 양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강한 힘의 문화’가 단연코 주체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의 세계 제패와 패권의 야욕은 ‘속도’와 ‘도전’으로 대변된다. 이것은 케네디의 ‘프론티어’ 정신이다. 책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는 우주개척정신은 우주정복야심으로 치환된다. 미국이 정말 달나라에 성조기를 꽂은 것이냐 아니면 세트장 제51구역에 꽂은 것이냐는 말이 많지만 미국의 우주로 치닫는 정복욕은 철도의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철도는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다. 그 과정에서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식민과 노예의 수단으로 철저히 활용되고 거세된다.


시공간을 철도라는 산업혁명의 탄생물로 잡아 출발한 책은 계몽주의자들의 ‘도덕적 선’과 기독교의 인연을 연결한다. 야훼를 ‘지독한 사랑/처절한 복수’로 몰고 가는 저자의 주장은 <계몽주의=기독교=도덕적 우화주의=인간 중심주의=근대주의>라는 등식으로 성장한다. 이 말은 윤치호의 입을 빌려 재차 강조된다. “문명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문명의 상태인 채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118쪽)맙소사! 문명의 힘은 놀라워서 한 나라의 독립위에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비문명은 하위이고, 죄악이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문명예찬론을 주창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작업’의 결과다. 이 작업은 철도의 속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인간은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 돌아온 터미네이터는 연암의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만 취급한다. 그러다가 인간은 기계를 작동하는데 방해물이 된다. 영혼은 순결하나 육체는 불순하다는 논리다. 그나마 영혼이 순결한 것은 신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계몽주의자, 근대의 학설이다. 육체는 죄악의 덩어리다. 그러므로 불순하기 짝이 없는 육체에 종(種)을 초월한 다양한 공존이나 담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방통행, 이것이 근대의 욕망이고 소통의 방법이다.


새롭게 알게 된 <동의보감>의 허준을 향한 흠모는 흥미롭다. 저자의 허준 흠모는 기(氣)를 인체탐구의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인체는 우주와 ‘통’한다는 주장도 좋다. 이것은 기억을 되살려보면 연암의 나비처럼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와 문명의 담장 허물기와 통한다. “동의보감은 섹스를 오직 양생적 차원에서 다룰 뿐 결코 도덕이나 선악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는다”-(421쪽)는 이론은 <허준=연암=푸코>를 설정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살포시 끼어드는 ‘장금이’의 이론은 간이 덜 된 젓갈처럼 밍밍한 감이 없지 않지만 독자의 눈요기로는 그만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근대를 신랄하게 몰아세우고 그 전면에 연암과 푸코를 내 세운 저자의 논리는 분명 찬반을 부르는 성격이 짙다. 나 역시 다양한 소재활용으로 근대와 문명을 설파한 저자의 논리에 반대의 의견을 분명 지니고 있는 부분도 있다. 독자는 얼마나 얄미운 존재인가. 오자가 한 개라도 발견되거나 나와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면 더욱 신난다. 게다가 두 개로 쪼개어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경계 지은 이런 류의 색깔 짙은 책은 심심한 혓바닥을 얌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적을 많이 만든다는 것은 환영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 중에서는 분명 나에게 이로운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저자의 질문 설정)=>본론=>출구(저자의 변(辯))로 독특한 구성을 이룬 책이다. 근대와 중세의 출발로 문학과 성, 정치와 문화. 근대의학과 임상의학, 한의학의 관점까지 안테나가 뻗어 있다. 그러나 뛰어난 언변의 방정식은 단순하다. 문명<자연, 근대<중세, 근대의학<한의학, 계몽주의는 인간중심주의를 낳았음에도 결국 인간을 버렸고, 그러므로 ‘(근대)계몽주의는 잘못 되었다!’가 이 책의 주제다. 다양한 소재를 한번에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은 뚜렷하지만 산만하다. 산만한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천천히! 비판도 분명 시시각각 달라질 것이다. 근대적 이성은 '언어의 제국'위에 구축되었다니 이 책에 주는 현재의 비판과 분석을 일단은 발뺌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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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인터뷰집하면 지승호가 떠오른다. <마주치다 눈뜨다>, <유시민을 만나다>, <7인7색> 등 국내 유일의 ‘인터뷰어’라고 불리는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집을 보면 지승호의 그늘부터 찾게 된다. 지승호가 워낙에 기둥처럼 있기 때문인지 어쩔 도리 없이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 나름대로의 평가를 매겨보곤 하는데 대부분 지승호를 향해 손을 들어주게 된다. 과거에 했던 강연,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말부터 비판의견에 대한 생각까지 인터뷰이의 모든 것을 쫓는 인터뷰어 지승호의 그늘은 그만큼 짙고도 넓은 것이었다.

그런데 분야막론하고 주현, 주성치, 신성순, 장동건, 김훈, 크라잉 넛, 노무현 등 22명과의 인터뷰가 담긴 김경의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는 달랐다. 도무지 지승호의 그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지승호는 지승호고 김경은 김경이다’는, 당연한 것임에도 다른 인터뷰어들은 오랫동안 만들지 못했던 생각을 이제야 하게 해주는 인터뷰집인 것이다.

지승호와 김경은 어떻게 다른가?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김경의 ‘감각’이다. 지승호가 ‘당신’을 인터뷰 한다고 가정해보자. 지승호는 ‘당신’의 블로그에 들어가 첫 번째 글부터 마지막 글까지 모두 읽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방문자들의 글에 남긴 댓글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이제껏 바꾼 메인화면의 사진들이나 문구의 의미까지 해석하려 할 것이다. 더불어 ‘당신’과 친한 관계에 있는 이들의 블로그까지 찾아가 ‘당신’이 어떤 내용의 방문자글을 남겼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김경은 어떨까? 김경은 ‘당신’의 블로그에 접속한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고 어떤 감각으로 블로그를 꾸몄는지 3초 만에 훑어볼 것이다. 스크롤바 몇 번 잡아끄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다음으로 김경은 ‘당신’을 만나는 순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 ‘당신’을 인터뷰할 것이다. ‘당신’을 도발하거나, ‘당신’과 한바탕 놀 준비를 하거나.

지승호는 정통 인터뷰어를 연상케 한다. 미련해보일 정도로 우직하게 인터뷰이의 과거부터 오늘까지 샅샅이 추적하고 그것으로 인터뷰의 살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김경은 어떤가. 물론 김경도 과거부터 샅샅이 추적하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으로 남겨둘 뿐, 그보다는 ‘오늘’에 주력한다. 오늘에 주력한다는 건 무엇인가? 순간순간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술 먹느라 바쁘다는 주현에게 술을 사들고 찾아가 인터뷰를 청하는 것이나 당시 차기 대권 주자면서 패션무식인 노무현과 정치무식인 패션가들을 삼겹살 앞에 불러온 것부터가 김경의 그러한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놀라운 건 김경의 진짜 반응이다. 김경은 무지개 빛이라도 지녔는지, 아니 그 몇 배의 빛을 내는 스펙트럼을 지니기라도 했는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

DJ.DOC의 인터뷰를 보자. 인터뷰하기 쉽지 않은 대상인지라 김경은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김경은 “나는 다행히 진지한 뮤지션인 양 가식을 떨기보다 양아치스러운 걸 더 좋아하는 남자들을 좀 다룰 줄 안다”고 하더니 한때 좀 놀았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인터뷰가 아니라 ‘쟤들이랑 한번 놀아보겠다’는 마음가짐이면 만사 오케이다”라는 말을 한다.

인터뷰는 정말 그렇게 흘러갔을까? 그렇다. 덕분에 DJ.DOC가 했던 인터뷰들 중에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뻑’가는 인터뷰가 나왔다. DJ.DOC를 아는 사람들은 ‘기절’할 내용들이 담겨 있다. 물론 이건 DJ.DOC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인터뷰한 다른 인터뷰이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영악하다고 해야할까? 김경은 놀랍게도 만나는 이들마다 빛을 바꾸며 인터뷰이의 생각과 마음을 끄집어냈다! 참으로 쉬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어의 생명은 각자의 개성이다. 그런 면에서 김경은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더욱이 지승호의 인터뷰가 ‘당신’이 걸어온 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고 내일 걸어갈 길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면 김경의 인터뷰는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며 ‘당신’의 신경은 어디로 뻗어있는지를 알아내려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쌍수를 들고 반길 또 한명의 인터뷰어의 등장을 알렸다는 점에서 김경의 인터뷰집은 의미심장하다.

지승호는 지승호고 김경은 김경이다.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는 이 반가운 메시지를 던지며 가장 매혹적인 텍스트인 '인간'을 감각적으로 해독했다. 아주 쉬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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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2 - 진수성찬을 차려라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94년인가 95년인가에 난생 처음으로 중국에 갔다.  천진(天津)에 있던 바이어에게서 클레임이 제기되었고 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장의 기술자를 대동하고 출장을 간 것이다. 이왕 가는 것 갖은 핑계를 대어(없는 거래처 한 두어 군데 만들었다.) 북경에서 이틀을 머무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천진에서는 클레임 협상만하고 잽싸게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는 딱히 비지니스가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김영삼이 북경 방문했을 때 머문 호텔에 여장을 풀고, 이틀 동안 기사와 조선족 가이드가 딸린 Toyota 코로나 한 대를 빌려서 북경 관광을 다녔다. 요즘에야 많이들 다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한국인들이 많지 않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관광 다닌 이야기는 생략하고 북경의 첫날, 저녁 시간이 되어서 가이드 아가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들, 북한 식당에 가 보시겠습니까?"

나랑 같이 간 이과장님 깜짝 놀라며 반문하였다.

“북한 식당이요? 그런 데가 다 있어요?”

음식값이 아주 비싸다는 가이드 아가씨의 말을 무시하고 100%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북에서 온 아가씨라니.  예로부터 남남북녀 아닌가!  히히히. 중국과 북한이 합자하여 만든 식당인데 1층은 불고기 등 한식을 팔고 북한에서 온 아가씨들이 홀 서빙을 하였다.  2층은 중식 식당이라고 한다.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사람들로 붐비는 가운데 겨우 한자리 얻어서 주문을 하는데 정말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반찬도 추가하면 하나하나 돈을 받았다. 당시의 나는 그런 사소한 부분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서빙하는 북쪽의 아가씨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내 생애에 북쪽 사람과 접촉한 것은 인도의 델리 공항에서 스쳐 지나간 북한 외교관을 빼곤 처음이었다.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북에서 온 그 종업원들의 태도는 불친절 그 자체였다. 일부러 말좀 걸어 보려고 김치나 다른 것을 주문기만 하면, 특이한 억양으로 “업슴네다”라고 말해서 “그럼, 있는 게 뭐요?”라고 말해 배시시 웃음 짓게 하곤 그걸 보며 기뻐했던 것 같다. 걔중 이쁜 여자 종업원에게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부탁했더니  무척 퉁명스럽게 던지는 말 한 마디.

"담당 접대원 동무에게 부탁하라우! "

할 수 없이 담당 접대원 동무(?)에게 기념으로 사진 한 방 같이 찍자고 애걸복걸을 했지만 결국은 찍지 못했다. "다음에 오시면 꼭 같이 찍어드릴게요."

한 3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북경에 갈 일이 생겨 담당 접대원 동무와 사진 한 방 찍으려고 (그때는 나도 그랬다) 저번의 조선족 가이드 아가씨에게 다시 한 번 가자고 했는데 문 닫았다고 하여 가지 못했다. 아까워라! 담당 접대원 동무의 당황하는 표정을 꼭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유경식당은 지금도 영업을 한다. 이 나쁜 가이드 아가씨! 아마도 ‘손님을 데리고 오는 가이드에게 주는 수당이 적었나 보다’하고 씩 웃고 말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유경식당’이란 이름의 이 식당은 그간 내가 아는 모든 상식을 깨어 버리고도 손님이 줄을 선다는 것이다.

첫째, 유경식당은 음식 맛이 정말 없다.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고 가면 낭패이다. 오죽하면 다음번에 북경 갔을 때 예의 그 가이드 아가씨가 가기 싫다고 했겠는가? (내가 위에서 실없는 소리를 좀 했지만 이 아가씨도 맛없고 비싼 음식점으로 두 번씩이나 데리고 가기가 미안해서일 것이다)

둘째, 음식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내 기억으론 아마 서울의 음식점보다 더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셋째, 무지하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종업원들이 불친절하다. 아예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도 없었다. 나중엔 계산하고 나가면서 라이터 하나 달라고 했더니만 돈을 주고 사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같이 마냥 재미있고 좋아서 오는 한국사람, 북한사람, 조선족, 한족들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찾는 이유가 뭘까? 나야 지나가는 객이고 호기심에서 왔다고 치고 딴 사람들은 왜 찾을까?

 그 떄 집어 온 유경식당의 명함이다. 잘 보면 '중조합자기업'이라는 게 보인다.  이게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니 당시엔 참 신기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토요일 오후 식객 5권을 다 보고 난 안해가 갑자기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다. 식객에 나온 의정부의 오뎅식당에 가자는 것이다. 사실 난 요즘 한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돼지고기도 못 먹고 라면도 먹지 못한다. 난 먹지도 못하는데 나중에 가고 다른 데 가자고 약간의 반항을 해 보았지만,

“그럼 자긴 김치만 먹으면 되잖아!”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일단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확인하느라 법석을 떨고(참고로 말하면 난 지독한 길치이다.), 전화를 해서 오늘 영업을 하는 지 확인하였다. 하지만 혹시나 하고 네비게이션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니 떡하니 오뎅식당이 나오는 것이었다. 참 좋은 세상이로고. 난 별로 미식가가 아니어서 이렇게 일부러 멀리까지 뭘 먹으러 잘 찾아가지 않는데 식객을 보고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다. 43번 구도를 타고 한참을 가서 겨우 도착하여 식당 앞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갔다. 

들어가니 조그만 식당에 근무하는 할머니만 7~8명 정도 있었고 몇군데 빈자리가 있었다. 주문하면서 “라면은 넣지 말고요.” 그랬더니 “라면 공짜로 주는 거 아니야. 돈 받고 파는 거야.” 라고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부대찌게가 나오고 육수를 붇고 뚜껑을 덮고 한참을 있으려니까 끓는 듯해서 뚜껑을 열었더니 바로 쏟아지는 볼맨 소리.

“내가 열어라 할 때까지 뚜껑 열지 말라니까!”

“아, 예” 하면서도 기분이 좀 나빠지기 시작했다. 미리 알려 주던지 소리를 지르지 말던지, 내 돈 내고 먹으면서 마치 얻어먹는 기분이 들게 하다니. 내가 김치만 건져 먹다보니 김치가 모자라 좀 더 달라고 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을 했음에도 최고로 불친절하게 가져다주었다. 김치를 더 넣고 나니 육수가 부족했다. 안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3번씩이나 “여기, 육수 좀 더 주세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참다못한 내가 4번을 더 이야기하니 그때야 육수를 가져다주면서, 김치 넣고 육수 붓고 어쩌구 저쩌구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참 나 먹기 싫으면 가란 식이었다. 그래도 난 안해에게 “이번엔 내가 제대로 맛을 못 봤으니 다음에 또 오자. 맛있지.” 이러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아가씨들 4명이 있었는데 찌개가 끓는데 불을 줄이지 않았다고 ‘짠내’가 난다고 난리를 친다. 아가씨들도 뭔가 무척 황당한 표정이다.


계산을 하려고 나와 보니 아예 신용카드 단말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리만큼 파는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식당, 그래도 자리가 없어 기다려서 먹어야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는 사실 오뎅식당의 부대찌개의 제 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다시 오지 말자는 안해의 말이 아니라도 다시는 찾지 않을 거다. 거창한 서비스는 아니더라도 먹는 순간만큼은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벽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사진만큼이나 손님들이 알아서 많이들 찾아오니까 음식맛만 45년전이 아니라 서비스마저도 45년 전이다.  그런데 왜 손님이 많을까? 맛이 정말 좋은가? 아마도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좋아 보여서 그런가? 에이 모르겠다.

 

아무튼 불친절한 식당은 싫어!


원래는 오뎅식당에 다녀와서 기분 좋은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원래의 의도와는 빗나가 버렸다. 아마 우리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들이 가시면 좋을 식당일게다.  하지만 나는 다시는 안 간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은  <오! 한강> 이후에 처음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빼곤 처음으로 산 만화이고 12권까지 전부 주문을 했으니 마음에 들긴 들었나 보다. 허영만 화백의 장인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 이건 페이퍼에 올려야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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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5-1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멀리까지 일부러 찾아갔는데 참 아쉽네요. 저번에 성공했으면 '식객'에 나온 식당들 쭉 순회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흥이 깨져 버려서.

저도 만화를 보기는 많이 했지만 제 돈 주고 사 보기는 처음입니다. 저에게도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나 봅니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