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채
1
올해 1월에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형, 책은 왜 읽는 거예요?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러게?
조금 더 쉬운 질문으로는 이런 게 있었다. 오빠, 책을 읽으면 진짜 인생이 바뀌어? 음, 그런 사람 실제로 본 적 한 번도 없네?
2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종일토록 읽었다. 어제도 저녁 약속 전까지 줄창 읽기만 했다. 그리고 문득, 저런 질문들에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을 깨달았다. syo가 책을 읽는 이유에 관한 문제였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 그건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3
syo는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이 되었지만,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공대 나와서 행정직 공무원 하는 인간이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도 철학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단지 읽기 위해서였다.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책을 읽기 위해 라캉에 대해 읽었다. 마르크스를 읽은 것은 혁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유물론적으로 전개되는 책들의 페이지를 넘길 때 절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책은 다른 책으로 가는 징검다리였고, 그렇게 책과 책을 이은 선으로 어두운 인생에 별자리를 긋긴 했지만 그 별자리가 동서남북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밤이 있고 하늘이 있어서 별이 있듯이, 내가 있고 책이 있어서 독서가 있었다.
4
가장 나이브해 보이고 가장 진솔해 보이며, 동시에 가장 고수의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답인 ‘재미’ 역시 syo가 하는 독서의 목적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재미’라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 독서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독서가 수단이지 말라는 법도 없고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아니지만, syo에게 독서가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읽는 일이 미치도록 재미없을 때가 팔 할이다.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보름이 지나면 주인공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머리통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지식을 남기고자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수천 권의 책을 읽었으나 뭐 특별히 훌륭한 인간이 되지도 못했고, 이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다. 책이 이런저런 인연들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늘 책과 상관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생겨났다. 요컨대, syo에게 책 읽기는 늘 책 읽기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5
아무것도 이루거나 바꿀 욕심이 없는 인간에게 삶은 길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살해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하루를 읽으며, 읽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며, 나는 생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언젠가,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앞에 던져진 기나긴 시간을 활자를 통해 천천히 부드럽게 죽여나가기로 정한 것은 아닐까.
6
수나 양도, 진보나 혁명도, 재미나 의미도,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독서는 중요하지 않다. 책은 크고 값비싼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책에게 많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주말이 오면 저녁까지 책 위에 올려놓은 시간을 다른 책으로 탁탁탁 채 썰어 씹어 먹을 테고, 지친 일상의 목을 축일 테고, 아침이 오면 출근할 것이다.
--- 읽은 ---
53.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마쓰바라 다카히코 : 137 ~ 288
처음 읽는 물리학 책은 어때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길이 없다. 고등학교 때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 어쨌든 물리학에 뿌리가 있는 과목들의 지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풀고 시험을 치고 울고불던 세월이 8년쯤 되는지라, 이런 기초 책을 읽긴 읽지만 과연 이게 좋은 기초 책인지 그저 그런 기초 책인지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제 그만 읽을까, 이런 거?
54.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 67 ~ 128
통념적 의미의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 쓸 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가장 빛났던 것 같다. 사랑이나 사랑이 아닌 것 같은, 사랑이 아닌 것 같으나 사랑인, 그런 것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쓸 때, 그리고 그것이 덤덤하거나 담담할 때, 나는 그녀의 문장에 완전히 파묻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라는 소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 탓일지도 모르겠다.
55. 어중간한 나와 이별하는 48가지 방법 / 쓰루다 도요카즈 : 111 ~ 228
어중간하다. 이별해야겠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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