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 솔출판사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겨울 방학 전이다. 수능 마치고 좀 한가롭던 시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읽어보리라 굳게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정민 선생님의 한시미학산책을 골랐다.

책은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껍고 하드커버로 싸인 학술적인 책으로 보이지만, 구성은 말랑말랑하고 내가 기대했던대로 정민 선생님의 말투는 '~~~ 한시 이야기'와 유사하게 편안했다. 물론 내용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단은 이 두꺼운 책이 스물 네개의 챕터로 잘 나눠져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하루 한 편을 읽을 셈이었지만, 스터디 준비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대여섯 편을 읽어대기도 했고, 어떤 글은 한 편으로 며칠을 끌기도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탓이지, 책의 탓은 아니다.

나는 책을 읽고 잘 깐다. 좋은 말로 하면 비판적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하고 감정에 얽매여 디립다 욕을 퍼붓기 일쑤다.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텍스트를 충실히 읽지 않고 헐뜯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인문학 서적 중에서 읽다보면 짜증 나는 부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펴내는 책들이다. 정보의 바다에 떠다니는 몇 조각의 부유물들을 책으로 엮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 책이랍시고 팔아댄다. 정말 짜증난다. 내가 잘 까는 또 한 부류는 해체주의 소설이나 시집이다. 기존의 이야기 틀을 해체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말장난이 심하거나, 글재주만 믿고 까부는 축이 많다. 감동을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나 깨우침을 주지도 않는데, 잘 팔린다니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욕이 나온다. 나는 까고 욕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네.'하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민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암의 <답창애2>에 나오는 '눈 뜬 장님' 이야기를 빌려서, 새로운 세상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나침반의 하나다. 이미 읽었던 정민 선생의 책 중에서 중복된 것도 많다. <~~~ 한시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책은 그야 말로 한시 입문이라 할 만하다. 나는 한시에 관심이 많아서 전에도 몇 권의 책을 보았지만, 학문적으로 고집있는 사람들의 책들이라 내 수준에 과한 것들이었다. 정민 선생님 덕분에 한 겨울 고전의 정수, 한시를 포식할 수 있었다. 읽고난 지금도 <다시 읽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서 수업 시간에 활용하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만, 한 번 지나온 길을 다시 가지 않는 '한붓 그리기'와도 같은 내 독서 습관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문학은 흉내가 아니다.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자기만의 진리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窮卽變, 變卽通, 通卽可久>라고 했다.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갈 것이라고... 새 시대가 왔지만 예전의 학문은 변함이 없어 궁해진다. 그러면 변해야 한다. 변해서 통할 길을 찾고, 통하면 오래간다. 그러나 그저 막무가내로 변해서는 아니 된다. 오래갈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정표>가 이 책이 될 수도 있다.

가끔 내가 적어 둔 리뷰를 돌아볼 때가 있다. 좋은 구절을 적어뒀다가 찾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감각적 직설>에 치우침이 많은 것을 본다. '詩思의 온유 돈후를 중시하라. 감각적 직설 보다는 에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온건한 말이 더 깊고,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는 말은 뼛속을 에인다. '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 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 넘친다'고 한 것은 남의 글을 읽을 때,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혜안 없이 그저 남의 눈을 놀래키는 수사적 기교에 탐닉하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나를 꾸짖는 말이 아닌가 해서 심장이 덜컹거릴 따름이다.

이 책은 시의 미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시의 표현, 시 창작을 둘러싼 이야기들, 시가 해체되는 과정의 참요, 잡시, 문자유희 등도 다루고, 선, 산수, 사랑, 역사 등 주제에 따른 시들도 다루고 있다. 스물 네 장으로 나눈 만큼, 분류의 기준은 뚜렷하지 않으나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을 골고루 영양섭취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한자를 어느 정도 알면 한시 읽는 맛을 더할 수 있겠고, 특히 국문학과 학생이나 문학 전공자라면 한자 공부삼아 정도할만한 책이다. 일반 교양인들도 한시를 대충 읽는다면 읽어볼 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1969년에 국민 1인당 5편의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번창하던 영화 산업이 1970년에는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으니...  내가 어릴 때는 M, T, K의 세 채널이 있었고 프로그램도 거의 외우고 있었지만, 요즘은 채널 개수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영향력은 양적 팽창이 늘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발전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요즘은 케이블 티비를 통해 재방송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같은 방송을 하루에도 몇 번 만날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앞에서 선생하려면 <웃찾사>, <개콘>, <폭소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나 없으나 개그 프로는 가능한 한 보는 편인데, '그런거야', '희한하네', '생뚱맞죠', '그때그때 달라요', '오, 베이베', '남녀본색', '사장님 나빠요', '안어벙에게 빠져 봅시다, 마데 전자', '봉숭아 학당의 다중이, 까잇거 경비원' 등의 말들이 요즘 유행이다. 어떤 프로그램에도 이런 말들은 서로 패러디 되고 있다. 한두개라야 쉽게 외울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많아서 어렵기도 하다.

한 때, <~~ 시리즈>로 나가던 개그들이 그야말로 다원화 되어 종합 선물 세트가 된 셈인데, 간혹은 비판의 힘이 강한 코너도 있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이거나 국어 사용을 해치는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물론 개그가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난 적어도 매번 기본 컨셉은 같고 말장난만 바꿔대는 3,6,9나 봉숭아학당 같은 코너는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코너라면 블랑카 같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언어 유희>로서의 한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득이었다. 개그가 현상적인 언어유희를 뛰어넘어, 생각의 깊이나 감각의 폭, 경험의 넓이나 역사의 부피를 소화할 수 있도록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공시적, 통시적 차원을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에서도 결국 <시는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인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인가> 하는 문학의 선악설까지 다루게 되지만, 시를 짓고 감상하는  과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감응해서 설계하고 실현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왜 다시 한시인가. 정민 선생이 가진 콘텐츠가 한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시라는 특수한 표현 매체를 통한 전달의 특이성 때문에 <특이한 전달의 과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용가치를 상실해 가는 한문학의 한 부분의 연구를 통해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매체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라서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한시이지만,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가시 덤불 속에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어 막힌 길을 새로 뚫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한 정민 선생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한 겨우내 방구석에 틀어박혔지만, 선경을 바라보고, 호쾌한 장부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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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번역 문제에 관한 논의의 총정리판..
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1960년대와 70년대에 독일어 번역가로 활약한 K 아무개라는 양반이 있다. 당시 나온 각종 세계문학전집이며 문고판에는 으레 이 양반이 번역한 독일어 책이 한두 권씩은 들어있을 정도였으니,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번역가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양반의 약력을 보면 어디 교수나 강사는 아니고, 단지 대학에서 독일어과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다. 단지 학부 4년간의 실력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책들을 줄줄이 번역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굳이 학계로 계속 나아가지 않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서서히 재평가되고 있는 "전문번역가"의 선구자로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던 차에, 몇 년 전에 우연히 다른 독문학계의 원로 학자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원로 학자를 만나기 전에 혹시나 참고가 될까 해서 집에서 그분이 이전에 저술하거나 번역한 책을 뒤적여 보다가, 우연히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이 번역한 책에 그 원로 학자께서 추천사를 써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K 아무개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물었다. 학부 4년 동안에 배운 실력으로 그렇게 많은 책을 번역할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계속 학계에 남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 질문에 그 원로 학자께서는 뭔가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윽고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즉 K 아무개는 독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2학년 때인가 중퇴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해 희곡인지 소설인지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후에는 연극 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작품이 누군가의 것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연극계 및 문단에서는 완전히 매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독일어 작품의 번역인데, 사실 독문과 2학년 중퇴 실력으로는 번역이 제대로 나올 수 없어서, 그의 책은 대부분 오역투성이다. 하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글빨"을 지닌 사람이다보니, 독일어 문장을 정확히 옮기진 못해도 중요한 단어만 가지고 문장을 그럴 듯하게 "창작"해낼 수는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때나마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어 전공자의 눈으로 살펴보면 그 K 아무개의 번역서는 오역이 많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기막혔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가끔 헌책방에서 그 K 아무개의 번역서가 있으면, 원저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번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라도 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운 좋게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그렇다면 과연 내가 읽은 "번역서"는 도대체 무엇일까? 독일어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번역가로 명성을 날린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의 일화야말로, 어느 나보코프 전공자가 말한 "나보코프의 작품은 우리말로 번역될 수 없다"는 단언과 아울러 나로 하여금 "과연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절망적으로 생각해보게 만든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 몇 년간 번역 문제는 기이할 정도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윤기, 안정효, 김석희, 김화영, 공경희 등 이른바 "스타 번역가"들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네티즌과 독자를 중심으로 기존 번역서의 "오역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물론 앞의 이른바 "스타 번역가"들도 이런 "오역 문제"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바로 이윤기였다. 즉 "스타 번역가"라는 명성을 활용해 자기 평생의 꿈인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이루는 기이한 역전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른바 신화 전문가를 자처하던 그가 번역한 유명 작품의 오역이 연달아 발견되며 "오역 제조기"라는 오명을 얻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 같은 경우에는 워낙 오역이 많고, 한편으로는 중역과 대리번역의 혐의도 없지 않지만, 이러한 문제는 번역자 이윤기가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도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척 하며 "개역판"을 연달아 내놓음으로써 채찍 대신 꽃다발을, 비난 대신 박수를 받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후에 강대진이나 이재호 같은 이른바 고전학이나 영문학 전공자들의 "오역 시비"는 노골적으로 이윤기라는 한 인물을 겨냥하기도 했지만, 워낙 이윤기라는 인물의 "스타성"이 강한 까닭에 그의 독보적인 위치는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성싶다. 심지어 그를 숭배한 나머지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는 열성팬도 있는 세상이니, 이건 뭐, 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 번역문학계의 황우석이라 해도 될 정도의 스타가 아닌가.

이후에 이런저런 기고문과 단행본의 형태로 나온 유사한 종류의 책들이 좀 "질릴" 즈음 나온 <번역은 반역인가>는 지금까지 제기된 번역 관련 문제의 총정리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서양 고전을 여러 권 번역한 번역가인 동시에 현직 교수로서, 우리나라의 번역 문화 전반의 문제점을 꼼꼼하게 짚어본 점이 특징이다. 단순히 번역가들의 무능과 출판사들의 장삿속을 탓하기보다는, 번역가 중에도 두 가지 종류 (이른바 "교수"로 대표되는 권력자형 번역가와 "전문번역가"로 대표되는 배고픈 번역가) 가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출판사와 편집자, 나아가 독자와 출판시장 자체의 한계에 대해서도 배려한 점이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이라 생각된다. 하긴 이런저런 책이 "오역"이다, 혹은 "틀렸다"고 지적하긴 쉬운 일이다. 다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제일 뿐이다. 지난 반세기 가까이 뒤틀리고 왜곡된 번역 문화가 몇 사람의 문제제기와 몇 편의 글이나 몇 권의 책으로 고쳐지리라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다만 지금 2006년의 번역문화가 그래도 1986년보다는 좀 더 낫고, 앞으로 2026년의 번역문화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으리라는 기대를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번역문화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번역자가 교수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더 대우받는 풍조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가능하지가 않으니 문제다. 사실 번역은 늘 창작보다 천대받아 왔고, 이는 장차 수십, 수백 년 후는 어떨지 몰라도 향후 10년, 20년 내에는 결코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번역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외국어보다는 오히려 문장력과 일반상식이다. 그리고 분명한 오역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반대로 한 문장이나 용어를 "선택"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번역자의 재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역을 지적하고, 또 그런 지적을 수용하는 문제는 결코 저자가 바라듯 매끄럽게 이루어질 수가 없다. 번역이건 창작이건 간에, 문장이나 사실에 대한 오역이나 오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오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다만 번역의 경우에는 어떤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여차 하다가는 번역자의 실력을 깎아내림으로써 지적자의 실력을 도리어 드높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게 문제다. (물론 수준 이하의 번역자가 있어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러니 여차 하다간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실력이 비등비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외국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뉘앙스 차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종종 시 같은 문학 작품의 번역에 있어서는 사실 "정확성"보다는 그 "미묘성(뉘앙스)"의 차이 때문에 오역 시비가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세상에 과연 "완벽한" 번역이 있을까?

정말 재수 없고 운이 없어서 "엉터리 번역자"를 만나 사장되는 좋은 외국 저술도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게 사장되어 봤자 결국 5년, 아니면 10년 뒤에는 다시 "좋은 번역자"와 "좋은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제아무리 저작권이 존재하는 책이라도 보통 출판 계약이 5년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너무 단기적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저자가 새로이 번역한 <의상철학>과 <영웅숭배론>도 일찍이 1960년대에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일어중역본일 수도 있고, 발췌번역본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엄청난 오역이 곳곳에 숨어있는 엉터리 번역본일 수도 있었지만,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 한 가지 번역본만 가지고도 "충분했다"는 점도 사실이 아닌가? 솔직히 전공자인 저자가 제아무리 강조하는 버크와 칼라일이라 하지만, 과연 전공자를 제외한 일반 독자 중에 지금 와서 갑자기 버크와 칼라일을 굳이 읽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필요하다면 헌책방을 뒤져서라도 1960년대 번역본을 참고할 수 있으니 그만이다. 반대로 저자가 그렇게 애써 번역한 <아레오파기티카>나 <영웅숭배론>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반세기, 혹은 한세기 뒤에는 또 그보다 더 나은 번역본, 혹은 못한 오역본이 나올 수 있다. 멀리 바라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흔히 서양 번역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예로 드는 제임스 레그나 아서 웨일리의 중국 및 일본 고전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지만, 그 외에도 이후의 번역가들에 의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중국 및 일본 고전의 영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레그나 웨일리는 최초의, 혹은 최초의 학술적 가치가 있는 번역이라는 의의를 지닐지는 모르지만, 그 빛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과연 지금의 독자 가운데 1960년대에 나온 을유문화사나 정음사 판 도스토예프스키를 굳이 찾아 읽을 사람이 있을까? 그것 밖에는 번역본이 없는 경우(가령 그릴파르처의 단편이랄지)라면 굳이 헌책방을 뒤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미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고 또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는 <위대한 개츠비>나 <돈 키호테>를 1960년대 판본으로 읽는 독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물론 김붕구의 앙드레 말로 번역처럼 수십 년이 넘도록 통용되는 명 번역본도 없진 않지만, 최소한 맞춤법이나 이런저런 손질이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른바 번역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번역서 불신주의"와 "원서 제일주의"를 부추기는 면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이 번역에 관심을 갖고, 오역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외국어 구사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비교적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IMF 직후에 해외에 유학 나가 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내로 역류해 들어오는 바람에 "발음 좋은 유학생 출신"들이 출판계로 대거 유입되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물론 상당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어디론가 흘러나갔을 테지만.) 재차 말하지만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반응을 통해 차차 나아질 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번역서의 오역을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툭하면 나오는 "번역서는 모두 엉터리"라든지, "차라리 원서를 보겠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곤란하다. 내 경우에도 굳이 원서를 보자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오히려 번역서를 선호하는 편이다. 번역이 잘못된 곳이 있으면 지적하고, 오타가 나오면 한숨을 한 번 쉬면 그만이다. 영 읽을 수가 없는 책이면 제대로 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정 급하면 그때 가서 원서를 읽으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순수이성비판>의 "완전한 번역본"이 없다고 해서, 그로 인해 캑 죽어버릴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답답하게 생각하다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수명을 재촉할 수도 있겠지만.) 오역을 지적하고 또 나무라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번역서 개량주의"와 "원서 번역주의"를 좀 제창해 보라는 거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번역도 역시 "해 본 사람"이 번역의 어려움을 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하면 할수록 힘든 일"이 바로 번역이란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독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두루두루 읽히며 즉각적으로 "검증"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이른바 "성당과 시장" 식으로, 번역에 있어서도 어떤 공동작업이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즉 한 사람이 꼬박 평생에 걸쳐, 혹은 3, 4대에 걸치면서까지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성당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제각기 한마디씩 주워섬김으로써 순식간에 문제가 해결되는 시장의 경우처럼, 어떤 작품의 번역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고 다양한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번역이 검증되고 오역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출판사들도 단순히 내부 및 외부 전문인력 말고 이른바 "고급독자" 가운데 그런 "검토위원"을 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특히 번역서 중에서도 꼼꼼한 작업이 필수적인 학술서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에게 가급적 많이 번역원고를 읽게 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우리나라 특유의 학연이나 학벌, 혹은 파벌 문제와, 또한 학문 전공자 특유의 아집으로 인해 그런 일이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디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인지, 비교적 쉬운 내용이면서도 기대와는 달리 어딘가 좀 더 깊은 논의나 통찰이 약간은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서두에 늘어놓은 "번역의 역사"는 이미 다른 책이나 매체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이니, 차라리 훨씬 짧게 줄이거나 없애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번역 문제를 다룬 책이 앞으로도 많이 나올 텐데, 구태여 매번 "번역의 정의와 역사"라는 장을 위해 책의 일부분을 할애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또 일반 독자가 아닌 전공자들의 문제는 결코 헌책방을 잘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일단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을 찾아보고, 거기에도 없으면 그냥 원서를 찾아 읽고 나서 "한국의 빈약한 번역문화"를 개탄하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자들이야말로 번역본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를 오히려 일반독자보다 더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일어중역본이건 발췌번역본이건 대거오역본이건 간에 어떻게든 나와 있는 책도 없지 않다. 가령 저자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서울의 어느 명문대 정치학과 교수가 번역한 수준 미달의 번역서가 한 권 나와 있을 뿐이다."(28쪽)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내가 가진 <리바이어던> 번역본은 1988년에 박영문고로 나온 네 권짜리로 "완역본"임을 옮긴이가 서문에서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앞서 말한 "수준 미달의 번역서"는 아마도 이전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1, 2부의 부분역을 말하는 듯하다.) 박영문고 판이 중역본인지, 발췌본인지, 오역본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나온 책이 결코 "한 권"은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저자가 이른바 "복거일의 영어실력"(74쪽)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김현의 증언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글이 있었다. 복거일 자신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문장인데, 나는 이 글을 어느 "복거일 팬"의 글에서 "선생은 무역회사 시절에 쓴 영어편지를 보고 외국인들로부터 '아름다운 영어 편지를 쓰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들을 정도로 탁월했다"고 쓴 것으로 처음 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산문집에 실린 다음 글에서 전후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나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 1970년대 초엽, 나는 꽤 큰 회사의 무역부에서 일하면서 장사 편지를 많이 썼다.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는 부실한 기업이어서 물건 값을 제때에 치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나는 거래처들에 그런 사정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 써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빚은 졌지만, 그래서 상대의 너그러움을 바라는 편지였지만, 품위는 지키고 싶었다. 어려움은 바로 거기 있었다. 상대가 너그러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적어도 편지를 읽고서 기분이 더 나빠지지 않을 만큼, 공손하면서도 비굴함이 느껴지지 않는 편지가 어찌 쉽게 씌어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영어로 쓰는 글이었다. 어떤 날은 그런 편지 한 통을 쓰고 나면 맥이 풀리고 머리가 무거워서 더 일하기 힘들었다. (...)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덕분에 글공부는 잘한 셈이다. 작가로서의 산문수업과는 거리가 먼 공부였지만,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다. 조화시키기 어려운 특질들이 균형을 이룬 글을 쓰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도 훌륭한 수업일 터이다. 마침내 회사는 청산 절차를 밟았다. 몇 해 뒤, 다른 사무실에서 전에 우리 회사의 거래처에서 일했던 선배를 만났다. 나는 그 선배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뜸 "아, 복형, 아름다운 비즈니스 레터를 쓰는 사람" 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복거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문학과지성사, 1996, 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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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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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을 향한 광기는 살인으로까지도 이어진다. 김동인의 '광화사'를 읽으며 그것도 예술이라면 예술이고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이겠지 싶어 몸서리쳤던 어느 날이 있었다. 보편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현실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술은 미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법,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한 번 뿐인 인생을 통째로 무언가에 바칠 수 있는 열정이 내게도 허락된다면... 저마다 어린 시절 지녔던 꿈은 달랐겠지만, 정작 어른이 되었을 때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한 것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이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듯하다. 현실적인 것에 목 매달고, 정신을 팔아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우리에게 더 이상 꿈꾸지 말길 요구할 뿐이다. 꿈꾸는 이는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지상의 빛이 만들어내는 모든 색을 자신의 캔버스에 담았던 한 인물을 보면서 그가 품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갔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경제난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자신의 귀를 잘랐던 고흐, 그가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넓었다. 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에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그림을 위한 경제력은 뒷받침되지 않은 현실에 그는 괴로워했다. 그런 그에게 동생 테오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기편이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그의 그림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봐 준 동생이라는 존재는 외따로 떨어져 세상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사람 냄새를 풍기는 몇 안 되는 대상이었다. 자기 안에 담아놓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혔다. 새로운 시도와 좌절, 잊을만 하면 고개를 쳐드는 가난의 힘 그리고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고흐는 비굴함과 자책감으로 채울 수도 있었을 그 공간을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메웠다. 훗날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의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지금은 비참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정해진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강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창의성이라는 날개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것이 교육이라면, 그의 눈은 교육에 의한 인위적인 세련됨을 알지 못했다. 온몸 가득 흙 냄새로 물든 농부의 모습이야말로 농부다운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대상들에 그는 애정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향기로운 꽃을 향해 저도 모르게 날개짓을 하는 나비처럼, 흙먼지 날리는 어딘가에 그는 캔버스를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대상으로부터 정지된 화상을 얻어내기 위해 그의 손은 분주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줄 동생의 편지와, 그로 하여금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해줄 경제적 지원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길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간은 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하는 1세기가 넘는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하나의 편지를 그리고 하나의 그림을 보내놓고는 느끼는 허전함을 또 다른 그림을 그리며 삭혔던 그에게서 나는 광기를 느꼈다. 갚을 수 없을 경제적 도움을 대신해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던 그의 목소리,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해쳐야 했던 그의 삶 자체가 무시무시한 예술처럼 느껴졌다. 그 예술의 끝은 죽음이었고, 죽음은 그를 완성시켰다. 그의 삶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성공이었고, 예술을 향한 자기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 희생은 수많은 그림을 남겼고, 그 그림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말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미칠 수 있는 용기를 그의 삶으로부터 발견했다. 그와 같이 사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그처럼 기억되길 꿈꾸는 나에겐 어떤 삶이 허락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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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깊이와 넓이를 담아낸 충실한 독일사 개설서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1
메리 풀브룩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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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전은 영어로 쓰면 딕셔너리(Dictionary)인데도, 가끔 연세있는 분들은 사전 가져오라는 말 대신 "콘사이스(concise) 좀 가져오라"고 말하곤 한다. "Concise Dictionary"란 말이 입에 배인 탓일 게다. 메리 풀브룩의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는 저명한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의 첫 번째 시리즈인데, 원제는 "A CONCISE HISTORY OF GERMANY"이다. 어떤 역사책이든, 모든 역사저술은 "concise"의 운명을 갖는다. 이 말 자체에 "자르다"의 뜻도 있으며, 간결한, 간명한의 의미가 있으니 더욱더 그러하다. 그래서 저자 메리 풀브룩은 사전에 이런 변명 아닌 변명으로 머리말을 시작한다. "이런 종류의 책은 쓰기보다 비판하기가 훨씬 쉬운 법이다. 고도로 복잡한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얇은 책 한 권에 짜넣으려는 시도는 수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항의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의 염려대로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그것을 요약한다는 것은 종종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뜻일 수 있다. 여기 한 권의 두툼한 책이 있고, 그것을 100명의 학생에게 요약해 레포트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어주었다고 치자. 같은 책을 읽고 요약하는 것이므로 분명 비슷한 내용으로 가득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하라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설서를 쓰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네 교육 커리큘럼처럼 대학 학부에서 교수의 저서를 주요 실라부스로 삼을 일도 없다면 더욱 더 필요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메리 풀브룩은 머리말에서 자신이 비판받기 더 쉬운 일을 어째서 다시 매달렸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부분적으로 역사 서술의 본성에 속한다. 역사 서술은 만인이 동의하는 이야기를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우리에게 전해준 자료 더미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역사서술이란 무릇 역사 전개에서 일부는 선택하고 또다른 일부는 생략하는 무자비한 결정과정이다."

종종 교수들은 학생들의 레포트를 제출받아 채점한 뒤, 남의 글을 베끼더라도 좀 창의적으로 베끼라는 충고를 하곤 한다. IT강국, 첨단을 달리다보니 학문적으로 제법 중요한 개념을 인터넷 검색 엔진에 넣고 검색해보면 가장 앞서 검색 목록에 오르는 것은 리포트 대행 서비스 회사의 사이트들이다. 사용료 몇 백원, 몇 천원으로 몇 만원을 들여 책을 구입하는 비용적 수고는 물론, 그 책들을 일일이 읽고 다시금 요약하고 통합해서 레포트를 제출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으니 요즘 같은 세태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공부란 스스로 수고로움을 일일이 행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 약간 밖으로 샜는데, 저자 메리 풀브룩의 염려는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심할지 모를 독자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고민이기도 하다. 가끔 한 가지 테마를 놓고 여러 종의 책들을 일괄 구입하다보면(물론 각각의 책들마다 특색은 있지만) 간혹 어떤 경우에는 거의 비슷한 난이도, 비슷한 언급으로 구성되어 다른 책이지만 구태여 두 권 세 권씩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책들이 있다. 연구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특히 한국사 개설서의 경우가 그런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도 물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독일사에 관해 다른 개설서를 구입했다고 해서 이 책을 또 읽는 일이 불필요하다거나 동어반복적이라고 느낄 필요는 상대적으로 적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다른 개설서들에서는 중요하게 취급할(현재적 관점이 아무리 큰 변화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 역사 속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사건들은 대동소이한 편이다) 사건들을 과감하게 누락하고 있지도 않다. 중요한 사건들은 400쪽 이내의 분량으로도 거의 대부분 수록하고 있다. 옮긴이의 후기도 읽을 만하다. 옮긴이 김학이 선생은 독일사를, 독일 사람도 아니고 굳이 영국의 중견 역사가가 저술한 것을 번역하고, 다시 그것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저자 메리 풀브룩이 독일 1천년 역사에 대한 개설서를 쓴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 자문자답하듯 옮긴이 역시 자문자답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 역사학계가 아직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독일사 전반을 서술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굳이 독일인이 아닌 영국인의 번역을 옮긴 것은 독일역사가에게 드리워진 나치즘의 강박이나, 프랑스 역사가들이 독일에 대해 지닌 강박적 피해의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의 역사가가 지닌 장점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이 부분에는 나역시 동의한다) 영국 역사학계의 학문적 우수성 때문이다.

영국 역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세례를 받았지만 다른 유럽 지역의 학계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 코뮤니즘의 대세를 이루었던 스탈린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발전해왔다. E.H.카, E.P.톰슨 등은 물론 에릭 홉스봄 등 영국 역사학계는 영국 문학의 전통 속에서 버밍엄 현대문화연구센터와 일정하게 상호연관되는 학문적 전통을 형성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도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독특한 흐름을 유지해왔다. 그러한 전통 속에서 메리 풀브룩은 독일의 역사를 서구의 다른 국가들, 특히 영국과 비교해 비정상 발전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보다는 독일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다시 말해 독일의 역사가 모든 방향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는 형태의 역사가 아니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영국 역사학계의 모습은 최근 일본이나 우리의 역사학계에서 자학사관이니, 수정주의 사관이니 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살펴볼 때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설서라는 의미 자체에 충실하면서도, 독일사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을 담아낸다는 두 마리 토끼를 훌륭하게 잡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다소 아쉬운 점은 역시 저자 자신이 고민했던 바와 같이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바를 뒷받침할 만한 풍부한 예증을 담아내기에 책의 부피가 너무 얇다는 것인데, 이런 부분들은 다른 책들로 보완해가면 좋을 것이다. 독일사에 대한 완전 초심자를 제외한 분들에겐 훌륭한 입문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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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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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번역의 문제점이 발견되곤 한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자주’ 목격하곤 한다. 창작에 가까운 번역, 뜻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번역은 낯설지 않다. 오죽하면 ‘번역의 힘’이라는 냉소적인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래서일까? 번역가 박상익의 체험적 보고서 <번역은 반역인가>가 개인의 체험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모두의 이야기로 그 심각성이 남다르게 여겨진다.


번역, 그것은 창작만큼이나 중요하다. 번역이 없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의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기에 번역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박상익은 이 중요한 ‘번역’에 문제가 많단다. 첫 번째 문제는 번역자들의 처지다. 번역은 가치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성상 한 권을 번역하기 위해 몇 배, 혹은 몇 십 배의 책을 참고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번역은 사회에서 ‘쉬운 일’로 취급받는다. 게다가 돈벌이는 어떤가. 생계가 막막할 정도다. 그나마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베스트셀러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문도서의 경우는 그야말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기적적’으로 한달에 한권 번역해도 생계문제가 막막하고 사회에서는 알아주지 않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이라는 건, 그야말로 번역가들을 위한 말일 테다.


하지만 고달픈 환경에도 꿋꿋이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박상익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외부핑계를 대며 ‘못된 짓’하는 번역가들에 대한 일침이 따끔하다. 특히 상아탑에서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학교수들에 대한 비판의 날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일부의 대학교수들이 대학원생들을 일꾼으로 동원한다는 건 자주 언급되는데 번역에서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거리를 받은 대학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준다. 번역해 오라는 것이다. 여럿이 분량을 나눠 번역한 뒤에 모은 번역본을 상상해보자.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번역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박상익은 그것이 엄밀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인정신이 실종된 대로 실종된 번역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번역’을 두고 ‘반역’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에서, 열정을 갖고 뛰어들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말은 고사하고 되레 말리게 되는 이 세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박상익은 그 답은 소박한 것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서 찾는다.


먼저 번역가의 대우 문제를 보자. <번역은 반역인가>는 번역가의 가치를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장인정신으로 1년 내내 번역 일에 매진한 번역가가 힘이 빠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인데 십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인재들이 투입되기는커녕 빠져나오는 상황을 조장하는 세계라면 정부나 사회단체가 나서서 도와줄 필요가 있다. 창작의 세계처럼 말이다.


또한 ‘국가’가 앞장서서 번역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가까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정부 내에 번역국을 두고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서양의 것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변함은 없었는데 이는 국가가 그 중요성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이든 서유럽이든 이슬람 문명이든 간에 그들은 외국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국가의 부흥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안간힘썼다는 걸 생각해보면 새삼 우리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박상익은 밖에서 도움을 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안의 세계’도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독자들과의 피드백이 원활해진 만큼 얼치기 번역가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능력 있는 번역가들이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안과 밖이 함께 개선의지를 보인다면 번역은 온건히 번역이라는 글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이 시대는 번역에 무관심했다. 쉬운 일이라 생각했고, 오역이나 비문이 보이면 ‘번역의 힘’을 내뱉으며 그것을 냉소했다. 그러면서도 번역의 중요성을 두 번, 세 번 언급했다. 번역은 왜 중요한지를 묻고 대답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분명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박상익의 체험에서 얻은 모두의 문제에 시선을 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중요한 것을 왜 하찮게 다루는가, 그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곳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논의가 핵심이 돼야 한다. <번역의 반역인가>의 마지막 문장처럼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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