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절망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국적과 신분과 계급을 떠나서, 절망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_백민석,『아바나의 시민들』
2
절망의 때를 헤아려 보다가, 난 헤아릴 수 있을만큼만 절망했구나, 하고 행복해졌다. 헤아린 절망들을 꼼꼼히 뒤적거리다가, 이런 것까지 절망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하고 또 행복해졌다. 하나씩 접은 손가락이 펴지면서 점점 행복해졌는데, 모든 손가락이 다 펴진 순간 모든 행복이 다 사라졌다. 너는 똑바른 삶을 살지 못했거나 너를 속이고 있구나.
아이들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당신과 나는, 휴우, 우린 이미 과거야. 한순간의 분노,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 그게 바로 우리라고. 이 땅, 이 붉은 땅이 우리야. 지금까지 있었던 홍수, 흙먼지, 바람, 가뭄이 다 우리야.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없어. ...... 우린 죽을 때까지 그런 신세일 거야. 캘리포니아로 가든 어디로 가든 우린 모두 쓰라린 심정을 안고 행진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맨 앞에 서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도 다른 사람들이 쓰라린 심정을 안고 똑같은 길을 지나겠지.
_ 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1』
문장과 행간이 절망으로 흠뻑 젖은 책을 야금야금 쪼개 읽으며, 매일 조금씩 절망을 배우고 있다. 절망을 어떻게 책으로 배우나 싶었지만, 책으로 된다, 의외로. 세상은 사람이 책을 통해 배운 희망을 두드려 깎아 먹지만, 책을 통해 배운 절망에는 크게 이자를 붙여주므로, 좋은 절망이라는 건 없겠지만 좋은 책을 만나면 배울 수 있는 절망이라는 건 있겠다.
그렇게 배운다고 해서 내가 이 순간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내가 겪은 절망을 되새김질해도 똑같다. 남이 겪고 있는 절망은 추측될 뿐이고, 내가 겪은 절망은 추억될 뿐이다. 사람은 오직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절망에만 절망한다. 절망은 현재진행 시제만 갖는 가난한 동사니까, 그래서 더욱 무서운 감정이다.
3
분노가 먼저냐, 절망이 먼저냐. 분노로 들고 일어섰다 엎어지면 절망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역시 분노다. 나는 이놈의 사회가 미친 덕에 분노도 쉽고 절망도 참 쉽다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고 있다. 진짜 분노는 행동을 낳기에 내가 분노라 믿었던 것들은 사실 짜증이었던 것 같다. 절망할 일이 너무 많기에 체념과 냉소로 방파제를 쌓는 습관이 생기고, 결국 절망적인 기분은 들어도, 밑바닥을 차고 올라오기 위해서 제대로 침잠하는 절망은 하기 어렵다. 그래서 행동은 더욱 희박해지기만 한다.




분노는 나를 이웃의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사회적 행위지만 사회적 짜증은 나를 거슬리게 하는 것에 대한 사적 반응이다.
_김규항,『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_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파악한 사실들과 주장들이 여러분에게 확고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데도 그러기를 회피하거나, 그 사실과 주장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현실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행동을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촉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_버텔 올먼,『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_줌파 라히리,『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권력은 우리의 몸이 의자에 파묻혀 나약해지기를, 우리의 감정이 스크린 속에서 허비되기를 원한다. 밖으로 나가라. 당신의 몸을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라.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함께 전진하라
_티모시 스나이더,『폭정』
4
입진보로 사는 일이 참 피곤하다. 분명히 입 밖으로 분노를 내뱉었는데, 내가 싸 놓은 분노의 빅똥이 내 눈에도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여전히 내 안에 분노가 있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그러나 만약, 내가 입진보가 아니라 진짜 행동형 몸진보였다면, 이 분노들이 표출되는 순간 내 안에서 즉시 방을 빼 줄까? 그건 별로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어차피 그 빈자리에 입주할 분노의 불쏘시개들은 매일 폭발적으로 재생산되고, 세상은 어째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얼마간 내 입이 분노청정지역이 되는 일은 없겠다. 글도 여전히 똥이겠다. 입진보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가끔 말이 헛나온다
혀가 이를 피해갈수록
말이 자꾸 교묘해진다
말이 교묘해질수록
발은 자주 덫에 걸린다
잇몸 위에 솟아 있는 어금니 반쪽
혀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밥알을 좌편향으로 굴릴 수밖에 없다
왼쪽 어금니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혀가 더 교묘해지지 않을 수 없다
_ 김태정 <혀와 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