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말을 못해
1
자고 일어나면 다시 얼마만큼 되돌아가는 마음,
종이 위에 수요와 공급 따위를 뜻한다는 곡선들을 그려보고 이렇게 저렇게 옮겨가며 균형점을 몇 개씩이나 만들어도 보지만, 진짜 그건 모두 어디에 있는지, 만질 수 있는지, 만져도 되는지,
0도를 향해 낮게 낮게 깔리는 계절, 슬그머니 어젯밤보다 몸집을 키우는 오늘밤,
좋아한다는 말만으로 좋아질 수 있듯이, 행복하자는 말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 서울은 비 온다 밖이 한밤같이 깜깜해
2
심장은 통통배처럼 / 권혁웅
췌장 근처에 다도해가 있어서
거기를 랑게르한스섬이라 한답니다
백만 개나 되는 섬들이 출렁이며
혈당이 스며든 저녁 바다를 지킨답니다
참 기특하기도 해요, 고기 반 물 반이라면
어떻게 알고 물이 들고 나는지
소갈증이라면 또 어찌 알고
복령과 작약과 맥문동 따위가 피는지
그 연유가 참 두근두근해요
심장은 통통배처럼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옆에를 지나가고요
누가 그쪽을 기웃거리면
한 근쯤 얹어서 파도가 높아지니깐
그래서 두 근 반 세 근 반이라면
그 반 근씩은 어디서 떼어 와야 하는지
그것 참 신기해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더 신기해요. 이 세상에 제일로 신비로와요.
3
이놈의 매실차, 몇 사발을 퍼 마셔도 농도 맞추기에 늘 실패하는 이놈의 매실차를, 내까짓 놈이 제아무리 머리를 드륵드륵 굴려봐야 언제나 너무 달거나 너무 싱거운 이놈의 매실차를, 우리 집에서 먹는 사람 나밖에 없는데도 끝내 쉽게 자신의 진수를 허락하지 않는 이놈의 매실차를, 중간도 없고 저 아껴주는 사람 소중히 생각할 줄 모르는 꼴이 꼭 나 닮아서 애틋한 맘에 내가 마셔주는 거다. 매실차야 제발 정신 차려라. 너 계속 그 따위로 살다보면 결국 차디찬 냉장고 귀퉁이에서 끈끈하고 거무튀튀하게 굳어지고 말 거다. 아무도 널 만져주지도 마셔주지도 않을 거다.
4
아무도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게 없는 것만 같다. 오직 사랑만 가지고 말을 이어도 사흘 밤낮이 부족할까봐 부러 매운 소주를 마셔 눈물과 함께 뻗어 잠들었던 아이들은 어느덧 주택청약 가점사항을 점검하고 카시트의 가성비 정보를 공유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최소한 사랑을 이유로는. 왜 더는 사랑이 좋은 안주가 되지 못하는가. 가정은 사랑으로 만드는 것인 줄이야 진즉에 알았지만, 가정을 만들 때 사랑을 몽땅 소진시키는 줄은, 그래서 가정 밖에서는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새어나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사랑을 되도록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테이블 위에 툭 떨어진 사랑이라는 단어를 예의바르지만 최대한 빠르게 걷어치우고 건강 이슈로 그 위를 덮어버리는 게 어른의 일인 줄은 나는 몰랐으니, 사랑 하나 물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걸 뱉었더니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이미 너무 늦었으니, 앞으로도 나는 그냥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오늘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실패해서 아픈 사랑이 되었건 실패할 예정이라 아플 사랑이 되었건, 나는 계속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사랑이 말하기 부끄럽거나 듣기에 불편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도, 마치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불편하거나 불편함이야말로 부끄럽다는 듯이, 나는 끝내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_ 밀란 쿤데라, 『농담』
- 읽은 -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박상영 : 248 ~ 350
- 읽는 -








- 나무의 모험 / 맥스 애덤스 : ~ 53
-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802 ~ 926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 장회익 : ~ 77
- 노예국가 / 힐레어 벨록 : ~ 99
- 마키아벨리 / 김경희 : ~ 87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 피터 애덤슨 : 99 ~ 194
- 사라짐, 맺힘 / 김현 : ~ 64
- 주역의 정석 1 / 쩡스창 :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