膝瑟
무릎이 아름다워 좋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나는 무릎을 무너진 흔적이 축적되는 부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의 무릎을 볼 기회가 생기면 꽤 유심히 보았고, 보다 보면 무릎의 주인이 더 좋아지기도 하고 그 반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무릎을 보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 적이 없진 않지만 그럴 때도 들불처럼 끓는 사랑의 손길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은 항상 무릎이곤 했다. 무릎의 역사는 깊고 아득하여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 전부를 캐어 올릴 수는 없다. 무릎을 만지고, 무릎에 입 맞추고, 무릎을 어루만지는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무릎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은 그 사람의 무너진 경험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 사람과의 사랑이 무너지는 경험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튼튼하던 그 사람의 무릎이 굳고 단단해지는 동안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 우기던 고집스런 사람의 마음은 실은 천만번 꿇어 무릎이 닳은 마음이었고, 우리는 서로가 무너지는 이유임을 끈질기게 외면하면서 서로의 방향으로 끝없이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밤, 마침내 그 사람은 내어주는 제 무릎이 부끄러워 돌아누웠고, 어루만지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던 손길이 부끄러워 나 역시 돌아누우면서 우리의 무너짐은 완결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무릎으로 스며들어 지난한 흔적이 되었다. 가끔 무릎을 만지며 환등상처럼 경험하는 무너짐의 흔적. 그 흔한 무너짐의 흔하디흔한 흔적.
가끔 무릎이 아프면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무릎보다는 아픈 무릎을 만졌으면. 흔적을 가지고 끈질기게 달려온 사람에게 무릎을 만져주는 정도의 사람이 되면 좋겠다.
--- 읽은 ---
253. 찌질한 인간 김경희
김경희 지음 / 빌리버튼 / 2017
무미건조하다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한 가지 뜻만 품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무미와 건조의 합이다. 실제로 잘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유미건조한 것도 있고, 무미촉촉한 것도 있다. 이 책은 후자다. 건조하진 않지만 특별한 맛이 없다. 담백하다고 표현해도 괜찮겠지만 밍밍한 맛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생기지 않는다. 백수며 퇴사며 다시 백수며, 역시 긴 세월 찌질함을 체화하고 있는 syo가, 다니던 회사를 관둔 스물아홉 젊은 청년의 고뇌를 모를 리 없다. 알고 봐도,
누구에게나 찌질한 순간은 있습니다.
찌질함의 기준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100%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부디 당신의 찌질함에 작아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니 우리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살아요.
_ 김경희, 『찌질한 인간 김경희』
254.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
사랑을 하고 했던 사람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게 이치라면 우리는 끝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가 사랑을 밀어올리도록. 반대로 사랑을 하는 사람보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면, 우리는 실패와 실패와 실패를 지나 다음 실패가 오기 전까지 지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 이번에는 사랑이 사랑 이야기를 밀어 올릴 수 있도록. 왜냐하면, 어떤 사랑 이야기는 진짜 사랑보다 아름답고 더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이니까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만 이메일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요즘 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걸 했던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시간의 의미가 타인에 의해서 판결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니 님은 요즘 어렵게 지내고 계실 것이 분명하고 이메일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저도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는 일만은 폐기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_ 김금희, 『경애의 마음』
255.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이 색을 가진다면, 그것은 눈과 같은 색일 것이다. 하얀색. 우리 눈이 잡아챌 수 있는 모든 빛이 들어 있는, 하얗다 하얗다 입에 올리다 보면 어쩐지 글썽이게 되는, 안도 바깥도 없고 왼쪽도 오른쪽도 없으며 오로지 떨어지고 떨어져 내리는 방향으로 흐르는, 말하려다 만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말한 것도 같은.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_ 이규리, 「정말 부드럽다는 건」 부분
--- 읽는 ---





경계인의 시선 / 김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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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루쉰 上 / 린시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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