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겠다면
1
은둔공무원에게도 소식이 들어오는 걸 보면, 요즘 츄렌드는 <리뷰대회>인 모양이다. 『지복의 성자』 리뷰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읽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런 일폭탄 낙하에 그냥 궤멸되었다. 서재이웃님들 쓰신 걸 훑어보았는데, 마지막까지 읽고 썼다 한들 뭐가 되진 않았겠구나 싶다.
2
금주의 三이 소식.
뒤늦게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빠진 三은 어제 야심한 밤,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12시 30분 syo가 잠자리에 들고자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일어날 때, 맞은편에 고고히 앉아 〈사랑의 불시착〉6편을 보는 중이었다. syo는 고개를 젓고,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준 다음,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워 한자경 선생님의 칸트 책을 펼쳐 들었다. 두 페이지쯤 봤을까, “칸트에 따르면 초월적 구상력의 작용은 사유형식인 범주에 따라 직관형식인 시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통일성에 기반한 범주에 따라 시간 형식을 규정함으로써 초월적 도식을 형성하는 것이 초월적 구상력의 작용이다.”라는 대목을 만났다. 음? 뭐지? 음? 칸트는 왜 저랬지? 누가 칸트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그리고 한자경 선생님은 저렇게 말하실 거면서 뭘 또 굳이 ‘다시 말했’지? 음? 한 선생님한테는 또 누가 잘못했지? 난 아닌데??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기에 칸트에 따랐는데 눈떠보니 어쩐지 아침이었다. 놀라웠다. 역시 칸트. 같은 하늘 아래 숨 쉴 수 없는 두 존재, 칸트와 불면.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왼쪽을 쳐다보니 三의 매트리스 위 三이 있어야 할 자리에 허공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얘가 나보다 일찍 일어났다고? syo가 토끼눈(크기/모양)을 하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더니 토끼눈(색깔)을 한 三이 헤헤 웃으며 스리슬쩍 들어와 지 자리에 눕는다. 야, 니 설마……. 부끄러움은 아는지, 이불을 뒤집어 쓰며 三이 말한다.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어…….
12편까지 봤다는 후문이다.
오늘날 인간사가 한심한 상태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과거를 슬쩍 돌이켜보기만 해도 인간사가 늘 한심한 상태로 흘러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개인으로서든 조직사회의 구성원으로서든 인간존재들이 감당해야 했던 과중한 양의 온갖 곤란함과 비참함은, 처음부터 삶이 극도로 믿기 힘든 방식으로(나로서는 감히 어리석은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조직될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3
코로나가 왔는데도 봄은 오고, 어쩐지 이번 봄은 작년 봄보다 날씨가 좋고 대기 상태도 괜찮은 것 같아서 기묘하게 착잡하다. 주말에는 그래도 여유가 좀 있어서 어딜 가려면 갈 수는 있는데 갈 수가 없으니 갈 데까지 간 상황인지 오갈 데 없는 상황인지 갈피를 못 잡는 중이다. 산의 몸통은 하루 지나면 하루만큼 더 초록인데, 벚꽃 축제는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얼마 안 가 봄 코트도 더울 것이다.
4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마부가 석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관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귈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지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_ 김충규,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부분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 좋았다.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매일 보고 싶은 얼굴을 하고 사람은 잠이 들었고, 그 얼굴을 아마 나는 매일 볼 수는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머리를 쓸어주거나, 콧대를 천천히 훑어보거나, 그러다가 몰래 입술을 훔치거나 하면서, 한 손은 단정한 리듬으로 잠든 이의 가슴을 톡톡 두드려주면서, 그렇게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지겹지 않은 사람을 사랑해서 좋았다. 사람이 고된 낮의 흉터처럼 사나운 잠을 잘 때도, 펑펑 쏟은 눈물로 축축한 베개 위에서 멍든 꿈을 헤매고 있을 때도, 나는 나대로 어떤 다짐을 하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하면서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었지만, 슬프면서 좋았다. 아리면서도 좋았다.
나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얼굴을 사랑하는 취향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잠의 형태가 어떻든, 내가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만질 수 있는 몸을 하고 만질 수 있는 꿈을 꾸며 자는 사람은 사랑스럽다.
그런 밤이 매일 밤일 필요는 없겠지만,
가끔씩은 곁에 와 깊은 잠을 자 주는 사람이 있겠다면,
--- 읽은 ---
32. 바람의 무늬 / 강미옥 : ~ 160
: 시가 있는 사진과 사진이 있는 시는 자기가 모든 이야기를 다 해버리겠다고 다투면 안 된다. 걔네들은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일, 자기가 잘하는 일들에 집중해야 하고 나머지 것들은 그냥 서로에게 맡기고 비워야 한다. 그 신묘한 배합 비율을 맞추는 것은 어렵고, 시를 잘 쓰거나 사진을 잘 찍는 것 외의 추가적인 노고를 투입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syo는 아직 모르겠다.
--- 읽는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정희진 : ~ 96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 79 ~ 172
칸트 철학에의 초대 / 한자경 : ~58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 / 이윤규 : ~ 81
--- 갖춘 ---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