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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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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지켜지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서글프리만큼 간단하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74쪽, '지요코' 중)



...<눈의 아이>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결국 이 이야기들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과 짊어지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눈의 아이'나 '성흔'의 서술자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이라면, '장난감'의 구미코나 '지요코'의 서술자는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겠지, 당연히. '돌베개'의 아사코와 이시자키가 좀 헷갈리긴 하는데, 안 짊어진 사람에 가깝겠지? 결말을 보면 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도, 많은 사람들은 발작적으로 과거에 얽매이는 건 나쁜 거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맨날 옛날 얘기, 좋았던 때 얘기, 다 빛바랜 케케묵고 먼지묻은 얘기 끌어안고 사는 게 무슨 의미 있냐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사회와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 오래된 것, 철없던 시절에 낭비하고 소비했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앞날, 새로운 것,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그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고 눈을 빛낸다. 과거에 이랬네 저랬네 하는 사람 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사는 사람 없으니 잊을 건 빨리 다 잊고 새로운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자못 비장하게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도 많다.


부분적으론 맞는 말이다. 고루하고 융통성 없어 생각과 사상이 낡아빠진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답답하고 짜증스러우니까. 이 순간의 나를 딱딱하고 획일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낡은 것은, 잊혀져야 할 것들과 동의어일 테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가니까, 결국 나의 현재란 아까 전 나의 미래일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과거란 '바로 지금'이 아닌,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순간이 잊혀져야 할 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내게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가치와 의미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앞으로 올지 안올지도 모르며 좋아질지 나빠질지 장담할 수도 없는 미래보다는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 그 따뜻했던 순간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기억이나 추억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사람은 현재를 열심히 신나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런 기억이나 추억이 내 삶에 더 많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불투명한 미래의 무게로 힘들고 지치려고 할 때 나를 잡아주는 희망, 일, 테고.


'눈의 아이'의 '나'에게도, '성흔'의 '나'에게도, '지요코' 속 인물들이 가진 지요코가, 건담이, 곰 인형이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검은 손에 휩싸여 내 세계의 법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도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괴물이 되는 일은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보살피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 무언가에게 '내가 잘 해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잘 되는' 건 그 무언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가니까.


그래서, 누구나 마음 속에 지요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있다.


그 지요코가 더 나를 잘 지켜줄 수 있게, 나 역시 내 세계의 접점들을 잘 보살피고 소중히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봤다. 검은 손에 휩싸이지 않게. 누군가의 지요코를, 쉽게, 아무 생각 없이 해치지 않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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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2]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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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 지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탄탄한 플롯과 구조를 갖춘 소설을 쓰는 작가.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지만 집중하며 읽지 않으면 줄거리도 잘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보니 이번 신간평가단 소설로 에코의 작품이 결정되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3월엔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질 게 뻔한데, 그의 소설을 잘 읽을 수 있을까. 게다가 한 권도 아닌 두 권인데!


역시나 그의 책을 읽는 건 부담 없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려하게 펼쳐지는 19세기 유럽 사회의 모습과 심심하면 나타나는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서양사에 대한 지식이 좀더 풍부했더라면 조금 더 쉽게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이라는 존재 자체의 무게도 상당했고.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시모네 시모니니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생각할 만한 거리들을 듬뿍 안겨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몰입도 참 높은 이야기.

본격적인 이야기는 에코가 '세계 문학 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이라 했다는 시모니니의 일기로부터 시작한다.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시모니니는 19세기 유대인 세계 지배 음모론의 비조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극단적인 냉소주의와 유대인 혐오증을 가진 인물이 된다. 청년이 된 후에는 문서 위조 기술을 배우고 이중첩자가 되기도 하며 테러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다 시모니니에게는 삶의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알퐁스 투스넬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을 통해 시모니니는 반유대주의를 '돈 벌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대학생이던 시절 인상 깊게 읽었던 뒤마의 소설과 예수회 신부의 글을 이용하여 '프라하 묘지' 보고서, 즉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을 만들어낸다. 이는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할 음모를 퍼뜨리고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되었고 반유대주의 및 유대인 혐오증과 결합해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단초가 된다. 이후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들로 태어났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혐오하고 증오하는, 그래서 결국 죽여버리는 상황이,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류사에 펼쳐진 것에 대해서는-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시모니니라는 인간을 '일반적인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이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의 행위가 잘못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움베르트 에코의 의도가 시모니니라는 인간을 최대한 추악하게 그림으로써 '그런 추악한 인물이야말로 그정도의 못된 짓을 하기에 적당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리라. 한 인간의 부주의한 행위로 인해 유대인들의 운명이 위기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역시 절대로 아닐 테고. 에코의 말처럼, 시모니니는, 실존하지 않았으나 분명 우리들 사이에 있는 인물이니까.

결국 이 소설의 매력은 과거 유럽의 현실이 현재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도 다를 것 없다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추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떤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다. 자기가 믿는 것이 진실과 동떨어져 있을 지라도, 그것이 '내가 믿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다. 

물론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소수일지언정 늘 존재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거나 왜곡된 것임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과정은 지난하고 지루하며 길기까지 해서, 우우 몰렸던 사람들의 관심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믿었음을 깨닫고 반성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리석은 존재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움에도, 누구나 자신이 어리석을 수 있음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진실이 진실임을 알게 되더라도 외면하거나 또다른 음모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지혜롭게도 잘 이용해 먹는다.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끔 유도하고, 그렇게 유도한 결과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써먹는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은 지극히 불평등하고, 권력을 갖지 않은 이들은 또다시 속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권력은 끊임없이 연장된다.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이게 현실인 걸 어쩌나.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나의 마음은 편안치 않다. 나 역시 시모니니의 가짜 문서에 속아넘어간 이들처럼, 거짓된 누군가'들'의 손놀림에 놀아날 수 밖에 없다는 걸 잘 아니까. 그러므로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가비알리가 일러준 그 말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조심하고 저것을 조심하라. 모두를 조심하라. 무엇도 완전한 진실이라고 쉽게 믿어버리지 마라. 그 마음으로, 프라하의 묘지를 다시 읽어야겠다. 에코 선생이 숨겨놓은 메시지가 혹시나 또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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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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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를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정녕 이렇게 끝? 이었다. 전체 이야기와는 별 상관도 없는 배우 한 명이 별안간 목숨을 잃은 것도, 그의 동생이 자기 다리를 피투성이로 만들어야 했던 것도, 누군가는 진실 앞에 총살당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과 투신해야만 했던 것도, 모두 다 결국은 토비가 잃어버린 부인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었던가, 하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전형적인 미스터리물'과 꽤 다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알게 된 주인공이 진상을 찾아 나간다는 과정 자체는 다르지 않겠지만, 그 주인공-토비-의 행동을 휘발하는 동기는 직업적 사명감이나 공의를 실현하겠다는 정의감 등 '옳은 것'에 대한 갈구에서 비롯하지 않는다(물론 아예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있더라도 상당히 작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아내, 제니를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로저-의 추악한 모습을 제니 앞에 까발려야만 한다는 강박이다. 그래서 토비는 별 관심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무대 위에서 대충 연기를 하고, 때로는 공연 계획이 잡혀 있음에도 땡땡이를 치고, 주위 사람을 위기에 빠뜨리고, 자기마저도 죽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처넣는다. 왜? 로저에게 맞서기 위해, 그래서 제니를 되찾아오기 위해. 


그러다 보니 소설은 일관성을 잃는다. 제니는 처음부터 토비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스토커처럼 자신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을 떨쳐달라고 토비를 충동질하는 때부터 로저를 잃고 딜리어 고모, 데릭 오스윈, 로저가 모두 살아 있다면 감당하기 힘든 진실들이 펼쳐졌더라도 로저와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p.488-489) 거라며 흐느낄 때까지 쭉 그렇다. 그녀에게 토비는 손대는 모든 걸 파괴하는 사람이고, 떨어져나가길 바라는 사람이고, 같이 말장난하고 싶지 않은 상대다. 그런데, 로저가 죽고 난 후에도 떠나달라며 울던 제니가, 맨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토비에게 달려온다. 아니, 이 뜬금없는 해피엔딩이란 뭐지?!


이 강박적인 해피엔딩으로 인해 소설의 긴장감은 팍 떨어져 버린다. 이 모든 사건이, 결국은 제니가 다시 토비에게 돌아오는 결말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는 거다. 물론 개인의 행복이 공의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리고 로저가 숨겨 뒀던 진실이 밝혀진다는 사실 자체가 나름의 정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니가 토비에게 돌아오기 위해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래 버리면 이전까지의 제니라는 캐릭터가 가졌던 통일성이 한 번에 무너져 버리잖나. 


독자는 토비도 제니도 아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토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제니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로저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기껏해야 전 아들의 죽음을 운운하는 로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정도…).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제니를 대하는 토비의 태도는 '지나간 버스에 매달려보려고 발버둥치는' 정도일 뿐이다. 이미 관계가 종료되었음을 머리로는 100퍼센터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징징대는, 하나도 반갑지 않은 구남친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비에게 돌아가는 제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더이상 갈 데가 없어진 여인의 차선책 선택? 늦게 그러나 다행히도 깨닫게 된 진정한 사랑? 갑자기 불쑥 일어난 변덕?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마지막 배려? 저 중 무엇이더라도 큰 매력 없긴 마찬가지다.


사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결국 모든 인물들이 데릭이 설치해 둔 무대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점이었고, 결국은 가장 헐렁하면서도 괴이해 보이던 데릭이 가장 치밀하면서도 지능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데릭이 로저와 함께해야만 한다(!!)고 마음먹게 되는 과정이나 그 과정에서 데릭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 같은 내용이 좀더 치밀하게 드러났다면 반전은 더욱 긴장감 넘쳤을 테고 데릭의 아픔은 더욱 독자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까. 물론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보니 토비가 데릭의 상황이나 심리를 자기 일처럼 자세히 묘사하긴 어려웠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면 데릭을 좀더 만나기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데릭의 죽음에 대해 곱씹으며 브라이턴을 떠나는 토비의 쓸쓸한 뒷모습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으로 했다면 더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싶지만, 독자가 아무리 소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해도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 자체를 바꿔버릴 수는 없으니 결국 나는 이쯤에서 아쉬움을 접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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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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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원숭이와 게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 본 것이다. 책날개에는 '일본 고전 민화'라고 되어 있는 그 이야기에 대해 알아야만 이 소설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타의 표현대로 후련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사와 할머니의 표현대로 독이 들어 있는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옛날에 원숭이와 게가 각각 감 씨와 주먹밥을 주웠는데, 게의 주먹밥에 욕심이 난 원숭이가 게에게 둘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주먹밥을 얼른 먹었다. 게는 감 씨를 심었고, 싹이 나고 감나무가 쑥쑥쑥쑥 자라나더니(…아무래도 동화다 보니-_-)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그 광격을 본 원숭이는 감에 또 욕심이 나 감나무 위에 올라가서 잘 익은 감을 쳐묵쳐묵. 아래서 바라보던 게는 원숭이에게 감을 좀 달라고 했고(감을 너 혼자 다 먹으면 안된다고 했다고도 하고. 얘기마다 조금씩 디테일이 다르다) 원숭이는 여봐란 듯이 딱딱하고 덜 익은 감을 게에게 던졌다. 게는 그 감을 맞고 죽어버렸고, 죽은 게가 배고 있던 새끼들이 나와 어미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약자들과 힘을 합쳐 결국은 원숭이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 이야기가 이 소설의 모티브라면, 결국 이 소설에서 원숭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게는 누구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준페이라면 게는 준페이일텐데, 준페이를 게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진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준페이가 맞긴 한가…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아 가는 과정이, 내게는 이 리뷰를 쓰는 것일 테다.



모두에게 기분 전환이 되는 남자 & 장래에 누군가 한 사람을 거물 정치가로 키우게 될 여자

이 소설은 3막 4장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막에서는 미나토 게이지의 뺑소니(를 가장한 살인) 사고를 목격한 준페이가 그를 협박해 한 탕 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도모키와 손잡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국 술집에서 일하는 준페이와 호스트클럽에서 일하는 도모키 둘 다 '가게에서 촉망받을 만한' 직원은 영 아닌 상황이라 미나토 게이지에게 돈을 뜯으려 하지만, 둘다 영 어설프기 짝이 없다-_- 그 과정에서 미나토 게이지의 매니저인 유코가 등장하고, 준페이와 유코의 주변 사람들이 소개된다.


2막에서는 분명히 협박자와 협박당하는 자로 만난  준페이와 유코의 위치가 이상하게 역전된다. 뺑소니 사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밝혀지면서, '어쩌다보니'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던 차에 도모키의 아내인 미쓰키가 TV에 출연하여 나름 유명세를 타게 되고, 매니저를 하겠다고 의욕에 불타던 도모키는 유코를 만나 조언을 듣기도 한다. 1막에서는 대립 관계였던 둘이 묘한 친분 관계를 맺게 되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 쓰잘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 그러다 준페이가 미나토 게이지의 사고와 관련해 괴한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생기고, 준페이는 유코의 명령에 따라 고향인 아키타로 돌아간다.



바텐더 출신 꽃미남 VS 베테랑 후보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3막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준페이는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며 즐겁게 지내던 차에 유코를 만나, 자신이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늘 도쿠다라는 거물 정치인에게 패하던 민생당에서 아키타 2구의 후보로 자신을 공천하는 것. 1막과 2막에서 등장했던 준페이와 유코의 주변 사람들-준페이의 매니저가 되는 도모키, 그의 아내 미쓰키, 준페이가 일하던 한국 술집의 마담 미키, 미키의 남편 고사카, 유코가 매니저를 했었던 첼리스트 미나토 게이지, 그의 조카 도모카, 그의 할머니 사와 등등-이 총출동해 준페이의 승리를 돕는다. 그리고 준페이는, 놀랍게도, 당선되어, 홍백가요전이나 한일전 축구만큼이나 국회 중계가 시청률이 올라가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준페이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이들 모두 불행을 잘 극복하여 그야말로 '그래서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결말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원숭이는 누구? 게는 누구?

앞부분에 언급했던 '원숭이와 게'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 혼자서는 미약한 존재들이 모여 서로를 도움으로써 불의한 강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고. 여기서 '혼자서는 미약한 존재들'이 게와 그를 돕는 것들이라면, 원숭이와 게의 전쟁에서는 준페이와 유코를 비롯해 그들을 도와주는 이들일테다. 용돈벌이로 3:2 그룹난교를 찍은 AV에 출연한 적도 있는 한국 술집 바텐더, 시골에서 올라온 술집 호스티스와 호스트 부부, 동생의 뺑소니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아버지를 둔 미대생, 거물 정치가를 키울 꿈을 꾸고 있지만 지금은 첼리스트의 매니저를 하고 있는 여자, 잘나가는 첼리스트지만 뺑소니(가 아닐 수도 있는) 사고를 낸 남자…하나하나만으론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인물들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함께 힘을 합친다면,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역설하는 거겠지. 미키의 말마따나 딱히 누구한테 괴롭힘을 당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보복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속상한 일쯤은 있게 마련이고, 그게 자잘한 일이라며 참고 살아가는 게 세상이겠지만, 가끔씩은 그 속상한 일을 참지 않고 싶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함께 해보라고, 연대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희망을 찾아 보라고, 그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삶의 숨통을 틔워줄 거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말이다, '근데 원숭이는 누구지?'라는 물음이 자꾸 나를 붙잡는다. 처음에는 불법 정치헌금을 받은 사오토메 오사무가 원숭이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사오토메 역시 결국엔 준페이를 도와주었으니 원숭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원숭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 남는 건 도쿠다뿐이다. 사와 할머니가 몇 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못된 놈, 못난 놈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던 국회의원. 자신을 필사적으로 보필해 국회의원으로 만든 유코의 아버지에게 뇌물수수 죄를 뒤집어씌우고, 유코의 어머니와 유코를 지키기는 커녕 헌신짝처럼 버려 버린 자. 그가 유일한 원숭이 후보다. 그렇다면 준페이가 게인가? 유코가 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도쿠다와 직접 마주 싸울 순 없으니, 그에 대적할 만한 또다른 정치인을 아버지처럼 길러내는,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를 갚는, 아기 게.


그렇다면 말이다, 준페이가 당선된 것은 결국 유코의 복수인데, 그것이 정말 약자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준페이 입장에서는 서른 살의 술집 직원에서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중의원으로, 천지개벽(!!!!)이라 할 만한 계층 이동을 한 셈이니 성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준페이가 도쿠다를 이기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는 게 단순히 1:1로 능력을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나눌 수 있는 문제인가. 어떻게 보면 준페이가 도쿠다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게 허락받은 것 아닌가. 즉 미약한 존재였던 게가, 원숭이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음으로써, 또다른 원숭이가 된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이 이야기가 큐트&럭키한 준페이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시원시원한 사건 전개를 보여준다 할지라도, 준페이가 공천받은 방법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주저하게 된다. 갖지도 않은 문서를 갖고 있다고 거짓말하여 공천권을 받은 계약이라니. 물론 '복수를 할 때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으로 공천권을 받고 준페이가 당선된 뒤에는 '결국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계속 있게 된 히로시'가 남지 않는가. 좋은 결과를 위한 히로시의 고귀한 희생인가? 아니면 준페이의 당선을 위해 히로시가 자신의 방식으로 도와준 것인가? 둘다 너무하는데-_-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옳은 것인가?

더 심각해지는 건 유코의 집념어린 자아를 맞닥뜨리는 장면에서다. 유코는 말한다 :  남을 속이는 인간에게도 그 인간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남을 속일 수 있는 거라고. 결국 남을 속이는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반대로 속아 넘어간 쪽은 자기가 정말로 옳은지 늘 의심해 볼 수 있는 인간인 거죠. 본래는 그쪽이 인간으로서 더 옳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세상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인간은 아주 쉽게 내동댕이쳐요. 금세 발목이 잡히는 거죠. 옳다고 주장하는 자만이 옳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므로, 남을 속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에게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거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과 자기가 옳은지 의심하는 사람 중 인간으로서 더 나은 건 후자이지만, 후자는 금세 세상에 발목이 잡힌다는 거다. 자기가 옳다고, 자신의 행동이 맞다고 큰소리내는 사람의 말을 세상은 들어 주니까. 문제는 마지막 문장이다. '옳다고 주장하는 자만이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결국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옳다고 주장해서 세상이 나를 옳다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것'인가. 내가 옳지 않더라도 옳다고 주장하면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지 않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내가 하는 행동에 나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걸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너는 틀리다고 말하지만 끝까지 자기는 옳다고 생각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해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바로 생각나던 게 4대강 사업이었다!). 힘을 가진 자가 '자기가 옳다는 믿음'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망쳐버린 모습을 너무 자주 목격한 나로서는, 그런 유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게 게들이 게들의 정의를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게들이라면 응원해 줄 수 없겠는데…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잘됐다, 잘됐어!

반드시 준페이를 이기게 할 거야. (유코)

준페이 씨에게 정권을 잡게 해 주세요. (도모키)

이 젊은이를 키우는 일은 우리 몫일지도 모른다.

준페이 같은 사람이 정말로 국회의원이 된다면 왠지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지 않아? (미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비교적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사실 부러움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에 젊은 배우를 연상시키는 꽃미남 국회의원이 당선된다고 해도 부럽겠지만(-_-*) 그보다 더 부러운 건 술집 직원 출신의 서른 살 청년이 국회의원으로 뽑힐 수 있는 세상이다.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별 것도 아니어 보이는 인간들이 모이고 모여 이렇게 또 별 것도 아닌 인간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미쓰키나 미키가 준페이를 처음 만났을 때 별 이유도 없이 호감 내지는 친근감을 갖게 된 것 역시 본능적으로 사람을 끄는 준페이의 매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도모키가 미쓰키의 매니저를 하는 것도, 후일 준페이의 매니저가 되기 위한 준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일본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는 거 알고,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저렇게 준페이가 국회의원이 됐다고 해서 뭐 대단하게 준페이네 동네가 좋아진 것도 아니라는 거 안다. 그렇지만 작년 총선과 대선…더 크게 보면 그 전의 대선과 지방선거…등등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열패감과 자조감을 맛봐야 했던 내 입장에서는 한나절의 짜릿한 오락거리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준페이의 연설을 기다리는 장면에서는 재작년 서울시장 재보선 때 박원순의 유세를 기다리던 때가 떠올랐다. 미키는 이제 거리낌도 없이 사람들의 어깨를 헤치며 앞으로 또 앞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걸어간다기보다 무언가에 이끌려 가는 느낌이었다…(중략) 백 명의 군중이 아직 아무도 올라서지 않은 선거차를, 마치 거기에 자기들의 '행복한 모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는 부분은, 아, 내 감수성이 촌스러워서 이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좀 뭉클한 거다ㅠㅠ 그리고 준페이가 당선됐을 때에는, 묘하게 카타르시스 비슷한 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도 작년 겨울에 원하는 후보가 뽑히는 경험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짜르르르 지나가기도 했고. 


그리고 이 소설에 흥미를 더해주었던 인물은 바로바로 사와 할머니ㅎ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준페이가 당선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진 않았지만 좋은 꿈을 꿔 준(준페이와 지역 노래방 대회에서 듀엣으로 노래해 전국대회 출전권을 얻는ㅋㅋㅋㅋ 이 꿈 엄청 상징적이다!!!!) 할머니. 남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도시락도 열심히 먹고 "먹는 거 말고 할 일도 없잖여."라 말하는 할머니. 나약한 말을 쏟아 놓는 나오코에게 "그랄 때일수록 맴을 단단히 먹고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해야 헌다. 모처럼 시골까지 왔으니께 주위 산이라도 바라보면 어떻게든 되겄지 싶은 맴이 들 거여."라 말하며 손을 붙잡아주는 할머니. 아이들에게 유아원에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며, 이 아이들이 모두 행복해지면 좋겠다,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언젠가 마지막에는 꼭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가가는 할머니…너무 귀여운 캐릭터. 각 막의 마지막마다 사와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에필로그처럼 등장하는 덕분에, 마지막을 훈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요시다 슈이치가 사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을 쓴다면, 이 책보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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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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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우선 예쁜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이층의 잡화점, 선반마다 진열된 잡화들과 잡화점 앞에 서 있는 빨간 자전거는 아기자기한 생활의 느낌을 준다. 'OPEN'이라는 팻말이 걸린 녹색 문은 빼꼼 열려 있고 NAMIYA라는 분홍색의 잡화점 이름은 소박해 보인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의 짙푸름과 대비되는 황토빛의 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참 예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저런 잡화점을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삼청동이나 서교동에서 카페나 베이커리 간판을 걸고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7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기타로 필통이나 창호지나 볼펜을 팔고 있는 잡화점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소설을 읽은 후의 느낌도 그와 같았다. 책 뒷표지에 쓰인 문구처럼 참 예쁜, '가슴 훈훈한 이야기'였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그래서 책 제목에 쓰인 단어처럼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에피소드들이 하나둘씩 펼쳐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열 가지 기적!

기적 1 아내를 잃고 고독하게 살던 잡화점 주인 나미야 유지에게 삶의 활력이 돌아왔다.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면서 어떤 답을 해줘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그들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열심히 답장을 쓰면서 남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데 보람을 느끼게 된 것. 그러면서 나미야 씨는 몰라보게 생생한 모습을 돌아왔다. 먼지에 찌든 간판이 달린 잡화점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고민을 성의있게 들어주고 진심으로 함께 걱정해주는 공간으로 변하게 된 것.


기적 2 나미야 유지의 33번째 기일인 9월 13일 0시부터 6시까지 나미야 유지의 상담 창구가 부활했다. 그 날 나미야 할아버지의 상담 창구였던 잡화점 앞 셔터의 우편함에 누군가 편지를 넣으면, 33년 전인 1979년의 나미야 유지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었던 사람들은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내고, 나미야 할아버지는 미래에서 온 답장들을 읽고 마지막 상담 편지를 쓰며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기적 3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폴 레논이란 이름으로 고민을 담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나미야 할아버지가 본격적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하게 만들어 준 고스케는 우연히 나미야 유지의 상담 창구가 부활한다는 글을 읽고 답장을 쓰려고 잡화점 근처 바를 찾는다. Fab4라는 이름이 붙은 바에서 마담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 마담이 학창 시절 친구인 마에다의 동생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평생 모르고 살아갈 뻔 했던, 부모님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 내심 경멸해왔던 부모님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직 어떤 꼴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도. 그는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그 편지는 1979년의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전달된다.


기적 4 나미야 잡화점 앞으로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고 있던 2012년 9월 13일, 우연히 잡화점 안에서 몸을 피하게 된 좀도둑 3인에게 1979년의 편지들이 전달된다. 나미야 할아버지가 잡화점을 떠난 후에도 잡화점 우편함 안으로 들어왔던 편지들이 쇼타, 고헤이, 아쓰야가 숨어 있던 그 곳으로 도착하는 것이다. 졸지에 세 명의 도둑들은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답장을 쓰게 된다.


기적 5 생선 가게 뮤지션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던 가쓰로는 답장을 받고 안 풀릴 것 같았던 뮤지션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그리고 그가 만든 노래 '재생'은 오래오래 남아 남을 구원하는 노래가 된다. 비록, 그 자신의 목소리로는 아니더라도.


기적 6 길 잃은 강아지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던 하루미는 답장을 받고 세 도둑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아동복지시설에서 지내다가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한 그녀는 이모할머니 부부에게 은혜를 갚으려 호스티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 도둑의 답장을 받고 부동산 매매, IT 산업, 컨설팅 분야에 차례로 뛰어든다. 그리고 하루미는, 무토 사장이 된다.


기적 7 잡화점을 나서기 전, 세 도둑은 길 잃은 강아지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하며 밤 사이에 훔친 핸드백을 들여다본다. 세 도둑은 자신들이 함께 지낸 아동복지시설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러브호텔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의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 후 실행에 옮긴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핸드백을 열어보고, 그것의 주인이 바로 길 잃은 강아지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자신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마지막 상담 편지를.


기적 8 세 도둑은 깨닫는다.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을 연결하는 뭔가가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 같은 것이 있고, 누군가 하늘 위에서 그 끈을 조종하고 있다고. 실제로 가쓰로의 노래 '재생'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신 불러 큰 히트를 치게 한 세리, 그리고 고스케와 하루미와 세 도둑이 어릴 적 지냈던 아동복지시설이 바로 환광원이다. 그리고 환광원을 설립한 미나즈키 아키코를, 청년이었던 나미야 할아버지는 사랑했었다.


기적 9 청년 나미야 유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미나즈키 아키코는 평생 나미야가 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며, 그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전부 다 환광원에 바친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하늘 위에서 모두를 위해 기도할 테니."라 중얼거린다. 정말 그녀가 환광원을 지켜주듯이, 큰 화재가 났을 때도 시설의 아이들은 다행히 모두 목숨을 건진다. 세리의 동생을 구하려던 가쓰로의 희생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기적 10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뗴로 등장해서 착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소설이라니,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 아니겠는가. 물론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친 소년, 가업을 뿌리치고 제 갈 길을 간 청년,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호스티스가 된 여인을 '착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소설 속 에피소드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환광원과 나미야 잡화점의 사람들이 종국에는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훈훈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걸 보면, 착하다 아니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의도를 들여다본다면, 나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세상엔 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

그러니, 아 잘 읽었다! 하고 뒷표지를 덮어버리기엔 남는 생각들이 뒷골을 잡아당긴다. 이 착한 이야기가 현실에선 절대 가능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씁쓸함이라면, 다음으로 밀려드는 건, 왜 현실에서 가능할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이다. 답은 당연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선 엄청나게 착한 사람도 또다른 상황에선 지독하게 못되먹을 수 있으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나 선한 의도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그 의도로 인한 결과까지 선할 수 있는가를 따진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소설 속 인물들 중 악한 의도로 특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환광원을 세운 아키코 씨와 고민 상담을 시작한 나미야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다들 좋은 마음가짐으로, 착실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가족을 구하려 한 고스케의 아버지는 회사를 부도낸 채 도망쳐 자살했다.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직원들도 모두 각자의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가족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가쓰로는 세리의 동생을 구하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가쓰로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내키는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해도 가게 일을 돕겠다며 나선 아들에게 너만의 발자취를 남기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며 떠나보낸 아버지는, 그 때 내가 아들을 잡았더라면 아들이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남은 평생을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하루미는 또 어떤가. 비록 그녀가 성공해서 이모할머니 부부의 은혜를 갚고 환광원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그녀가 돈을 벌 수 있었던 첫 번째 방법은 투기 아닌가. 부동산을 싼 값에 사고, 비싼 값으로 팔고, 또 다른 부동산을 사고, 또 비싼 값으로 사는, 거품 경제 시기에나 가능했던 '돈이 돈을 버는' 방법. 그것이 부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일 수야 있었겠지만, 착실하고 열심히 사는 방법이었을까. 선한 의도에서 나온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지 이 소설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은 '그들'의 이야기를 빼놓았을 뿐.



착한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착한 세상은 어디에?

더 심란해지는 것은 결국 이 소설은 착한 성품을 가진 개인의 힘에 대해 얘기할 뿐인가, 하는 지점에 봉착할 때이다. 옮긴이의 말에 나타나 있듯이, 이 소설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이다. 착한 성품을 가진 개인들이 열심히 착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듯 착한 개인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소설 속의 사회는 하나도 착하지 않다. 쇼타네 3인방, Green River라는 이름으로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던 미도리, 세리, 하루미, 고스케…모두 어찌 보면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사회는 이들을 끌어안지 않고, 궁지로 내몰아가거나 무관심하다. 이들이 의지할 데라곤, 낡은 잡화점의 고민 상담 할아버지 뿐이다. 


한편으론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선량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을 도와주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참 중요하구나! 라며 박수치고 말아버리는 건 너무 나이브하고 쉬운 결론이다. 나 아닌 남을 도울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신뢰를 몸과 마음에 익힐 수 있게 해 주는 사회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나미야 할아버지의 선량한 마음 덕분에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 없이 오직 선한 개인의 힘만 역설하는 것은, 세상이 이 따위로 되어 버린 탓을 결국 개인에게 돌릴 뿐이다. 우리가 착하게 삶으로써 착한 세상을 만들자는 핑크빛 목소리가 이 징글징글하고 꾸덕꾸덕한 사회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몇 가지!

하지만 '나미야 할아버지'라는 개성적 캐릭터와, 내게도 한 번쯤 일어났으면 싶은 '과거와의 만남'이란 모티브는 매력적이었으며, 인물과 인물들의 삶이 얼키고 설키면서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되고 각각의 인물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읽어볼 만 한 이야기인 것 역시 사실이다. 나의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삶의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음을 새삼 깨우쳐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다는 네트워크 이론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손글씨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했고.


'고민 상담'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오랜만에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직업상-_- 타인의 고민을 듣고 해결 방안을 함께 찾아야 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은데, 사실 나는 고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고민이란 자신이 원하는 답과 선택해야 할 답이 다르거나, 원하는 답을 선택할까 말까 하는 자신에게 누군가 확신을 좀더 심어줬으면 좋겠거나, 원하는 답을 행동에 옮기려고 확신하고 있는 자신에게 좀더 위안받는 시간을 주고 싶어할 때 생긴다. 그래서 상담이란 게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에 가깝지, '남에게 답을 내 주는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상담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상담자가 아닌 내담자의 것이고, 따라서 내담자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바로서야 한다. 상담자가 아무리 A다 A다 해도 내담자의 마음 속에 B밖에 없다면 상담자의 말 따위 먼지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상담자는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에 내담자의 생각과 다른 나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함께 밟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고민을 상담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심리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나미야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상담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는 걸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내 생각을 주입시키거나 요구하지 말고, 나 역시 틀리거나 오해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나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당신'을 존중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가야 하는데, 과연 잘 해왔는가. 반성해 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상담할 때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에 대한 내 생각도 어느 정도 얘기해 주지만, '결국 선택은 네가 하는 거'라고 한 발짝 물러선다. 부족한 내 지혜로 상대방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다는생각으로 망설이느라고, 정말 말려야 할 상황에서 더 강하게 말리지 못하거나 더 확신시켜도 될 상황에서 밀어부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늘 적절한 답변을 해 주는 (것 같은!) 나미야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상황에 딱딱 맞는 해답을 내놓고 싶다는 상상을 잠깐 해 보기도 했고. 물론 내 성격에 소문이라도 나면,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정성들여 수많은 답장을 쓰긴 커녕 스트레스만 받다가 '에라이 다 귀찮아' 하고 잠수타 버릴 게 뻔하지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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