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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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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무심하고 무심한 것은 무섭다. (p.50)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아버지가 어디에선가 구해 오신 사진집이 한 권 있었다. 국내외 매체에 보도되었거나 보도될 뻔 했으나 잘린 사진들이 가득 실려 있던 책이었다. 마루에 벌렁 누워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나는 한국의 현대사가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본 사람들에 대해 다른 책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을 통해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외웠고,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으며, 5.18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한국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를 선택해 조사를 해 온 후 발표하는 과제를 하게 되었다. 5.18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호기롭게 도서관에 가서, 5.18 혹은 광주라는 말이 들어간 책들을 원형 책상 위에 와르르 쌓아 놓았다. 해가 잘 드는 1층 열람실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 권 한 권씩 책을 훑기 시작했다. 물론 페이지를 술술 넘기진 못했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으니까. 발길질 소리가, 비명 소리가, 날리는 핏방울들이, 페이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두 쪽 가슴이 잘린 여인' 얘기에서 결국 잠시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으면서, 봄날의 토요일 오후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열 여덟 살의 나와, 흑백의 청년들을 보며 등허리를 꿈틀댔던 열 살의 내가 자주 떠올랐다. 아주 무서운 세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 육체적 고통이 우선하는 세계, 발길질과 비명 소리로 피칠갑된 세계가 지척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화살처럼 피부에 박히는 온갖 감정들을 처음으로 느꼈던 때가 바로 그 순간들이었나보다. 



세상은 똑똑허지 않고 야물지 않고 영리허지 않으면 사람을 바보 천치 농판 취급을 헌다.

그런 세상을 내가 어치게 해야 쓰것냐. (p.46)

소설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 대숲에 이는 바람, 한여름 밤, 바람의 말, 강 너머 미루나무. 1, 3부 격인 대숲에 이는 바람과 바람의 말은 전라도의 시골 마을 새정지에서 온갖 폭력에 노출된 채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가는 정애를, 2부 격인 한여름 밤에서는 새정지에서 정애와 어울려 지내다가 광주에 올라와 여러 사람을 만나는 묘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4부인 강 너머 미루나무에서는 정애의 죽음 이후 묘자에게 일어난 일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서술된다. 


이웃의 손에 이끌려 간 투전판에서 재산을 날린 후 직업까지 잃은 정애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돈을 벌러 가겠다고 결심하고, 어린 딸 정애에게 어머니와 동생들을 맡긴다. 우리 집의 희망을 위해서는 너의 희생이 필요혀. 니가 엄마 노릇을 좀 해라이. 어쩔 것이냐, 이것이 내 운명이다 허고 사는 수배끼는. 내가 왜 부잣집에 안 태어나고 요런 물짠 집에 태어났으까, 원망하는 수배끼는 달리 수가 없다-고 딸에게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아버지가 떠난 후 정애네의 형편은 갈수록 악화된다. 정애네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정애와 정애 동생 순애는 동네 사람들에게 강간당한다. 결국 순애와 아버지, 어머니를 차례로 보낸 정애는 남은 두 동생과 함께 마을에서 쫓겨난다. 니가 지금 사는 것은 즘생이나 한가지니 우리가 살아갈 방도를 주선해 줄 때 조용히 가라고 협박한 동네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은 정애네 식구의 삶을 짐승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지,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마도 아니었겠지.



난리 난 뒤끝에는 미친년, 미친놈 생기게 마련이여. 세상이 돌아부렀는디 사람인들 온전헐 수가 있가디.

그중에 특별히 더 모진 꼴 당해불면 미쳐불제. (p.114)

묘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광주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 도시에서 정애와 재회하고, 숙자 씨와 박용재와 오남수를 만나고, 또 용순과 재회한다. 1980년 5월,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던 그 봄날의 한밤중에 군인들에게 변을 당한 정애와, 이유 없이 '폭도'로 몰려 두들겨맞고는 시위대에서 '악'을 몇 번 썼다가 채증을 당해 상무대와 교도소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박용재와, 공수부대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오남수와, 오남수에게 찰밥을 해 먹이며 수발하는 새정지 사람 용순을.


상처는 그림자가 길다. 트라우마는 오래 남는다. 5월이 다가오자 박용재의 머리와 가슴 속에 똬리 틀고 있던 짐승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활개를 치더니 박용재를 씹어 삼킨다. 박용재는 짐승이 되어 짐승의 말을 하고, 자신을 짐승으로 만든 짐승들을 죽이고 싶어 하고, 자신의 아이도 짐승일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박용재는 묘자에게 칼을 겨누고 묘자는 박용재의 목을 조른다. 묘자가 교도소에 가자 용순은 묘자의 돈을 말도 없이 가져간다. 예전에 정애네 강아지를 훔쳐갔듯이.


정애는 약을 먹고 미친년 소리를 들으며 길거리를 헤맨다. 고향으로 가야겠다며 새정지행 버스를 탄다. 해마다 종자와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사서 농사를 지어 봤자 빚만 늘어나는, 옛 마을로. 떠난 사람들이 남긴 집과 논과 밭을 박샌이 사서 부자가 되는, 고향으로. 정애네 돼지를 빼앗아가고 정애의 아버지를 죽인 박샌이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신뢰를 받으며 새로운 이장으로 마을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새정지로. 


그렇게 다들 미친 세상에서 미친년, 미친놈이 되어분다. 우리집 다무락에 도야지 피는 끈적끈적 이발소 솥단지에 도야지 지름이 찐덕찐덕…



그 말은 사람이 말로는 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 터져나오는 소리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먹을 수 없는것이 당연한 것이고 (p.184)

누군가는 이 소설이 불편할 것이고 불쾌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인데,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냐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이렇게 지독한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며 작가를 향해 욕지기를 내뱉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설 속 사건의 대부분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묘자와 정애의 모델이 된 분들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창비에서 만드는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듣고(http://blog.changbi.com/lit/?p=16636&cat=1454 또는 http://soundcloud.com/changbi-managers/8-1), 나는 스톱 버튼을 누른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랬다. 이제까지 내가 5.18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다 마네킹 같은 거였다. 공식적인 언어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누구나 이해하고 알아듣기 쉬운, 그런 말이었다. 광주에 한 번 가 보지도 않고, 5월을 직접 겪어본 사람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채, 그런 언어로만 5.18을 '외운' 주제에, 5.18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몰랐고, 어쩌면 모르고 싶어했으면서. 5.18의 민낯을 마주대하는 게 두렵고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어차피 남의 일이고 이미 끝난 일이라 되돌릴 수도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년에 두세번 5.18에 대해 떠올리는 것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으면서.



죽지 않은 것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이고 죽은 것은 간단하고 조용하다. (p.71) 

정말 5.18이 끝난 거라면, 세상은 이제 멀쩡해졌고 행복해졌고 온갖 미친년과 미친놈들도 다 치유됐다면, 이 이야기를 더 할 필요도 없을 테고 더 들을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아니잖은가. 그 이후로도 광주에는 5월이 끊임없이 찾아왔고, 묘자에게는 정애가 찾아왔고, 정애가 찾아오던 날 묘자가 보던 자정 뉴스에서는 유산 문제로 싸우는 재벌 형제와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나오고 있었잖은가.


나는, 너는, 우리는, 유산 문제로 싸우는 재벌 형제를 부러워하면서 재벌 형제처럼 되고 싶어했을 거다. 더 잘 먹고 잘 살려면 '이미 지나간 남의 일' 따위엔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번지르르하게 자기를 꾸미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을 거다. 사실 나와 닮은 건 재벌 형제가 아니라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가족인데.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이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가족이고 정애고 묘자고 박용재고 오남수인데. 그러니까, 정애는 나고, 정애는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정애를 잊지 않고 묘자를 잊지 않고 박용재와 오남수를 기억할 거다. 광주의 5월을 기억해야 하고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광장에서 제 몸에 불을 붙이고 크레인 위에서 제 목을 맨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종탑 위와 철탑 위와 송전탑 위에 올랐던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그들이 나고, 내가 그들이니까. 그들이 진짜로 죽는 순간은 사람들이 그들을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니까, 간단하고 조용하게 끝나버리지 않도록, 복잡하고 시끄럽게 그들에 대해 얘기할 테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으나 차마 말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차마 말로 다듬어지지조차 못하고 입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소리들을 내 입으로 내 보고 되뇌어 볼 테다. 융구 쇼바 슝가 아리따 슈바 슈하가리 차리차리 파파,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 라고.



우지 마소 꽈리때깔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참지름으로 밥 비벼줄게 우지 마소 (p.195)

많은 장면에서 울컥 울컥 했었다. 묘자가 수세미 싹을 엄마라고 부르던 장면, 박용재의 시체 앞에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장면, 교도소 안에서 정애를 만나던 장면…쓰려면 끝도 없지만, 지금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정애가 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참혹한 일을 가장 많이, 가장 심하게 겪은, 약하디 약한 정애가 얼마 되지도 않을 제 밥을 제 아닌 존재에게, 심지어 그림자에게까지 나눠 먹이는 장면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를 받았다. 잔인한 사람들과 지독한 고통 앞에서도 울거나 화내거나 소리지르는 대신 노래를 부르던 정애는 밥을 나눠 먹임으로써 생쥐의 엄마가 되고 그림자의 엄마가 되고 산 것과 죽은 것과 모든 것들의 엄마가 된 건 아닐까. 그래서 바람을 타고 달빛 속으로 들어가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또 오르면서 노래부르고 춤출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세살짜리 정애가 열살짜리 정애를 이끌고, 열살짜리 정애가 열다섯 정애에게 더운 숨을 불어 넣고, 서른살 정애가 달려오고, 쉰살 정애가 노래하고, 백살의 정애가 춤을 추는 그 아름다운 장면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피부에 와닿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열 살의 나, 그것을 공포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던 열 여덟의 나, 그 둘이, 책을 읽는 내 속에 들어와 함께 눈을 빛내다 슬퍼하다 괴로워하다 웃다가 울었다. 덕분에 나는 정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정애와 늙은 정애 들이 뒤엉키고 끌어안고 매달리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 장면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고마웠다.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독하게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정애를. 그녀가 외우던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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