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책 / 폴 서루 /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여행기를 읽지 않는다. 남이 다녀 온 남의 땅 이야기를 읽어 어디다 쓸 것이냐는 이유였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제일 즐기는 이야기는 남의 책 남이 읽은 이야기였다! 순간 정체성에 구멍나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이지만 syo의 s는 사실 "si종일관"의 s이므로, 나는 급히 일관성을 보수하러 나섰다. 평소 의지하는 멘토께 여행책 하나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라는 책을 권해왔다. 웃음기 싹 빼고 진지하게 권했다. 심지어 검색해보니 책 표지에 적힌 제목도 진지한 명조체였다. 심지어 빨강색이라서 궁서체와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진지함. 나는 침을 삼켰다. 신중히 리액션을 고르는 내게, 그분은 자신이 그 책을 읽고(손에 들고) 혼자서 훌훌 베트남에 국수를 먹으러 갔다온 여행기를 링크해 주셨다. 메인플롯을 "책-국수-원 비어-국수-침대-원나잇좌절-스테이크-설사-버스아저씨"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 이야기는 정말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만 여행기를 읽고 싶은 내 욕망을 증발시켜버렸다! 결국 어느 나라를 다녀온 책을 읽어야 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굉장히 포괄적인 제목의 책을 뽑아 들었다. 그랬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bad friends중 한 명인 이 여행기의 대가는 20페이지부터 대뜸 나를 아연하게 만든 것이다.

 

어떤 곳이 낙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면 이내 지옥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공리에 가깝다.(20)     

 

 

 

어린이책 읽는 법 / 김소영 / 유유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거였다. 인간 복제 기술을 완성하는 거였다. 그랬다면 나는 아마 차별, 범죄, 국론분열을 비롯해 우리 나라에 산적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자인 김소영 선생님을 복제해서 각급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 배치함으로써. 나는 이 책을 읽고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메시아고, 알고보니 나는 독서만능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땅의 평화와 밝은 미래는 말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도래하느냐 마느냐에 달렸으므로, 지금이라도 책쌤10만양병설을 주장해 본다. syo의 s는 알고보면 'sip만양병'의 s이므로.

 

아차, 그리고 꼭 인용하고 싶은 부분.

 

이런 책들(저자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내가 볼 떄 이건 분명 이지성과 그 워너비들이 싸놓은 종이뭉치들을 의미한다!)을 읽으면서 나는 어른이 아이의 독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기조를 본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어린이도 역시 '독자'라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가르칠 대상으로만 보는 것, 어린이의 생활과 개성을 무시하고 책 읽기를 최우선 가치로만 여기는 것이 과연 어린이와 책 사이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든다(나는 안 든다.) (24)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 스콧 피츠제럴드 / 김욱동 외 옮김 / 민음사

 

'짜장면vs.짬뽕', '엄마vs.아빠', '부먹vs.찍먹'이 같은 수준의 질문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명망있는 연구진의 오랜 연구 끝에 드러나길, 저 세가지 질문은 작동하는 방식이 천지차이다. '짜장면vs.짬뽕'은 기호와 기분과 기억의 문제다. 결정은 내가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오늘은 어쩐지 어느 쪽이 더 끌리는가, 최근에 먹은 것은 어느 쪽인가를 두루 고려해서 내려지므로 유동적이면서 내부적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엄마vs.아빠'의 경우, 이 질문에 대답을 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색함은 물론, 엄마 아빠의 현 위치, 그들과의 거리, 그들의 기분 상태 등등을 두루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유동적이지만 내부와 외부를 모두 고려하는 결정이 되겠다. 마지막 '부먹vs.찍먹'의 경우는 극단적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배제와 추방, 독점, 그리고 학살의 문제다! 탕수육은 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먹인데 당신이 찍먹이라면 우리는 기어이 피를 봐야 한다. 양보란 없다! 타협도,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많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봤어도 부먹에서 찍먹으로 개종하는 사례는 정말 한 차례도 목격한 바가 없다.

 

나는 피츠제럴드를 사랑한다. 물론 syo의 s는 'Scott Fitzgerald'의 s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와, 그의 문장과, 그의 문장이 겨냥하는 그것들을, 한꺼풀 벗기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한 그것들과, 그래도 기어이 그것들을 겨냥하는 그의 문장과, 그런 문장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스스로 그런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했던 잘고 약한 남자 피츠제럴드를 사랑한다. 그래서 내게 '도스토옙스키vs.톨스토이'는 '짜장면vs.짬뽕'에 가까운 질문이더라도, '피츠제럴드vs.헤밍웨이'는 '부먹vs.찍먹'에 가깝다. 나도 평소에는 대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의아해하다가도,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또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문장들 때문일까.

 

세상에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시간과 그녀의 시간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그는 아무리 영원히 찾아해메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만큼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팔의 근육이 저려올 때까지 그녀를 꼭 껴안을 수도 있었다. 그녀야말로 갖고 싶은 고귀한 그 무엇이었고, 분투한 끝에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옛날 어스름 속에서나 산들바람 살랑거리던 밤에 주고받은 그 속삭임은 이제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갈 테면 가라, 그는 생각했다.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_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분별 있는 일'」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김태정 / 창비

 

보부아르가 그런 말을 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편에 서 있는 한 지식인은 결코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곁에 서 있는 지식인일 뿐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한낱 룸펜 나부랭이지만, 부끄러움의 크기는 작지 않다. 읽기 때문이고, 읽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는 또 이렇게 말한다.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울게 하고 웃게 한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더 나은 환경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그러나 책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 그 모든 것들을 실천해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건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내가'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네들이 물대포라고 주장하는 그 미친 대포를 얻어맞으며 백남기 농민이 바닥에 나뒹굴던 순간, 나는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한 시간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내 작은 방 안에서 인터넷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처음에도 그럴 수 있었고, 나중에도 그럴 수 있었다. 모든 국면에서 가능했던 나의 걸음을 잡은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두려움? 귀찮음? 부질없음? 백남기 농민은 대학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고, 병원 길에 세워져 있는 농성텐트 앞을 나는 바닥을 뚫을 듯 깊이 고개를 숙인 채로 지나가야 했다. 그 감정은 또 무엇이었을까? 미안함? 죄책감? 부끄러움? syo의 s는 그저 'so시민'의 s였을 뿐이었다. 

 

김태정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노래했던 시 속의 모든 인물의 옆에 앉아 보았다. 그녀는 들었고, 이야기는 그녀의 약한 몸을 몇 바퀴 깊이 돌다 시가 되어 나왔다. 겪은 것들을 시로 썼고, 시로 쓴 것을 겪었다. 그렇지만 김태정은 끝없이 부끄러워했다. 겪고도 쓰지 못한 것과, 쓰고도 겪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다가, 쓰다가, 다시 부끄러워하다가, 쓰다가, 김태정은 떠났다.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알았을 때 그녀는 이미 존재를 비웠다. 그래서 나는 한 권의 시집을 두고두고 다시 읽어야 한다. 슬픈 일이지만, 이 한 권의 시집은 너무 무거워 나는 읽어도 읽어도 다 읽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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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8-2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 와 o 도 궁금해집니다. ㅎㅎ^^

syo 2017-08-24 23: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기회 닿으면 한 번 잘 갖다붙여 보겠습니다. 뭔들 못 만들까요, 어차피 멋대로 지어내는건데요 ㅎㅎㅎㅎ

다락방 2017-08-2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쇼님 부지런히 읽고 쓰네요. 전 오늘도 술 마시느라 읽고 쓰기 패쓰...(시무룩) 쇼님은 성큼성큼 자꾸 앞으로 나아갑니다.

syo 2017-08-24 23:52   좋아요 0 | URL
저는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휴무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7-08-25 07:12   좋아요 0 | URL
왜요왜? 어디 놀러가나요?

syo 2017-08-25 07:23   좋아요 0 | URL
서울나들이갑니다 ㅎㅎㅎㅎ

다락방 2017-08-25 07:26   좋아요 0 | URL
우앙 서울에서 뭐할건데요? @.@

syo 2017-08-25 07:27   좋아요 0 | URL
친구 결혼식가서 축가부릅니당 ㅎ

다락방 2017-08-25 07:28   좋아요 0 | URL
우앗 축가라구요????!!!!!!!!

syo 2017-08-25 07:30   좋아요 0 | URL
네 ㅎㅎ 그래서 오늘 저녁은 축하 연습, 내일은 결혼식, 모레는 원기회복 차원에서 휴뮤입니다

다락방 2017-08-25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제가 빠뜨렸는데요, 저도 피츠제럴드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로요. 혹시 그의 단편 <컷 글라스 보울>을 읽어봤나요? 진짜 어매이징한 작품이에요. 짱임요!

syo 2017-08-25 08:16   좋아요 0 | URL
읽어봤을 것이나 언제나 그랬듯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단발머리 2017-08-2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어린이책 읽는 법>의 어린이 독서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마음에 와닿네요.
읽어야할 책의 범위가 방대한 경우 필독도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아이들 필독도서를 읽히지 않는 엄마의 의견),
모든 필독도서를 읽어야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구요. 어린이들의 ‘감‘을 믿어봐야 한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스스로의 감으로 책을 고른 아이들이 오래 오래 책읽을 수 있고, 책 자체를 좋아하는 진정한 독자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구요.

아름다운 축가 부르시고요(알라딘에 음성 파일 올려주는 센스^^)
즐거운 서울 나들이 되시길요~~

북깨비 2020-06-12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남의 책 남이 읽은 이야기 저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