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번역 문제에 관한 논의의 총정리판..
-
-
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1960년대와 70년대에 독일어 번역가로 활약한 K 아무개라는 양반이 있다. 당시 나온 각종 세계문학전집이며 문고판에는 으레 이 양반이 번역한 독일어 책이 한두 권씩은 들어있을 정도였으니,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번역가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양반의 약력을 보면 어디 교수나 강사는 아니고, 단지 대학에서 독일어과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다. 단지 학부 4년간의 실력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책들을 줄줄이 번역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굳이 학계로 계속 나아가지 않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서서히 재평가되고 있는 "전문번역가"의 선구자로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던 차에, 몇 년 전에 우연히 다른 독문학계의 원로 학자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원로 학자를 만나기 전에 혹시나 참고가 될까 해서 집에서 그분이 이전에 저술하거나 번역한 책을 뒤적여 보다가, 우연히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이 번역한 책에 그 원로 학자께서 추천사를 써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K 아무개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물었다. 학부 4년 동안에 배운 실력으로 그렇게 많은 책을 번역할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계속 학계에 남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 질문에 그 원로 학자께서는 뭔가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윽고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즉 K 아무개는 독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2학년 때인가 중퇴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해 희곡인지 소설인지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이후에는 연극 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작품이 누군가의 것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연극계 및 문단에서는 완전히 매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독일어 작품의 번역인데, 사실 독문과 2학년 중퇴 실력으로는 번역이 제대로 나올 수 없어서, 그의 책은 대부분 오역투성이다. 하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글빨"을 지닌 사람이다보니, 독일어 문장을 정확히 옮기진 못해도 중요한 단어만 가지고 문장을 그럴 듯하게 "창작"해낼 수는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때나마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어 전공자의 눈으로 살펴보면 그 K 아무개의 번역서는 오역이 많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기막혔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가끔 헌책방에서 그 K 아무개의 번역서가 있으면, 원저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번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라도 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운 좋게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그렇다면 과연 내가 읽은 "번역서"는 도대체 무엇일까? 독일어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번역가로 명성을 날린 그 K 아무개라는 양반의 일화야말로, 어느 나보코프 전공자가 말한 "나보코프의 작품은 우리말로 번역될 수 없다"는 단언과 아울러 나로 하여금 "과연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절망적으로 생각해보게 만든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 몇 년간 번역 문제는 기이할 정도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윤기, 안정효, 김석희, 김화영, 공경희 등 이른바 "스타 번역가"들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네티즌과 독자를 중심으로 기존 번역서의 "오역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물론 앞의 이른바 "스타 번역가"들도 이런 "오역 문제"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바로 이윤기였다. 즉 "스타 번역가"라는 명성을 활용해 자기 평생의 꿈인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이루는 기이한 역전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른바 신화 전문가를 자처하던 그가 번역한 유명 작품의 오역이 연달아 발견되며 "오역 제조기"라는 오명을 얻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 같은 경우에는 워낙 오역이 많고, 한편으로는 중역과 대리번역의 혐의도 없지 않지만, 이러한 문제는 번역자 이윤기가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도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척 하며 "개역판"을 연달아 내놓음으로써 채찍 대신 꽃다발을, 비난 대신 박수를 받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후에 강대진이나 이재호 같은 이른바 고전학이나 영문학 전공자들의 "오역 시비"는 노골적으로 이윤기라는 한 인물을 겨냥하기도 했지만, 워낙 이윤기라는 인물의 "스타성"이 강한 까닭에 그의 독보적인 위치는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성싶다. 심지어 그를 숭배한 나머지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는 열성팬도 있는 세상이니, 이건 뭐, 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 번역문학계의 황우석이라 해도 될 정도의 스타가 아닌가.
이후에 이런저런 기고문과 단행본의 형태로 나온 유사한 종류의 책들이 좀 "질릴" 즈음 나온 <번역은 반역인가>는 지금까지 제기된 번역 관련 문제의 총정리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서양 고전을 여러 권 번역한 번역가인 동시에 현직 교수로서, 우리나라의 번역 문화 전반의 문제점을 꼼꼼하게 짚어본 점이 특징이다. 단순히 번역가들의 무능과 출판사들의 장삿속을 탓하기보다는, 번역가 중에도 두 가지 종류 (이른바 "교수"로 대표되는 권력자형 번역가와 "전문번역가"로 대표되는 배고픈 번역가) 가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출판사와 편집자, 나아가 독자와 출판시장 자체의 한계에 대해서도 배려한 점이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이라 생각된다. 하긴 이런저런 책이 "오역"이다, 혹은 "틀렸다"고 지적하긴 쉬운 일이다. 다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제일 뿐이다. 지난 반세기 가까이 뒤틀리고 왜곡된 번역 문화가 몇 사람의 문제제기와 몇 편의 글이나 몇 권의 책으로 고쳐지리라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다만 지금 2006년의 번역문화가 그래도 1986년보다는 좀 더 낫고, 앞으로 2026년의 번역문화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으리라는 기대를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번역문화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번역자가 교수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더 대우받는 풍조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가능하지가 않으니 문제다. 사실 번역은 늘 창작보다 천대받아 왔고, 이는 장차 수십, 수백 년 후는 어떨지 몰라도 향후 10년, 20년 내에는 결코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번역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외국어보다는 오히려 문장력과 일반상식이다. 그리고 분명한 오역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반대로 한 문장이나 용어를 "선택"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번역자의 재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역을 지적하고, 또 그런 지적을 수용하는 문제는 결코 저자가 바라듯 매끄럽게 이루어질 수가 없다. 번역이건 창작이건 간에, 문장이나 사실에 대한 오역이나 오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오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다만 번역의 경우에는 어떤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여차 하다가는 번역자의 실력을 깎아내림으로써 지적자의 실력을 도리어 드높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게 문제다. (물론 수준 이하의 번역자가 있어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러니 여차 하다간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실력이 비등비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외국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뉘앙스 차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종종 시 같은 문학 작품의 번역에 있어서는 사실 "정확성"보다는 그 "미묘성(뉘앙스)"의 차이 때문에 오역 시비가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세상에 과연 "완벽한" 번역이 있을까?
정말 재수 없고 운이 없어서 "엉터리 번역자"를 만나 사장되는 좋은 외국 저술도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게 사장되어 봤자 결국 5년, 아니면 10년 뒤에는 다시 "좋은 번역자"와 "좋은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제아무리 저작권이 존재하는 책이라도 보통 출판 계약이 5년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너무 단기적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저자가 새로이 번역한 <의상철학>과 <영웅숭배론>도 일찍이 1960년대에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일어중역본일 수도 있고, 발췌번역본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엄청난 오역이 곳곳에 숨어있는 엉터리 번역본일 수도 있었지만,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 한 가지 번역본만 가지고도 "충분했다"는 점도 사실이 아닌가? 솔직히 전공자인 저자가 제아무리 강조하는 버크와 칼라일이라 하지만, 과연 전공자를 제외한 일반 독자 중에 지금 와서 갑자기 버크와 칼라일을 굳이 읽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필요하다면 헌책방을 뒤져서라도 1960년대 번역본을 참고할 수 있으니 그만이다. 반대로 저자가 그렇게 애써 번역한 <아레오파기티카>나 <영웅숭배론>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반세기, 혹은 한세기 뒤에는 또 그보다 더 나은 번역본, 혹은 못한 오역본이 나올 수 있다. 멀리 바라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흔히 서양 번역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예로 드는 제임스 레그나 아서 웨일리의 중국 및 일본 고전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지만, 그 외에도 이후의 번역가들에 의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중국 및 일본 고전의 영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레그나 웨일리는 최초의, 혹은 최초의 학술적 가치가 있는 번역이라는 의의를 지닐지는 모르지만, 그 빛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과연 지금의 독자 가운데 1960년대에 나온 을유문화사나 정음사 판 도스토예프스키를 굳이 찾아 읽을 사람이 있을까? 그것 밖에는 번역본이 없는 경우(가령 그릴파르처의 단편이랄지)라면 굳이 헌책방을 뒤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미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고 또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는 <위대한 개츠비>나 <돈 키호테>를 1960년대 판본으로 읽는 독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물론 김붕구의 앙드레 말로 번역처럼 수십 년이 넘도록 통용되는 명 번역본도 없진 않지만, 최소한 맞춤법이나 이런저런 손질이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른바 번역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번역서 불신주의"와 "원서 제일주의"를 부추기는 면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이 번역에 관심을 갖고, 오역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외국어 구사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비교적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IMF 직후에 해외에 유학 나가 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내로 역류해 들어오는 바람에 "발음 좋은 유학생 출신"들이 출판계로 대거 유입되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물론 상당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어디론가 흘러나갔을 테지만.) 재차 말하지만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반응을 통해 차차 나아질 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번역서의 오역을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툭하면 나오는 "번역서는 모두 엉터리"라든지, "차라리 원서를 보겠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곤란하다. 내 경우에도 굳이 원서를 보자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오히려 번역서를 선호하는 편이다. 번역이 잘못된 곳이 있으면 지적하고, 오타가 나오면 한숨을 한 번 쉬면 그만이다. 영 읽을 수가 없는 책이면 제대로 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정 급하면 그때 가서 원서를 읽으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순수이성비판>의 "완전한 번역본"이 없다고 해서, 그로 인해 캑 죽어버릴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답답하게 생각하다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수명을 재촉할 수도 있겠지만.) 오역을 지적하고 또 나무라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번역서 개량주의"와 "원서 번역주의"를 좀 제창해 보라는 거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번역도 역시 "해 본 사람"이 번역의 어려움을 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하면 할수록 힘든 일"이 바로 번역이란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독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두루두루 읽히며 즉각적으로 "검증"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이른바 "성당과 시장" 식으로, 번역에 있어서도 어떤 공동작업이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즉 한 사람이 꼬박 평생에 걸쳐, 혹은 3, 4대에 걸치면서까지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성당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제각기 한마디씩 주워섬김으로써 순식간에 문제가 해결되는 시장의 경우처럼, 어떤 작품의 번역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고 다양한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번역이 검증되고 오역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출판사들도 단순히 내부 및 외부 전문인력 말고 이른바 "고급독자" 가운데 그런 "검토위원"을 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특히 번역서 중에서도 꼼꼼한 작업이 필수적인 학술서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에게 가급적 많이 번역원고를 읽게 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우리나라 특유의 학연이나 학벌, 혹은 파벌 문제와, 또한 학문 전공자 특유의 아집으로 인해 그런 일이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디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인지, 비교적 쉬운 내용이면서도 기대와는 달리 어딘가 좀 더 깊은 논의나 통찰이 약간은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서두에 늘어놓은 "번역의 역사"는 이미 다른 책이나 매체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이니, 차라리 훨씬 짧게 줄이거나 없애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번역 문제를 다룬 책이 앞으로도 많이 나올 텐데, 구태여 매번 "번역의 정의와 역사"라는 장을 위해 책의 일부분을 할애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또 일반 독자가 아닌 전공자들의 문제는 결코 헌책방을 잘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일단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을 찾아보고, 거기에도 없으면 그냥 원서를 찾아 읽고 나서 "한국의 빈약한 번역문화"를 개탄하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자들이야말로 번역본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를 오히려 일반독자보다 더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일어중역본이건 발췌번역본이건 대거오역본이건 간에 어떻게든 나와 있는 책도 없지 않다. 가령 저자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서울의 어느 명문대 정치학과 교수가 번역한 수준 미달의 번역서가 한 권 나와 있을 뿐이다."(28쪽)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내가 가진 <리바이어던> 번역본은 1988년에 박영문고로 나온 네 권짜리로 "완역본"임을 옮긴이가 서문에서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앞서 말한 "수준 미달의 번역서"는 아마도 이전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1, 2부의 부분역을 말하는 듯하다.) 박영문고 판이 중역본인지, 발췌본인지, 오역본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나온 책이 결코 "한 권"은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저자가 이른바 "복거일의 영어실력"(74쪽)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김현의 증언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글이 있었다. 복거일 자신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문장인데, 나는 이 글을 어느 "복거일 팬"의 글에서 "선생은 무역회사 시절에 쓴 영어편지를 보고 외국인들로부터 '아름다운 영어 편지를 쓰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들을 정도로 탁월했다"고 쓴 것으로 처음 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산문집에 실린 다음 글에서 전후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나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 1970년대 초엽, 나는 꽤 큰 회사의 무역부에서 일하면서 장사 편지를 많이 썼다.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는 부실한 기업이어서 물건 값을 제때에 치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나는 거래처들에 그런 사정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 써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빚은 졌지만, 그래서 상대의 너그러움을 바라는 편지였지만, 품위는 지키고 싶었다. 어려움은 바로 거기 있었다. 상대가 너그러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적어도 편지를 읽고서 기분이 더 나빠지지 않을 만큼, 공손하면서도 비굴함이 느껴지지 않는 편지가 어찌 쉽게 씌어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영어로 쓰는 글이었다. 어떤 날은 그런 편지 한 통을 쓰고 나면 맥이 풀리고 머리가 무거워서 더 일하기 힘들었다. (...)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덕분에 글공부는 잘한 셈이다. 작가로서의 산문수업과는 거리가 먼 공부였지만,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다. 조화시키기 어려운 특질들이 균형을 이룬 글을 쓰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도 훌륭한 수업일 터이다. 마침내 회사는 청산 절차를 밟았다. 몇 해 뒤, 다른 사무실에서 전에 우리 회사의 거래처에서 일했던 선배를 만났다. 나는 그 선배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뜸 "아, 복형, 아름다운 비즈니스 레터를 쓰는 사람" 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복거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문학과지성사, 1996, 24-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