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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그가 테레사 라이트한테 꽤나 고생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하잖아. (p.128)

폴 오스터의 소설을 있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스무살 즈음, 도서관에 갔다가 늘 대출 중이던 <달의 궁전>이 웬일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빌려 왔더랬다. 도대체 폴 오스터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폴 오스터 타령이야? 라는 기분으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책장을 펼쳤는데, 이십 페이지쯤을 넘겼을 때 이 소설은 이따위 자세로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행여 누가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듯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페이지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읽었다.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진짜 꿀떡, 이 넘어가듯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삼키는 침이 달았다.


다른 책을 읽었다. <뉴욕 3부작>을 읽었고, <우연의 음악>, <스퀴즈 플레이>, <공중 곡예사>, <환상의 책>을 읽었다. <빨간 공책>을 읽고 나서 우연히 그 책과 비슷하게 생긴(!) 공책을 발견해 구입하고는 낙서장으로 쓰기도 했다. 또 뭘 읽었더라? 몇 권 더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그의 책을 읽기가 재미없어진 탓이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가. 


사실 위에 나열한 책들의 줄거리도 또렷하게 기억이 잘 안 난다.  머릿속에 내용이 다 섞여 있다. 왜 이런 건지 그동안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선셋 파크>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내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름이나 직업이나 묘사된 외양은 다를지언정 결국 같은 길로 향하는 인물들 같다는 느낌이랄까. 잘 살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잘 이겨내는 것 같아 보여도, 끝내 인간은 인생의 내리막길로 쭉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절절히 느껴야 한다는 게, 그때의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나보다.


그래서일까. <선셋 파크>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세뇨르 헬러가 이렇게 대단한 찬사에 어울릴 만한 인물일지는 시간이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p.100)

아주 오랜만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붙잡고, 원서보다 더 매력적인 표지를 잠시 구경하고(특히 마음에 드는 건 뒷표지에 그려진 거위의 표정! '네 인생도 미끄럼틀 위에 있어'라는 듯한 표정!!), 역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황보석'이 없다는 것에 잠시 실망하고, 송은주 씨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번역하신 분임을 떠올리고, 다시 기대감을 부풀린 후, 드디어 페이지를 넘겼다. 신기하게도 <달의 궁전>을 읽을 때처럼,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아아, 재미있다 재미있어, 라고 중얼중얼거리며 읽었다. 중간 중간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였는데, 책을 다 읽고 보니 붙인 포스트잇이 스무 개도 넘었다.


스물 여덟. 한국의 청년이라면 취업 걱정에 토익 준비에 대기업에 이력서를 내니 공기업이 최고니 공무원밖에 없니 하며 혼란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이. 미래에 대한 준비와 설계가 당연히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나이. 젊을을 불태워라 열정과 자신감을 가져라 세상에 나의 가치를 증명해라 따위의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들어야 하는 나이. 하지만 햇살 가득한 플로리다에서 살아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일스 헬러는, 스물 여덟 살임에도 불구하고, 앞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버려진 것들의 사진을 찍는다. 최소한의 욕망만을 가지고 살려 한다.


처음부터 그의 삶이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의 죽음 이후,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이후, 부모가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 마일스는 이제까지의 생에 흥미를 잃었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미래가 없음을 느꼈다. 부모의 생각처럼 그는 자신이 미래가 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시에 과거를 버린 아이가 된 것일지도. 


그 때문에 마일스가 버려진 물건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그 물건에 얽힌 시간들을 함께 버린다는 것일 테고, 마일스 역시 그 물건들처럼 잠시 버려진 존재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었을 테니까. 자신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존재로.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렇게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보비의 죽음이 자신의 어깨에 얹어 놓은 죄의식에 깔아뭉개지지 않고 오늘이라는 짐을 지고가면서 삶을 근근이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일한 방법.



이제 최악의 일들은 다 지나갔다. (p.319)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서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기억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그래서 그는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그러나 마일스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붙이고 서 있던 과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일스 헬러'의 삶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을 뿐, '마일스 헬러'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새어머니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 중 한 명인 네이선과의 연락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거와 연결된 끈을 쥐고 있기에. 가족과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있든 플로리다에서 폐가 처리를 하고 있든 그는 어쨌든 마일스인 것이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말장난하기를 좋아하는, 마일스 헬러.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미래가 없는 아이일 수 없었다. 미래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기대하고, 약속하고, 계획하고, 꿈을 꾼다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미래는 '분명히 있다'. 게다가 필라라는, 매력적인 여인의 연인이 되면서 그는 분명히 미래가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필라가 열 여덟살이 되는 5월 23일(바로 오늘!!),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그의 미래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마일스는 과거의 마일스로 돌아가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밟는다. 뉴욕으로 돌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고-심지어 사람들은 마일스를 좋아한다!-, 필라가 가야 할 대학을 행복하게 고르고,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살 곳을 알아보러 다닐 계획을 품고, 새 집을 구할 때까지 함께 지내도 좋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 놓는다. 이렇게만 흘러 가면 해피엔딩이다. 마일스는 곧, 마일스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p.328)

그러나 결말은 또다시 수렁이다. 아버지와 필라와 모든 사람이 마일스에게 실제로 실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일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거짓말을 하고 부모 곁을 떠나던 그 때,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마일스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첫 번째 수렁 때문에 과거를 버리려 했던 마일스는, 두 번째 수렁 때문에 장담했던 미래를 잃는다. 최악의 상황은 다 지나갔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마일스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별 문제 없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까지 잘못해 온 것에 책임을 지고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필라와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다. 필라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 필라와 함께 도망가서 산다 해도, 둘이 꿈꾸던 뉴욕에서의 생활 따위는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p.285)

마일스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폴 오스터를 한창 즐겨 읽던 10여년 전이라면, 이 결말을 보고 허탈함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재미있고 즐거웠더라도 '이따위 결말을 보자고 신나게 읽어온 건 아니라고!!!'하면서 하드커버를 북북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눌렀을 것 같다. 하지만 <선셋 파크>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마일스의 삶이 행복해졌나 불행해졌나 추측해 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필로 윤곽을 잡고, 디테일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하나의 스케치를 대충 마쳐놓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심술궂게 연필 자국을 손가락으로 뭉개 버린다. 디테일이 망가진다. 윤곽이 무너진다. 어쩌면 스케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런 스케치가, 인간의 미래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일들을 우리는 마치 이미 다 벌어진 일들처럼 얘기한다. 나는 뭐가 될 거라는 둥, 어디를 갈 거라는 둥, 뭘 먹고 뭘 사고 뭘 입고 뭘 읽을 거라는 둥, 이건 수익성이 높고 저건 안전성이 높다는 둥.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현재이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이며, 곧이어 다가오는 미래인데, 마치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무처럼 뚝뚝 잘려 분리될 수 있다는 둥.


그게 아니라는 걸,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삶이란 그토록 자비로운 표정으로 인간에게 계획 가능한 행복 따위를 선물해 주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은 이 순간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약해져 간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아파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폴 오스터는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나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건, 내가 특별히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거나 나 개인의 불행이 워낙 특이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게 내 삶이고, 네 삶도 그렇고, 다른 어떤 이의 삶도 모두 다 그런 것이기 때문인 거다.



우리를 구해 줄 테니까. (p.65)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희망 외에는 그 무엇도 갖지 않는 것.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사는 것. 마일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듯이, 나 역시 되뇌어 본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장담하지도 않겠다고. 이미 다 끝나 버린 일에 목매지도 않겠다고. 그저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겠다고. 마일스의 말에 귀 기울일 때 필라가 보여준 몰입의 눈빛 때문에, 마일스가 필라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내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 사족

1. 마일스 이외의 인물들도 매력있었는데. 특히 나는 메리-리가 좋았다. 특히 마일스에게 신경질을 낸 후, 한순간에 극에서 극으로 바뀌면서 '아이고 맙소사, 내가 정말 못된 년처럼 굴었구나, 그렇지 않니?'라고 묻는 부분은 끌리도록 매력적이었다!


2. 네이선이 바이(혹은 게이?)였다는 것, 소설 전체를 보자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 인상적인 반전이었다.


3. 폴 오스터 소설을 보면서 '아 이 사람도 여자 심리 묘사는 참 못하네…'라고 자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선 그런 느낌이 많이 안 들었다. 앨렌이나 앨리스, 윌라와 필라, 메리-리 모두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보편적인 인간의 한 종류처럼 그려졌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오히려 헬러의 시각이나 모리스의 시각에서 여성 인물들에 대해 애기하는 부분들이 더 흥미로웠다. 알 듯 모를 듯,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4. 야구 얘기는 역시 재미있었다. 샌디 '코팩스'를 '쿠팩스'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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