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 아픈 거 보니 또 환절기
환절기가 오면 마음에 오래 묵혀 빚은 이름이 가끔 이유 없이 버겁다. 오랜 이름에 오래 취하는 것은 사실 오래 묵혀 궁굴린 스스로의 탓이다. 낮에도 밤에도 몰래 혼자 만진 사람의 탓이다. 어떤 이름은 시간과 함께 봄날 꽃먼지처럼 바스라져 흩어지는데, 또 어떤 이름은 기어이 아픔이 되겠다며 시간에 젖고 절어 한없이 눅눅해진다. 눅눅한 이름에 병들어 본 사람은 시간을 강에 빗대는 말이 클리셰임을 알아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흩어지는 이름을 좋은 이름이라고, 오래 남아 버거운 이름을 나쁜 이름이라고 부르고 싶은 욕심에 지는 때가 있다. 어제에 못 박혀 고칠 수 없는 이름이 그 젖은 손을 뻗어 쉼없이 오늘을 건드린다면,
그러면 가끔은 마음의 뚜껑을 열고 그 이름을 넌다. 조악한 손부채라도 펼쳐 이름을 끝없이 흔들어 말린다. 송곳같이 뾰족한 아픔이 간지러움이 되고, 해가 갈수록 쉬워지는 체념이 후회를 먹먹함으로 바꿀 즈음, 그때쯤 기침처럼 환절기가 끝날 것이다.



_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달콤했던 장면까지만 보고 일어나고 싶어졌다. 그 뒤는 보고 싶지 않아. 달콤했던 부분들만을 도려내어 언제까지고 반복해서 보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사랑과 연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달콤함만으로 계속 연결되면 안 되는 걸까? 오래오래 내내 다정하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좋은 사람이고 네가 좋은 사람이라면 함께하는 것도 좋으면 되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_ 이유경, 『잘 지내나요?』
_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_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_ 우리는 우리가 잊었던 것을 결코 온전히 되찾지는 못한다. 그 점이 어쩌면 좋을 수도 있다. 과거를 다시 찾게 된다면 그 충격이 너무 파괴적이어서 우리는 그 순간 왜 우리가 그토록 그것을 동경했는지 더이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그러한 동경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안에 깊숙이 가라앉아 망각된 것일수록 더욱더 잘 그것을 이해한다. 입안에서 맴도는 잃어버린 단어는 그것을 찾는 순간 데모스테네스 같은 날개를 달아 비로소 우리의 혀를 풀어주듯이, 지난 삶 전체의 무게로 무거운 망각된 삶은 이제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아마 망각된 것을 그렇게 무겁게, 그렇게 꽉 차게 만드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거기 순응하기 어려울 잊혀진 과거 습관들의 흔적들이 아닐까?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