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이보다 심각, 심오한 우화는 없다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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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2002년 초겨울에 처음 읽었고 2005년 초여름에 다시 읽다. 난 <동물농장>을 두 번 읽었다. 3년의 차이를 두고 읽어서 그런지 내용들이 새롭다. 물론 전체적인 구도는 파악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기억력은 매우 나쁘다. 나는 책을 읽으면 도대체가 기억하는게 없다. 그래서 또 읽고 또 읽고 해야한다. 지난달에 읽은 책도 난 기억하지 못한다.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뿐. 혹자는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너의 삶의 현실이 그 책을 읽을 때 맞물리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그때는 나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그건 아닌거 같다. 내게는 정말 뭔가가 문제가 있는거 같다. 도대체가 여지껏 읽은 책들을 줄거리 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현실을 살지 않는 사람인가? 어떤 책은 기억나고 어떤 책은 기억나지 않고 하면 나도 그 '혹자'의 말에 동감하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내가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는 건 나의 기억력에 의존해서는 그것들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동물농장> 말 안해도 다 아는 고전이다. 대개의 고전은 재미가 없기 마련인데 이 책은 완전히 이솝우화다. 그래서 아무나 읽어도 무방하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중학교 2학년의 도덕교과서에도 <동물농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흑백논리를 가르치면서 <동물농장>에 나오는 나폴레옹 돼지의 7가지 계명을 언급한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중학교 아이들에게 이 책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들 중 소수는 이 책을 이미 봤다고 한다. 허. 이런. 놀라워라. 요즘 아이들에게 독서가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얘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책을 읽어대고 있었다. 무섭다. 아이들 수준에서 너무 어려운 책들을 읽히는건 아닌지 걱정도 되지만. <동물농장> 정도는 중학생에게 읽혀도 이솝우화정도로 읽히니깐 상관은 없을 듯 하다.

 조지오웰.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본명을 가지고 인도의 뱅골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영국의 이튼스쿨을 다녔다. 캠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있음에도 신분을 이유로 포기, 버마에서 대영제국 경찰을 했다. 이후 접시닦이, 노동자, 거지 등의 하층생활을 전전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참 어렵게 삶을 살아온 듯 하다.

 1947년에 낸 책, <동물농장>을 통해서야 비로소 경제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지만 폐병이 악화되어 병원을 왔다갔다 결국 1950년에 사망. 이제야 빛을 보는가 했는데 죽음을 맞이했다. 47세의 나이로.

 내가 <동물농장>을 접한 것은, 그의 또다른 작품 <1984년>을 접한 뒤였다. 그리고 두 작품을 통해 난 그의 매니아가 되었고,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가 쓴 <조지오웰>이라는 책까지 사서 보게 되었다. 이 책 역시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동물농장>에는 사람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온갖 농장의 동물들이 판을 친다. 그중 돼지가 으뜸이다. 흔히 멍청하다고 알고 있는 돼지가 이 소설에서는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농장 주인 존스가 놔두고 간 책을 통해 글을 익힌다.

 메이저 라는 늙은 돼지의 유언으로 농장의 혁명은 성공, 스노볼이라는 젊은 돼지가 집권한다. 그러나 곧 스노볼은 나폴레옹에 의해 쫓겨나고 나폴레옹 집권기가 되자  혁명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폴레옹과 스퀼드, 그리고 9마리의 사나운 개들은 다른 동물들을 위협한다. 메이저가 유언하고 스노볼이 주창한 동물들의 평등은 이제 없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혁명이 성고한 뒤 다음과 같은 계명을 만든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스노볼이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에 일곱 계명은 변질된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으로 변질되고,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된다"라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지나치게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으로 바뀌며,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이유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으로 변질된다.
 
 계명이 변질된 이유는 나폴레옹 자체가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고 이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법칙을 바꿨던 것이다. 글을 모르는 동물들은 물론이고 글을 알지만 이상하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사나운 개들과 스퀼러의 설득력에 취해버린 모든 동물들은 원래 계명을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농장의 생산물은 나폴레옹과 스퀼러를 비롯한 돼지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동물에겐 가난과 핍박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사실 구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를 그리고 있다. 그 자신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진영과 좌파진영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파에게는 오웰이 좌파를 비판한 것으로 비춰져 우파로 오인됐고, 좌파에게는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좌파를 공격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오웰이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사실이고, 오웰이 좌파를 비판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실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의 혁명이후의 잘못된 방향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자기진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은 격이라고 봐야할까.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장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일차적 관심은 사람들을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글  쓴다는 것이 동시에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면 나는 채을 쓰지 못하고 잡지에 실릴 글조차도 쓸 수가 없다. 누구든 내 작품을 검토해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가 쓴 것들 중에 전적으로 선전적인 책의 경우에조차 본격 정치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웰이 사회주의의 잘못된 흐름에 대한 비판을 위해, 그 거짓에 대고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며, 또한 다른 동기는 미학적 경험을 위해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웰이 이솝우화와 같은 재미난 구성과 형식을 통해 이렇게 무거운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과 동시에 미학적 경험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어렵게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과 동시에 엄청나게 팔려나갔으며 지금까지도 고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동물농장>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진실은, 민중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권력의 타락을 방조하고, 독재와 파시즘은 지배 집단 혼자만의 산물이 아니다. 또한 권력을 맹종하고 아부하는 순간 모든 사회는 이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돌입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메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매한 다수의 민중들의 암묵적 동의는 권력의 타락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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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조지 오웰은 아직도 "반공작가"인가?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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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슨 농담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조지 오웰은 "반공작가"였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그리고 그가 별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1948년"에 미래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라 그냥 "가까운 미래"라는 뜻에서 제목으로 삼았다는 "1984년"이 정말 우리 눈앞에 당도했을 때만큼은, 그리고 이에 공명하여 박세리도 박찬호도 나오기 훨씬 전에 유일하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었다던 백남준이 펼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전위예술이 공중파 방송을 타고 방방곡곡에 퍼져나갔을 때만큼은, 분명히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른바 "밀레니엄"이 오기 직전에 이른바 "Y2K"라고 해서 "디지털 대재앙"을 부르짖던 일종의 종말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것과 비슷했다. 막상 조지 오웰이 "예언"했다는 "1984년"이 현실로 다가왔다며 "큰일"이라고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을 때의 상황이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1984년의 실체"가 다름아닌 "북한"이라고 했다. "빅 브라더"는 다름아닌 "김일성"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한 "소설가"는 얼떨결에 "북한 공산주의의 암울한 현실"을 무려 반세기 전에 정확하게 예언한 "점장이"로 찬사를 받았다. 조지 오웰이 한국에서만큼은 철두철미한 "반공작가"가 된 순간이었다.

2.

물론 우리가 단순히 <1984년>만 가지고 조지 오웰의 머리 위에 "반공작가"란 월계관을 씌워준 것은 아니었다. 그 한편에는 이보다 훨씬 경쾌한, 훨씬 짧고, 또 어떤 면에서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우화소설이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동물농장>이었다. 좌청룡 우백호도 이만 하면 보통이 아닌지라, 한편에는 암울한 미래의 현실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 다른 한편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심지어 그 "빨갱이"들을 "돼지"라고 지칭하면서까지!) "우화 소설"이 있었으니, 이만하면 그야말로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반공작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지 오웰의 책은 필독서가 되었고, 더운 여름 지나가고 찬바람이 불어올 때면 너도나도 방학 숙제 베껴내기에 정신이 없을 무렵 읽어야 하는 과제물 도서가 되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읽으며 돼지들의 비열함에 분통을 터트리고 ("나는 콩사탕이 시러염, 너나 쳐드셈!") 아드리안 모올의 말마따나 "복서가 팔려가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글썽글썽"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필독서"이며 "과제물 도서"이며 "추천도서"이다. 따라서 조지 오웰은 여전히 "반공작가"인 셈이다.

3.

그렇다면 조지 오웰의 운명도 무지막지 딱하다. 본인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인물이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반세기 가까이 "반공작가"로, 즉 "사회주의를 향한 강력한 비판자"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동물농장>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작품은 분명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소비에트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오웰의 비판은 순수한 혁명, 어쩌면 정말 진보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을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독재자와 전체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즉 오웰이 정말로 문제삼은 것은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자칭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도 마찬가지고, 세상 어디서나, 제아무리 작은 조직 내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동물농장>을 "사회주의 비판"으로, 그리고 오웰을 "사회주의 비판자"로 보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이 작품과 저자의 본뜻을 오해하는 셈이 된다. <1984년> 역시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보건대 특별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겨냥하고 썼던 작품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역시 "빅 브라더"로 상징되는 "권력," 그러니까 "독재"와 "공포정치"에 대한 우화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비록 스탈린 시대나 김일성 시대에 소련이나 북한에서 "공포정치"가 자행되었다고 치더라도, 이 역시 단순히 "반공"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은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끝끝내 "반공작가"로 간주되고 있다.

4.

그나저나 뜬금없이 웬 <동물농장>을 다시 읽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책상 위에 이 책이 놓여있었다고나 할까. 이걸 읽기 전에 읽었던 다른 책에서 조지 오웰의 이야기가 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책을 읽었나 하나하나 따져보니...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로버트 뉴턴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았던 날>이었다. 흠... 결국 "돼지" 이야기라서 이걸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었을까? 그러고보면 <동물농장>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서너 번은 읽은 것 같았다. 초딩 때 한 번, 중딩 때 한 번, 그리고 나중에 대딩 때도 한두 번. 그런데 솔직히 이번처럼 이 책을 "낄낄대며"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킥킥대며" 읽었다. 너무 웃겼다. 단순히 "재미있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웃겼다. 왜냐하면 여기 등장하는 돼지, 양, 까마귀, 말 등등의 모습에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겹쳐졌던 까닭이다. 마르크스, 스탈린, 트로츠키를 비롯해서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휩쓸려 버린 특권층, 기회주의자, 프롤레타리아 등등 제각각의 모습이 그 동물들 하나하나에 투영되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여러 번 <동물농장>을 읽었어도 한 번도 "킥킥거린" 적이 없었던 까닭은, 내가 미처 "역사"에, 그러니까 이 "우화"의 배경이 되는 "현실"에 대해 무지했던 까닭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은 결코 초딩이나 중딩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러시아의 역사, 그리고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역사에 대해 뭔가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돼지와 말과 양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상에 공감하며 "킥킥거릴"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우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또한 헛다리 짚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지 오웰은 여전히 초중고딩의 "추천도서"이다. "반공작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5.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아이러니컬했던 점은, 분명히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인 이 책을 충분히 "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80년대 내내 "필독서"이자 "교양서"로 자리잡았다는 현실이었다. 즉 <동물농장>의 이야기는 혁명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뿐만 아니라, 70년대와 80년대 군부독재 치하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다. 특히 처음 약속과는 달리 걸핏하면 동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도, 툭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존즈가 다시 돌아올 거요. 동무들은 존즈가 다시 돌아오는 걸 바라진 않겠지요?" 하면서 은근 협박하는 꼴이라니! 이거 솔직히 우리도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아닌가. 가령 전 국민이 모금해서 평화의 댐을 만들지 않으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느니, 한미동맹이 깨지면 당장에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적화통일이 된다느니, 혹은 이른바 진보 세력을 자처하며 남한에서 암약하는 빨갱이들이 기백만이며 어쩌구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솔직히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이걸 "필독서"로 지정했던 양반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작품인 셈이다. 즉 "반체제적"이며 "반권위적"인 사고방식을 학생들에게 딱 길러주기 좋은 소설인 것이다. 과연 이들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당시 문교부 (교육부가 아직 아니었다.) 에 뭔가 "불온한" 사상을 지닌 인사가 하나 있어서 이 "사회주의자"의 작품을 "반공소설"로 슬쩍 포장해서 끼워넣었던 걸까? 아는지 모르는지, 이 책은 여전히 "독후감 숙제"이다. 조지 오웰은 여전히 "반공작가"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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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벌거벗은 여자: 여자의 모든 것! 여성의 모든 것?
벌거벗은 여자 - 여자 몸에 대한 연구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경식 외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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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최초의 미술학과 교수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29세에 결혼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당시 관습에 따라 상당 기간의 연애 기간을 거쳐(약혼을 포함해서) 결혼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러스킨은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 고대의 대리석 조각과 회화 등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심미적 관점에서 여성의 육체를 즐길 줄 알았다. 러스킨의 아내는 결혼 얼마 뒤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유는 남편인 러스킨이 섹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관계만 갖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멀리 하려 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결국 러스킨의 아내는 신체검사를 받아 자신이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다.

러스킨은 어째서 아내와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 사실, 러스킨의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내의 사타구니에 난 털(음모)때문이었다. 고대의 대리석 조각상을 통해 여성의 몸을 심미적으로 관찰해온 러스킨이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으로는 상류층 남녀는 혼전관계를 맺지 않았고, 그 자신은 여성과의 섹스에 대해 완전한 무지에 가까왔다. 그로서는 사랑스런 아내의 몸, 가장 아름다워야 할 곳에 남자처럼 숭숭 솟아오른 음모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러스킨은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고 이혼당했다.

우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캐럴(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을 초대하여 한여름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인 '앨리스 리델'은 일곱 살이었다. 청년 도지슨은 옥스퍼드의 수학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지슨이 어린 앨리스에게 유아성학대의 범죄를 저질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을 극도로 혐오하던 사람에 속했으므로... 그는 여성에게 키스 이외에는 그 어떤 성적인 접촉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키스했던 여성은 대체로 열두 살이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지슨은 사춘기 이전의 나이에 있는 어린 소녀들을 편집적으로 사랑했다. 도지슨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도지슨은 상급자의 딸인 앨리스 리델을 사랑했다. 그는 앨리스가 다섯 살에서 열한 살때까지는 늘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도지슨은 그 소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12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인 앨리스 리델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일설에는 앨리스의 어머니가 도지슨이 앨리스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앨리스의 일기장에서도 도지슨과 관련된 모든 페이지를 찾아 찢어냈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나보코프가 소설 "롤리타" 를 집필했다는 이야기 역시 이들의 이야기만큼 유명하다. 이것은 여성의 성기 일부를 가리고 있는 음모가 남성들에게 어떤 인상과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간략한 일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과 같은 엄숙한 금욕주의자(?)에게 여성의 음모가 미친 영향과 거의 같은 이유로 루이스 캐럴에겐 여성의 음모가 영향을 미쳤다.

여성 자신도 자신의 신체에서 2차 성징의 하나로 자라나는 음모에 대해 대부분 혐오의 감정을 갖는다고 한다(물론, 남성인 나는 잘 알 수 없으나 나와 애 주변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남성 성기 주변에서 음모가 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흡사한 혐오와 자부심이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성기 주변에 자라나는 음모는 음란한 느낌과 함께 사자의 갈기와 같이 힘과 성장을 의미하는 자부심을 품게 해준다).

사춘기에 들어선 영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사춘기 진입 후 소년들과 달리 소녀들은 거미를 싫어하는 비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음모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14세 쯤에는 이 비율이 더욱 증가해 거미를 싫어하는 소녀의 비율이 소년의 두 배로 껑충 뛴다.
언뜻 보기에 위의 연구 결과가 음모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아해 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왜 그렇게 거미를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소녀들이 한결같이 거미가 '역겹고 털로 뒤덮인'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19장 _ 여성의 음모" 중 333쪽

어찌되었든 독실한 종교인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모두 자연 그대로의 여성 음모가 매력적이라 생각한 것처럼, 음모 제거를 찬성하는 부류에도 금욕주의자와 쾌락주의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여성의 신체에 대한 남성들의 그릇된(?) 혹은 본능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즉, 여성의 몸은 아무런 이유없이 오해받고 있으며, 여성의 음모가 생리적으로는 그저 성장의 표징임에도 불구하고(성적인 이유는 의견이 제각각이긴 하지만) 남성들은 때로 각자의 성적 취향에 따라 여성의 음부를 제멋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는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 데즈몬드 모리스가 이 책 "벌거벗은 여자"를 집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여자 몸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의 책에서도 부제가 그리 붙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책을 읽다보면 부제가 여러 이유로 적당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는 앞서 러스킨과 도지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여성의 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연구가 필요하단 것이고, 둘째는 저 부제가 아무런 꾸밈없이 이 책의 직선적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고지식해보이기 까지 하는 서술 방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데즈몬드 모리스의 이전 책들 가령 "털없는 원숭이"나 "피플 워칭" 과 같은 책들, 특히나 "털없는 원숭이"는 영국식 블랙유머가 적당히 가미된 산문 문체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상대적으로 건조해 보인다.)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모두 23장의 부분으로 나뉘어 여성의 신체를 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제1장 '진화'로부터 시작해서 제23장 '여자의 발'에 이르기 까지 저자 데즈몬드 모리스는 여성의 신체를 그 특유의 시선으로 샅샅이 훑어간다. 이때 데즈몬드 모리스 특유의 시선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이전의 연구서에서도 그러했듯 그는 인간을 인간이기 이전에 지구상에서 진화해 살아남은 독특한 영장류의 일종으로 연구한 것처럼, 여성을 그런 영장류의 암컷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편리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물신화한다는 식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변명할 여지가 생기는 측면 때문이다. 나쁜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이 여자의 몸은 보여줄지 몰라도, 여성의 몸을 보여주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종종 과학이란 말로 혹은 객관화한다는 뜻에서 자신은 어떤 주의나 주장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측면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해부학적인 방식으로 시작해서 사회적인 방식, 문화인류학적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 데즈몬드 모리스와 이 책의 저자들이 구태여 '여성'이란 표현을 피하고, '여자'라고 표기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제14장 '여자의 가슴' 편이었다.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의 악명높은 비운의 황후 마리 앙트와네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앞서 루이스 캐럴과 지금의 이 일화는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유방이 현재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이 아니라 그녀의 유방에 석고를 대고 본을 떠서 만든 황금잔이 전시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18세기 유럽을 뜨겁게 달궜던 것은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루소의 영향력은 참으로 막강했는데, 당시 귀족 출신의 부인이라면 누구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직접 젖을 먹여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소의 "에밀"을 통해 수유는 비로소 귀족사회에서도 수용될 수 있었고, 이 논리를 확장시켜 국가의 아버지, 어머니로 자부한 마리 앙트와네트는 자신의 유방을 본떠 만든 도자기 잔에 우유를 담아 따라주는 행사를 치뤘다. 이런 국가적 의례를 통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은 루이16세의 유방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유방, 프랑스 국민의 유방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종종 여성의 유방 혹은 수유 행위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곤 한다. 그것은 데즈몬드 모리스가 여성의 신체를 아무리 여자의 신체로 혹은 영장류 중 인간의 암컷으로 객관화시키려 할지라도 사회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신체, 어머니의 신체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는 종종 이중의 처벌 속에 놓인다. 단적인 사례가 여성의 수유행위이다. 수유행위는 국가 단위에서 미래 국민들의 보건과 건강을 위해 권장되는 사안이면서 사회적으로 엄격한 금기였다. 1975년 미국 여성 세 명이 마이애미의 한 공원에서 가슴을 내놓고 젖을 먹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죄목은 '부적절한 노출'이었다. 여성의 수유행위는 국가적으로 권장되는 일이면서 동시에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런 체포관행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북미지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모유 수유가 합법으로 인정받는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들은 분명 우리에게 여성의 신체 혹은 우리들 지구상에 살고 있는 특이한 영장류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사실은 에드워드 윌슨의 시각을 계승한 듯 보이는). 데스몬드 모리스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쓰면서 여자 몸의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는 대로 여자 몸에 대한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최소한 '여자'라고 국한시키더라도 나는 저자의 이런 자신만만함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인간을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해서 지상을 지배하는 강자로서의 영장류로 인간을 파악하여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 새롭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people이면서 동시에 Human이고, sex로서의 여성이 있으면, gender로서의 여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온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여자의 모든 것은 아니며, 더더군다나 여성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음모가, 여성의 유방이 한 가지 의미망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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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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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꽤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내 시간의 일부를 교회에서 보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과 불완전함에 유난히도 일찍 눈을 뜬 덕(?)에, '혹시나 종교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던 것 같다. 두터운 외투를 뚫고 매섭게 들이닥치는 겨울철의 찬바람도 내 존재의 영원함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때론 세상 사람들을 잠들게 만드는 어둠마저 헤칠 정도로, 무릎 꿇고 작은 두 손 모은 체 보내는 나의 시간은 끝이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기도는 나를 바꾸지 못했고, 세상 역시 변화를 몰랐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몹쓸 일 앞에서도 '강함을 위해 시련을 예비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면의 상처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내 귓가를 맴돌던 웅장한 찬양도, 뜻은 몰라도 습관 마냥 읽어나가던 성경 구절도 어느 순간 헛된 것으로 돌변해 버렸다.
시간이 내 머리를 크게 만들면서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만 내게 들렸다. 이전엔 알지 못했던 남성 중심적인 목소리가 설교 중간중간 느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도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극대화되었던 가장 큰 일은 바로 세례를 앞두고 발생했다. 세례를 위한 어떠한 과정도 밟지 않았고 교회도 드문드문 나가던 내게 어머니는 세례를 권하셨다. 내가 과연 세례를 받을 만큼 진실된 믿음을 소유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다음 기회에 제대로 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받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때 나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데, 왜 거절하는거니? 그렇게 지옥에 가고 싶어?"라는 어처구니없는 응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내겐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부는 더더욱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세례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세례를 받았지만, 난 아직도 내 믿음에 대한 어떠한 확신성도 가지지 못했다. 여전히 교회는 어쩌다 한 번 나가고 있으며, 기도 한 번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어버렸다. 세례는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가 있다.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가져다 준 <운명>, <좌절>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자신의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미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15살 때 자신을 덮친 그 기억들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나갔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상처 가득 들어선 고름을 짜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고통스럽게 내뱉은 신음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를 떠올리는 까닭은 이 책의 작가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임레 케르테스는 작가는 지난 경험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이 책의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 역시 끝없이 자신의 경험을 파헤침으로써 종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를 부정적으로만 평할 순 없을 것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도, 그녀의 마음은 이 책을 써나가면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진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7년 동안의 수녀원 생활은 그녀 스스로 자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하여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이었을 1960년대, 평등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맴돌기 시작할 그 무렵 그녀의 눈과 귀는 완전히 닫힐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에겐 알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온 마음을 바쳐 기도를 해야만 했다. 정해진 규칙을 엄수해야만 했고, 그 틀을 벗어날 때마다 부족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 신체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도 무시해야만 했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마저도 어쩌면 버려야 했다.
수녀원을 벗어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세상 어느 곳에도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느꼈다. '전직수녀'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과대 포장되었고,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마초적 시각에 의해 평가될 뿐이었다. 마음은 그 어떤 아름다운 시에도 반응할 줄 몰랐던 그녀는 정해진 원칙에 입각한 논리성은 보여줄 수 있었으나 창의적인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긴장했다.

그녀의 삶은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된 듯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지만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렇게 끝났더라면 특정 종교에 자신을 바치려다 실패한 이의 무용담으로 이 책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을 얻었다. 어이없이 박사학위를 상실하고 간질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그녀가 살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접한 또 다른 종교들이 그녀를 크게 만들었다. 의식에 얽매여 자기 안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었던, 신앙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욕구를 붙들어 매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유대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통해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폐와 간질, 자기 안에만 갇혀 지내는 제이콥이 보여준 믿음이야말로 진실된 믿음이 아닐까?

그녀의 글은 그녀의 삶을 담고 있다. 억지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려 들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녀의 깨달음까지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순 없다. 마음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니 말이다.
세상은 여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일부는 종교의 이름을 빌어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짓밟아야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것처럼...
내가 믿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면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이까지 구원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제대로 된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종교로 타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걷고 있고, 그 방향은 아마도 좋은 쪽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녀가 그렇게 믿고 지금도 걷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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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맘에 드는 역사책.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잠을 자기 위해 리틀록의 한 모텔에 처음으로 차를 세웠다. 굳이 마음속에 그려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이미지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연방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함을 치고 침을 뱉는 성난 백인들 사이를 지나 학교로 향하는 어린 흑인 학생들의 모습. 미국의 테러.

이튿날 아침, 나는 다시 기나긴 여정길에 올랐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멤피스를 가로질렀다. 또 다시 살아나는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미국의 테러.

테네시를 지나치는 내 앞에 미국 도로 역사의 더 많은 부분을 알려주는 표지판, 네이선 베드포드 포레스트 주립공원이 나타났다. 연방군 흑인 병사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될 때 남부연합군을 지휘했던 포레스트는 후일 KKK단의 창설에도 일조를 했다. 미국의 테러.

몇 마일을 더 가자 샤일로 격전지라는 또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1862년 4월 이틀간 벌어진 전투에서 남부연합군 1만3천명과 연방군 1만1천명이 목숨을 잃은, 피로 얼룩진 곳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 밑에 시체가 밟히는 유혈낭자한 전투였다. 당시 연방군과 남부연합군 전사자는 독립전쟁, 1812년의 미영 전쟁, 멕시코 전쟁의 전사자를 다 합친 숫자보다도 많았다. 그 학살의 목격자 중 한명은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뒤 사랑하는 이들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수많은 뉴요커들처럼 군인 남편을 찾아 나선 젊은 여인이었다. 전선의 간호사로 일할 것을 강요받은 이 여인은 의료 텐트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던 절단된 팔다리들의 끔찍한 모습을 후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미국의 테러.

내슈빌과 역사책에 나오는 올드 히코리, 즉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고향인 인근의 허미티지. 하지만 인디언들은 그를 예리한 칼이라 불렀고, 그는 수천 명의 인디언들을 그들 조상이 살던 고향에서 내쫓아 처절한 눈물의 행렬로 내몬 인디언 제거 정책의 장본인이었다. 미국의 테러.

녹스빌이 가까워오자 오크리지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의 숙소로 만들어진 마을치고는 무척이나 목가적인 이름이었다. 그것을 보자 검게 그을린 히로시마와 세계무역센터의 어지럽게 뒤엉킨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국의 테러.

평지에서 컴버랜드의 언덕으로 힘겹게 올라가 다시 버지니아로 들어서니, 셰난도어 계곡과 남북전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더 많은 유적지가 나타났다. 윈체스터로 나아가는 출구가 이곳에 있었다. 길고도 치열했던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인끼리 싸우며 70번 이상이나 주인을 갈아치운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형제들의 싸움으로 생겨난 웨스트버지니아로 들어서니 하퍼스 페리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광적인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자살 공격을 감행하여 화약통에 불을 질렀던 곳이다. 그런 그를 누구는 테러리스트라 불렀고, 누구는 순교자라 불렀다.

메이슨-딕슨 라인을 넘어서 메릴랜드의 해거스타운과 샤프스버그로 들어서면, 하루 동안에 치른 것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앤티탐 격전지를 볼 수 있다. 미국의 테러.

이제 지형은 펜실베이니아로 바뀌었다. 이곳, 한때 굶주린 로버트 리의 남부연합군 병사들을 잡아끌었던 그 풍요로운 들판이 9월의 태양 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옥수수밭은 샛노란 호박색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풍요로운 수확을 약속해주는 황금 물결로 일렁거렸다. 게티스버그를 지나려니 1865년 7월의 사흘 동안 일어난 유혈 참극이 머리에 떠올랐다. 미국의 테러.

한때 겁에 질린 미국인들이 로버트 리 장군의 접근을 피해 도망친 해리스버그를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트니 뉴욕이 점점 가까워졌다. 우애의 도시로 불리는 미국의 본향 필라델피아 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한때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미국의 애국자였을까? 하지만 의회파들에게 그들은 반역적인 테러리스트였다.

도로 위에서 40시간 이상을 보낸 뒤 마침내 조지 워싱턴 다리에 이르자 대통령이 교회에 있었다. 보아하니 그곳에서는 속죄보다는 복수와 테러 종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가는 듯했다. 그 순간 미국은 어둠을 조금밖에 밝히지 못하는 손전등을 들고 아주 길고도 어두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듯했다.


좀 길게 인용했는데, 책은 유럽인들의 북미 진출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역사를 촘촘하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가 이렇게 길었나, 싶을 정도로 씨줄 날줄을 촘촘히 엮었다.

케네스 데이비스는 미국에서는 ‘Don't know much about~'이라는 시리즈를 내놓아 명성을 얻은 인기 저술가라고 한다. 이 사람이 쓴 ‘우주의 역사’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그때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딱 ‘일반인들’ 용으로 꾸몄나 싶어 감탄했었다.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요점정리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던 저자인데, 미국사에 대해서는 또 어찌 이리 해박할 수 있는 것인지. 진정한 ‘제너럴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한 대로 저자는 제너럴리스트일 뿐,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책은 미국사에 대한 학술서적이 아니며 말 그대로 ‘교양서적’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역사에 대해 호기심은커녕 지루함만 느끼고 외면해버리는 ‘반역사적인’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참맛과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사료, 주로 여러 종류의 책에서 모은 것들을 요약·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놓고 역사논쟁을 벌이기는 힘들 것 같다. 여러 가지를 꿰었는데, 그 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나처럼 미국사에 대해 ㅁ 자도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 딱 알맞다. 교양서적이라고 하지만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다소 시니컬하면서 경쾌한 문체인데 읽는 재미 못잖게 던져주는 것들이 많다. 위에 옮겨적은 것은 저자의 후기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희망을 잃지 않으며, 미국이라는 신생국가의 성장 동력을 때론 경외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질러온 숱한 범죄들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 감지 않기 위해서야말로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 후기를 쓴 시점은 아마도 2001년 9·11 동시다발 테러 직후였던 것 같다. ‘잔혹한 역사’에 눈감지 않는 저자는, 끔찍한 테러를 겪은 뒤에 오히려 미국의 ‘테러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탁월한 능력이고 엄청난 객관성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괜찮은’ 지식인들이 넉다운되어 ‘반테러 전선’으로 달려갔던 것에 비하면 더더욱 눈에 띈다.

책이 꽤 두꺼운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질문-대답 형식으로 읽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지 워싱턴은 벚나무와 무슨 사이였나? 워싱턴은 체리파이를 좋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워싱턴이 어릴적 벚나무를 도끼로 잘라놓고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그걸 가지고 ‘정직한 워싱턴’이라고 했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정직한’ 소리 안 들을 사람이 어디있을까마는... (나야말로 정직의 화신이다, 난 항상 들켰고 들키면 일단 이실직고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워싱턴의 포토맥 강가에는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다는데(이건 일본에서 줬다나) 좋은 책 읽고 벚나무에 몰두하면 실없는 사람 되겠지. 암튼 공부해야 할 것들은 많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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