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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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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p.366)
모든 걸 얘기해주는 텍스트가 있고, 얘기해주지 않는 텍스트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관객들은 끝날 때까지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남은 생이 얼마나 되는지, 어쩌다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인물도 말해주지 않고, 감독이 화면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이런 텍스트를 좋아한다. 특히 소설의 경우, 서술자의 외피를 쓴 작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소설 속의 상황을 꼬치꼬치 해석하고 설명해 주면 흥미가 뚝 떨어진다. 자신의 작품 속 세계에 대해 100퍼센트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창작자나 창작자에 의해 100퍼센트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는 작품 속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답답한 건 창작자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아니라 창작자가 던져놓는 오직 단 하나의 답이다.

이런 내 기준에 따르자면,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후자이다.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작가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자신만만하고 거침없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펼쳐보여주던 작가가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는 확실한 해답이 없는 이야기라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이기호의 전작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 되었다. 다 읽고 나서도 계속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이야기, 그게 내겐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눈에 띄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실' 이외의 세계들. (p.192)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실린 소설들은 다들 명쾌하지 않다. 그래서 김 박사는 누구라는 거야? 그래서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던 삼촌은 '오백원 갖고 튄 년'과 정확하게 무슨 관계라는 거야? 그래서 기증자의 딸이 전도사님한테 침을 뱉었다는 거야? 그래서 P는 어떻게 됐다는 거야? 끊임없이 질문들을 만들고 또 만들 수 있다. 이 불명확성은 전달자 혹은 매개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의 삼촌이나 <화라지송침>의 아내, <탄원의 문장>의 최나 P, <이정-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의 이정 아들이 무슨 말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매끈하게 언어화해 전달해 주는 사람도 없고 통로도 없다.

하지만 과연 그 말과 생각이 전달된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그 말과 생각이란 게 애초부터 매끈하게 언어화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일까. 인간의 이해와 인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뜻을 너에게 정확히 이해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것을 꼬치꼬치 전달하려 기를 쓰는 건 계획된 실패를 피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을 수는 없고. 이 상황에서 작가/서술자가 선택하는 건 생략이다. 전달자/매개를 차단함으로써 불명확성을 획득하는 것.

그래서 글을 읽는 '나'에게 전달되는 '너'의 이야기는 여백이 많은 그림 같아 보인다.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무엇. 소설집 맨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도 '삶의 여백'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을 설명하며, 작가 스스로 이런 문장을 소설 속에 써 놓기도 했다. : 이 이야기는 어쩌면 프라이드를 위해, 삼촌의 이야기를 모두 여백으로 돌리고, 계속 한강시민공원 주위를 맴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이제 그 여백을 채워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p.86)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 아닐까? (p.164)
그런데 내겐 여백이 아닌 공백처럼 보인다. 그냥 텅 비어 있는 것. '너'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해의 주체인 나에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진실 아닐까. 그렇기에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난 후 내 눈 앞에 떠올랐던 그림은 1인칭의 옷을 입고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너'들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3인칭의 세상과 부딪쳐 조각조각 깨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김 박사가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던 삼촌이 '오백원 갖고 튄 년'과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모른다. 기증자의 딸이 전도사에게 침을 뱉었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P가 풀려났는지, 최를 얼마나 때려왔는지, 박수희와는 무슨 관계였는지, 탄원서를 써 준 교수(서술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너'들은 답해주지 않는다. '너'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너'들이 알 수 없는 것들뿐만 아니라 '너'가 알더라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실재하기에, '너'들은 독자인 '나'에게 꼬치꼬치 '너'가 만든 세계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공백으로 둠으로써, 알 수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 들이 엄존함을 깨끗이 인정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달 후, 자신이 또다시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p.220)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프고 어렵다.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없다면 지나간 삶에 대해서라도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할텐데 그것조차 안 된다니, 어쩌란 말이냐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소설집의 서술자들이 본격적인 '썰'을 풀어놓기 전,  회한이 짙게 묻어나오는 탄식을 내뱉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그 후로 석 달 넘는 시간 동안 최가 어떤 방식으로 탄원서를 쓰게 될지,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예상했더라면……나는 물론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이 글 또한 세상에 없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p.198, <탄원의 문장> 중)

솔직히 나는 지금도 그가 왜 두루마리 휴지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선 명확히 알지 못한다. (중략) 그저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하는 마음들, 강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하는 짐작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중요한 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p.263, <화라지송침> 중)

나는 삼촌에 대해서, 또한 프라이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든 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삼촌은 다시 저만큼 달아났고, 무언가 흩어진 퍼즐을 거의 다 맞췄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모양의 조각이 튀어나와 그림을 한순간에 원점으로 만들어놓았다. (p.83,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중)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한다. (p.339)
그러나 그 패배감 때문에라도 '나'는 알 수 없는 것/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가 '너'의 경험을 직접 해 보고, '너'의 목소리 대신 '나'의 목소리로 얘기해 보면서 '너'의 공백에 공명을 만들어야 한다.  소설을 읽는 행위가 가치 있는 건 소설가가 써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과정이 그것이기 때문 아닌가. 그 과정을, 나는 '나'와 '너'의 공명이라고 생각한다. 

김 박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최소연은 이렇게 절규한다 :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p.130, <김 박사는 누구인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글 쓰는 이'를 수신자로 하고 있는 듯, 최소연의 이름을 빌려 이기호가 독자들에게 고백하는 듯. 앞으로, 독자들에게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정말 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그 이야기가 '정말 네 이야기'라면, '너'는 '나'에게 단 하나의 답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현란하고 화려한 색상의 반바지가 정말 반바지인지 트렁크 팬티인지,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지 말해주지 않아도 되고 말해줄 필요도 없다. 그냥 반바지라고 믿으면 되니까. 어차피 그 반바지가 트렁크 팬티인지 잘 분간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이기호 소설이 더욱 기대된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분간하지 않고,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그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를 더더욱 궁금하게 해 줄 테니까.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이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듯이.

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 오후, 나를 '씩씩' 거리게 만들어, 도시가스관을 타고 올라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반바지일까, 팬티일까, 김 주석일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다 끝낸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을 잘 모르겠다. 혹시, 니코틴 때문은 아닐까? (p.366)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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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9-07-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고의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