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미

 

 

1

 

어영부영 11월이 되었다. 10월까지만 막 살고 11월부터는 열심히 살아줘야지- 하는 각오가 있었다. 각오야 언제나 있는 것이긴 한데, 그래도 11월은 중요하다. 11월도 망하잖아? 그러면 12월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각오는 하지 않게 된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2019년은 망했으니 2020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게 되면서 12월 한 달이 붕 뜨는 것이다. 내가 syo를 안다. syo가 나를 안다.

 

11월에는 평소 꼭 지식을 쌓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자꾸 포기하며 나랑 잘 안 맞는다는 사실만 재차 삼차 확인해왔던 앙숙, <경제학> 분야와의 랑데부를 성사시켜보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여기서의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을 말한다. 싫다고 모르면 몰라서 싫은 법이다. 공자님 가라사대 알아야 면장을 하는 법이니라. 그냥 독서로 끝낼 게 아니라, 아주 정석으로 수학공부 하듯 제대로 한 번 해보기로 하였다.

 

두 번째 목표는 저놈의 <2의 성>을 반드시 완독하고 말리라는 것 되겠다. 되게 어려운 책 아닌데 되게 안 읽어지는 신묘한 책이다. 이제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에 제대로 읽고, 책 박스 제일 하단 제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를 보낼 것이다. 옆 자리에 사르트르의 책을 함께 놓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예우겠다.

 

세 번째로, 그리스 로마의 옛 고전들을 좀 읽어볼까 한다. 이제 뭐만 읽으면 플라톤 찾는다고 투덜대기도 지친다. 그 투덜을 모아서 책을 읽었으면 플라톤 코털을 뽑았겠다.

 

마지막으로, 월간 결산 그놈을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돌아보면 그나마 이 보잘 것 없는 서재에서 걔만이 알라딘 월드에 한줌 보탬이 되는 애였던 것 같다.

 

 

2


 

할 말이 되게 많았고, 이번에 한 번 까보까 보부아르 한 번 까보까- 하는 불타는 마음 역시 준비되어 있었지만, 역시 격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이라, 비트주스 몇 잔 마셨더니 빨간 마음들이 빨갛게 배설되었다. 그리하여 말갛게 씻은 마음 고운 얼굴을 하고 그냥 한 대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자기의 자유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주체는 사물(현상속에서 자기를 모색하게 된다이것은 자기도피의 한 방법으로 매우 근본적인 경향이다어린아이는 젖을 떼고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면곧 거울 속이나 부모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소외된 실존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원시인들은 마나(초자연적인 힘)나 토템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문명인은 개인의 마음속이나자아와 명성소유와 작품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의 최초의 유혹이다페니스는 사내아이에게 '분신'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페니스는 그에게 자기 자신인 동시에 다른 객체이다그것은 장난감이고인형이며또 자기 자신의 육체이다 부모와 유모는 그것을 마치 작은 인격처럼 다룬다이로써 우리는 페니스가 어린아이에게 '그 개인보다 보통 더 교활하고 현명하고 영리한 제 2의 자아'가 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비뇨 기능과 그 뒤 나타나는 발기가 의지의 행위와 자연적 작용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에서즉 페니스가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의 원천이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변덕스런 존재라는 사실에서페니스는 주체에 의해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 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페니스 속에는 종()으로서의 초월이 쉽게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그것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페니스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는 거기에서 넘치는 생명력을 자기 개성에 통합시킬 수 있다그러므로 페니스의 길이와 오줌의 분출력발기와 사정 능력이 남자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 이해된다. (77-78)

 

아는 사람들에게는 물색없는 오지랖이 될 수 있겠으나, 우선 이야기하고 지나가고 싶은 부분은 소외라는 용어의 사용법이다. 철학에서는 소외를 일상생활의 어법에 비해 조금 더 폭넓은 방식으로 쓴다. 그 단어 안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긍정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자기 안에 자기의 부정이 있고 그 부정을 부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존재자의 성질이라고 보는 헤겔에게, 소외란 존재자가 더 풍부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까 일단 자기를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자기를 지양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인데, 소외란 그 타자화를 의미하는 셈이다. 심지어 헤겔은 정신이라는 게 있어서 그 놈이 자신을 소외시킨 것이 자연이라고 보는 듯하다.  소외라는 단어는 쟤들이 나를 따돌려 엉엉 이라는 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꺼내어 구현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셈이다. 보부아르가 위의 문단에서 사용한 소외 역시 그런 맥락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실존철학은 주체가 늘 초월하기를 압박하는데, 주체는 타자와의 결투 속에서만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페니스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상대자, 스파링 파트너, 페이스메이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 같다. 내 페니스가 나를 왕따시켜 엉엉, 이게 아니라. 물론 얘가 내 말을 안 들어- 정도의 일상적인 소외도 겪긴 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놀랍게도(혹은 하나도 놀랍지 않게도) 사실이다. 대학병원 비뇨기과에 앉아서 둘러보고 있자면, 중장년 남성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죽을상이다. 딸뻘은 되어 보이는 간호사를 붙잡고, 선생님 선생님 약물로는 안 되나요, 꼭 전립선에 칼을 대야 하나요, 사정사정 하는 어느 환자를 보았고, 그 환자를 심각하고 애달프고 감수성 넘치는 얼굴로 바라보는 대기실 모든 남성 환자들의 일치된 표정을 보았다. 그런 마음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 남자인 syo도 역시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대체 어떻게 왜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는 뜻인데…….

 

이런 대화가 있었다. 새내기 때였다. 룸메이트가 자기 과 동기 하나를 집으로 불러서 같이 보쌈을 먹자고 제안하기에 그러자고 했더니 착한 고릴라처럼 생긴 녀석이 보쌈 봉지를 들고 방문했다. 안녕, 니가 syo구나. 나는 덕이라고 해. 대단한 놈이었다. 나와 미스터(룸메)는 중-고등-'재수'-대학 동창인데, 그 말인즉슨 나와 미스터는 덕보다 한 살이 많다는 뜻이다. 내 동기들은 나한테는 반말을 했지만 나를 찾으려고 우리 하숙방 문을 두드리다 미스터와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syo 룸메 형이시죠? syo 있나요? 라고 했다. 근데 덕놈은 족보의 두 페이지를 밥풀로 붙여서 한 페이지로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는 그야말로 대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두 번째 보쌈파티에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복음 말씀 전하듯 덕이 말했다. 정확히 이랬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 못생기고 가난해도 남자가 떡을 졸라 잘 치잖아? 그럼 여자가 도망을 못 간다카데. 거기 앉아 중짜 보쌈을 씹어 삼키고 있는 인간들이란, 연애라 해도 될 만한 경험은 전무한 2(syo, )에다가 뭐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쓰라린 사랑의 아픔 1회가 연애사의 풀 스토리인 1, 이렇게 세 명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마치 뭐라도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상추쌈을 싸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 3명이 살며 잡아 본 여인의 손을 다 더해봤자 3개가 안 되는 준연애고자 집단에서, 그러니까 저 주제에 관해 당사자 일방인 여자의 견해를 들은 적도 들을 일도 없는 것들이, 남자의 진짜 가치는 성적 역량에 있다는, 정확히 말해 성적 역량이 나머지 모든 역량의 공백을 압도하는 진짜배기 가치라는 밑도 끝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심지어 재미조차 없는 주장을 너무도 당연한 진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살아온 20년의 인생은 그들에게 뭘 품게 하였던 것인가.

 

위의 문단은 이런 관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실존철학의 대답이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다. 돌아보는 지침으로 삼을 만한 지점이다.

 

 

 

3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할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해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나 선배 사랑하는데했다양희는 그 말을 감정의 고저 없이천원이천원을 쥐어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다필용은 당황해서 어어하고는 웃어버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

 

  필용은 그 짧은 순간에 양희와 하게 될지도 모를 섹스에 대해서까지 상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온몬이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이상하게 웃음은 났다.

 "아니…… 네가 날 사랑한댔잖아킬킬킬킬…… 그 고백을 들은 거잖아지금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모르죠그건알 수도 없고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그렇잖아."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오늘은 어때?"

  필용은 한 시간쯤 지나 그렇게 묻고 말았다묻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는 선배가 극을 올려요."

 "아니그것 말고."

 "별일 없는데."

 "아니그러니까 네가 어제 말한 그것 말이야오늘도 지속되고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필용은 자신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왜 긴장하나필용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죠오늘도."

  양희는 어제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불가해한 기쁨이었다.


저주가 강렬한 감정에서 발원하는 마법적 힘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강력한 저주의 주문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결코 그 말을 듣기 전과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 사랑을 깔보고 어딜 감히 니가 언감생심 나를 사랑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너를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나는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야 할 도 있다. 혹은 어떤 대답을 해야 어색하지 않게 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버리긴 아까운 사람인데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다렸다는 듯 나도 널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을 돌려주며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 어두운 방에 마법진을 그려놓고 그 위에서 짚으로 만든 인형에 못질을 해대도 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절대로 무시되지 않는 말이다.

 

많이 사랑하거나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러나 사랑은 생김생김이 다 달라서,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되는지를 뭣하러 생각하냐는 식으로 생긴 사랑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웬만해선 약자가 되지 않는다. 공은 넘어갔다. 어제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이 그물이 되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희한한 그물이다. 그 그물에 필용은 포획되었다. 이제 기어코, 필용은 양희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심한 사랑 고백의 저 막강하고도 발랄한 공격력을 좀 보라지.

 

잘 봐뒀다 써먹을 일이 있을까?

 

 

 

--- 읽은 ---

+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박병철 : 152 ~ 270

+ 환율 지식 7일 만에 끝내기 / 박유연 : ~ 266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139 ~ 264

 

 

--- 읽는 ---

- 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90 ~ 191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 101

- 철학의 신전 / 황광우 : ~ 106

- 시경을 읽다 / 양자오 : ~ 99

-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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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0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 관련글 재밌어요. 히히.

syo 2019-11-01 15: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멍청함이란 재미있는 우화의 필수요소지요. 히히히.

다락방 2019-11-01 15:19   좋아요 0 | URL
11월까지 제2의성 완독하는 사람.. 없을 것 같죠?

syo 2019-11-01 15:32   좋아요 0 | URL
있을 것 같은데요?? s....

다락방 2019-11-01 15:33   좋아요 0 | URL
에이...무슨 말이에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분은 아니야.... 그 분 하위권 타입이야..... =3=3=3=3=3

syo 2019-11-01 15:37   좋아요 0 | URL
아이쿠...
s다락방님은 역시 안 되나보다....

다락방 2019-11-01 15:38   좋아요 1 | URL
s다락방은 또 뭐람? 시스터다락방 뭐 이런건가?
제 생각엔 1등은 해본 사람만 하는 것 같아요.
(냅다 튄다)

cyrus 2019-11-01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 참 빨리 가죠? 두 달 지나면 ‘원더키디’의 해네요... ㅎㅎㅎㅎ

syo 2019-11-01 20:1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미쳤어요..... 내 나이 미쳤어....

2019-11-01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부분 글이 웃기네요ㅋㅋㅋㅋㅋ

syo 2019-11-01 22:51   좋아요 0 | URL
웃긴 놈들이었으니까요 ㅎㅎㅎ

Angela 2019-11-0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공감합니다. 오늘은 사랑, 내일은 아무도 모르죠^^

syo 2019-11-02 20:58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로 공감은 하지만 최소한 내일의, 아니 일주일의 사랑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면 좋겠습니다. 저건 너무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