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찍 일어나 빨래를 하고, 옥상에 내려 앉은 눈 위를 삽작삽작 걸어보았다. 여전히 눈이 좋은 걸 보면 syo는 아직 애든가 개든가 그런가 봉가. 눈 내리는 신림 사거리의 밤은 적당히 분주하고 적당히 촉촉하여 내려다보기 참 좋았다. 오래 내려다보기에는 좀 추웠다. 네이버는 영하 1도라는데, 피부는 그 사실을 격렬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겨울이 혹독한 곳에서 두 번의 겨울을 온전히 보내고 돌아왔을 때, 늘어있는 거라곤 허세 뿐이었다. 영하 10도? 러닝 바람으로 구보하기 좋은 날씨지. 영하 20도? 슬슬 내복을 준비해도 좋겠어. 지금 생각해도 열라 웃기지만, 실제로 수은주가 영하 35를 찍는 모습을 육안으로 목격한 사람이라면 저 정도 패기는 보여줘야 할 것 같았어. 안녕, 나는 syo. 추위를 모르는 남자지. 사실은 영하로 내려가는 순간 1도건 10도건 100도건 무조건 춥다. 그리고 나이는 먹으면 먹을수록 더 춥다. 이젠 피부가 추운 게 아니라 뼈 안이 추워. 추운 게 아니라 시려 막......


카톡을 보냈다. 자기야 서울에 눈 온다 펑펑 온다. 답이 왔다. 오래 나와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 춥다. 실은 온몸을 달달 떠는 중이었지만 아닌 척 답했다. 흥, 나는 추위를 느끼지 않지. 그러나 실제로 찍힌 문장은 이랬다. "흐ㅜㅌ 나능 트뤼를늑기지 ㅇ랂지"


그래서, 안녕하세요. 트뤼를늑기지 ㅇ랂는 남자, syo올습니다.



2018 1월 : 22권



1. 집안의 노동자

: 탄탄한 자료를 가지고 단지 몇 개의 명제만 힘있게 증명하는 책. 그것들이 뭔지는 안 알려드리지롱요. 그렇게 털어 먹는 거 아니예요. 전반적으로 <캘리번과 마녀>로 가기 위한 준비운동 같은 느낌이다.


2.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 300쪽 되는 얇은(?) 책에 굵직굵직한 문학이론가들의 정수를 녹여넣어야 했으니 저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만한 분량의 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달성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제공하는 참고도서 목록이 또 독서 리스트에 추가되면서 이제는 이 놈들을 다 읽으려면 인생이 적어도 7개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은 상황이다.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자주 한다, 그 봉착.

3.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양자역학 지식 50
: 이걸로 양자역학을 다시 시작해보려는 생각은 역시 욕심이었다. 쉽고 간결하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양자역학이 입고 있는 신비의 옷이 조금도 벗겨지지 않았다.

4. 담론의 질서
: 솔직히 푸코가 쓴 건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정우 선생님의 해설과 푸코 사상 전반에 대한 세심한 설명이 하드캐리했다.



5. 미술사 아는 척하기
: 아는 척하기 책을 읽으면 얼른 아는 척하고 싶어지지만 꾹 참고 여러 권 읽고 나면 알고 싶어진다.

6.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 하나도 신비하게 살지 않았지만 알면 알수록 신비한 남자 벤야민. 아리까리한 그림자를 잡힐 듯 말 듯 던져주고는 휙 돌아앉는 콧대높은 남자 벤야민. 반드시 뭔가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깊이 있는 남자 벤야민. 생전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에게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그런 남자 벤야민.

7. 나의 첫 젠더 수업
: `첫 수업`은 이미 수료한 상태라는 걸 확인했다. 훗.

8. 공부 중독
: 아, 요즘 사는 게 전체적으로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졌나 했더니.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공부를 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던 그때를 다시 한 번.



9. 당신의 직업이 사라진다
: 이것 저것 다양한 분야의 재미난 일화들을 섞어 꽤 괜찮은 읽을 거리를 만들었으나, 역시 딱히 이거다 할 만한 통찰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10. 일자리가 사라진 세계
: 조목조목 불안한 전망을 제시하는데,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은 "대안"이라고 이름 붙은 챕터 안에 대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학을 개편하여 일자리가 사라진 사람들을 재빨리 교육시켜 다른 일자리에 투입할 수 있도록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과연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그 "다른 일자리"가 뭔지를 제시하지 못한다. 뭔줄 알아야 준비를 하지.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도 꽤 있다.

11.현남 오빠에게
: 눈 녹은 물이 얼어붙은 언덕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길을 다 녹이는 일이 내 맡은 바가 되지 못하더라도, 언덕의 허리께에, 가장 미끄러운 자리에 단단히 서서, 넘어진 이들에게 내밀 따뜻한 손이 되어 기다려야겠다고.

12. 시옷의 세계
: 김소연은 손보다 눈일까. 산문이 손에 꼽을만큼 걸출한 시인은 아니지만, 그 다정하고도 깊은 그의 눈길만큼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13.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사실 내 깜냥에 뭘 믿고 안 믿고를 따지겠느냐만은, 김서영 선생님은 역시 정신분석 분야의 믿을필더. 

14. 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
: 그냥 디립다 외우기만 했었던 푸리에 수식 일당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분명히 학교 다닐 때 다 배우고 시험도 보고 했던 자식들인데 모르는 사이처럼 서먹서먹하다. 이 책으로 좀 친해진듯.

15. 꽈배기의 멋
16. 꽈배기의 맛
: 너 이 자식, 네가 그렇게 웃기다는 소문인데, 과연 그런지 어디 한 번 웃겨 봐 하는 태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보기 시작하면 웃기기도 어렵고 웃기도 어렵다. <베를린 일기>만큼 빵빵 터지지는 않았지만, 3할은 무난히 친다.



17.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좋다. 좋은데 좀 현란하다. 현란한데 간혹 아름답고, 아름다운데 때로 졸린다. 졸다보니 오래 읽었고, 오래 읽다보니 가물가물하다. 

18.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점을 이어붙이고 묻는다. 왜 잇지 못할거라 생각했나요? 잇고 나면 이렇게 두 개의 점이 아닌 하나의 선일 뿐인데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조금 더 넓은 눈으로 글을 쓸 수 있다.

19. 난 네 편이야
: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 내 편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 또한 너무 든든한 일이다.

20.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
: 애들 읽히고 싶다. 읽힐 책은 있는데 애들이 없다. 그건 좋은 거 아닌가? 만세!?


21. 모스크바 일기
: 눈. 작은 것을 만나면 놓치지 않는 수준을 뛰어넘어 작은 것 안에서 기어코 큰 것, 많은 것을 읽어내는 벤야민의 눈.


22. 역사 고전 강의

: 이것은 역사 고전에 대한 강의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정하고 폭넓게 읽는 법에 대한 강의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좋은 책이 되기 위해서는 책 자체의 함량만큼이나 읽는 이의 함량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강유원 선생님께 배우고 싶은 것은 사실 잘 읽는 법 쪽이다.




22권이면 선방일까? 작년 기준 한 달치의 1/3~1/4 수준이다. 내 입장에 이것도 많은 것 아닐까.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닐까. 아닐까? 으아아아아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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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3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예요. 책 안읽고 공부만 할것처럼 그러더니, 공부는 안하고 책만 읽은 거 아닙니까!!!!!!!!!!!!

syo 2018-01-31 11:51   좋아요 0 | URL
그런 거 같습니다!!!!!! 으아아아아안돼

단발머리 2018-01-3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의 노동자>와 <캘리번과 마녀>를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서 참 좋네요.
전, <캘리번과 마녀>를 먼저 읽었는데, 이제 <집안의 노동자> 읽으면 되겠죠? ㅎㅎㅎㅎㅎㅎㅎ

공부는 살살 하세요~~~^^


syo 2018-01-31 14:06   좋아요 0 | URL
2월에는 꼭 캘리번과 마녀 읽는 게 목표입니다!!

아 소박하다ㅎ

2018-01-3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졔졔 2018-01-3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뼈가 시립니다...ㅠㅠ 건강조심하세요. 연말부터 독서가 주춤했는데, syo님 만큼은 아니지만 분발해서 좀 읽어야겠습니다. <집안의 노동자> <공부중독> 읽고싶네용ㅎ

syo 2018-01-31 16:43   좋아요 0 | URL
시린 뼈를 부여잡고 분발합시다!! 저는 공부를 하고 최졔님은 독서를 하시고......ㅎㅎ

책읽는나무 2018-01-3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엄지 척!!!👍👍
요런 이모티콘 처음 사용했어요!
넘 멋져서요^^

syo 2018-01-31 19:57   좋아요 0 | URL
가....갑자기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