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러? 별자리러? 별자리어?

 

 

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syo 역시 남들처럼 그냥 철학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도대체 철학에 대한 관심의 불이 언제 입문서쪽으로 옮겨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syo는 알라딘의 입문서/개론서 덕후가 되어 끈질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세상에 입문서/개론서/연구서/원전 이런 식의 계층구조가 선명한 장르는 굳이 왜 존재하여 읽는 이들의 마음을 쓸데없이 아프게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불나방처럼 결국 읽어내지도 못할 책들을 좇아 다시 못 올 귀중한 내 시간들을 활활 불싸지르는 걸까?

 

통상적인 독서루트는 이렇다고 한다.

 

원전에 덤볐다가 얻어터진다 -> 입문서를 한 권 읽어보고 감을 잡는다 -> 다시 원전에 도전해 기어이 읽어낸다 ->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연구서를 읽고 시야를 확장한다 -> 다시 원전을 읽으며 깊이 있는 음미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입문서 덕후의 독서루트는 이렇다.

 

원전에 덤빌 생각은 접고 청소년을 위한’, ‘원숭이도 이해하는’, ‘첫걸음’, 따위의 타이틀이 붙은 책을 읽고 쉽게 이해한다 ->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또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또 또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이 타이밍에 깊이 있는 연구서를 한 번 읽어준다 -> 그리고 다시 입문서를 읽는다 -> 이쯤 되면 슬슬 원전을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면 입문서를 읽는다 -> 이렇게 계속 입문서만 읽어도 되는 걸까 싶다면 입문서를 읽는다 -> 이러다 원전을 읽는 날이 오긴 올까 의심된다면 닥치고 입문서를 읽는다 -> 이제 입문서를 통해서 배울 게 남긴 남았나 싶다면 그걸 확인하기 위해 입문서를 읽는다 ->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원전을 읽어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는 식의 충고를 만나면 정말 진심으로 공감하는 댓글을 단 다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입문서를 펼친다

 

이쪽 입장에서 보면, 철학자의 사상과 지혜 같은 건 부수적인 문제다. 그냥 읽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 그런 훌륭하고 뜻깊은 것을 목적으로 책을 읽어서는 올바른 입문서 덕후가 될 수 없다. 온 세상 말고 이 독서판에서만 보면, 마르크스가 이미 있었으니 마르크스의 생각을 똑바로 이해하는 또 다른 사람의 효용가치는 적다. 도리어 다른 독자가 마르크스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나아갈 수 있도록,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마르크스 입문서/개론서를 섭렵한 후 도전자의 흥미와 배경지식의 정도에 맞춤한 커리큘럼을 설계해주는 쓰앵님이 훨씬 더 쓰임이 있는 것이다,

 

고 생각한다.

 

그것도 포부라면 포부. 실제로 2016년 당시, syo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관한 시중의 모든 입문서와 개론서를 정말 남김없이 싹 다 읽어치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쯤 되니 그 두 냥반에 대해서라면 어디 가서 좀 아는 행세해도 부끄러운 꼴 보지 않을 만큼의 지식이 덤으로 축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지식에 관해 질문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syo에게 마르크스가 뭐래요, 프로이트는 대체 왜 그런대요,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모두들, 제가 이제 프로이트를 읽어보려 하는데요, 마르크스를 읽을까 하는데요, 뭐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와 같은 내용의 질문들을 던져왔다. 그렇게 알라딘 마을에서 syo는 살아있는 원숭이의 화신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뭐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2016년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가장 자신있었지만, 실은 그 두 사람 말고 입문서에 발끝을 들이밀었다가 확 데고는 얼른 돌아선 다른 적들도 많다. 플라톤, 공자, 장자,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후설,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라캉, 레비나스, 푸코, 블랑쇼, 아렌트……. 욕심만 잔뜩 품고 덤벼들었지만, 입문서 별자리 하나 똑바로 그리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었던 저 수많은 현자들.

 

그리고 요즘은 헤겔이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취업 전에, 헤겔로 별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볼 작정.

 

 


--- 읽은 ---

+ 정신현상학 / 김은주 : 76 ~ 216

+ 처음 읽는 중국사 / 전국역사교사모임 : 269 ~ 386

+ 탈코르셋 선언 / 윤지선, 윤김지영 : 70 ~ 133

 

 

--- 읽는 ---

= 광대하고 게으르게 / 문소영 : ~ 150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 168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 42

= 가와바타 야스나리 / 허연 : ~ 131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57 ~ 248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장석주 :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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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9-09-01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 원전 위계는
극히 한국적 현상이기도 할 거 같습니다.
글구 이 문제의 한 70% 정도는 번역의 문제, 15% 정도는 우리가 말을 쓰는 방식의 문제일 거 같아요.

번역이 좋을 필요도 없고 정확하기만 해도
이해하고 영향받을 사람은 있게 마련인데
중요한 책들 중 ˝정확함˝ 기준으로 통과할 책들도
희귀했다는 놀라운 일. 정확한 정도를 넘어서 좋은 번역이 다수라면
원전들을 읽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보람있다고 공적인 합의.... 있을 거 같아요.
영어권에서는 너무도 당연히 존재하는 합의.

언어에서 개인의 몫과 사회적 활동. 이 둘 다가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실천될 때만
˝원전˝ 읽고 해석하고 논의하는 문화가 있을 거 같기도 해요. 이것도 영어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데, 한국에서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해석의 노고 같은 건 아 몰라 내 맘이야.

syo 2019-09-01 16:52   좋아요 0 | URL
한국어 사용자들의 망탈리테 같은 것에 대한 몰리님의 분개는 익히 만나왔던 터라,
그 바닥 사람이 아닌 제게도 뭔가 문제의식 같은 게 생기긴 했어요.

원전을 읽었고, 또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들의 지혜가 탐나지 않는 수준이거나 혹은 그 지혜랄 것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 때,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알고 느끼기를 바란다는 느낌보다 그저 자신이 원전을 이미 읽은 훌륭한 인물임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때, 그런 때들이 많아서 syo같은 핫바지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원전에서 한 걸음씩 더 멀어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입문서 말고 <자본>은 읽어보고 떠드는 거냐는 말을 듣고 <자본>을 읽고 오면, 그 <자본> 말고 <Das Kapital>을 읽고 오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마르크스 말고도 반도체 공학도 알고 싶고, 뇌과학도 좀 알고 싶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고 그런 사람이라면, 원전 소리 듣는 순간 바로 탈원전 비핵화 선언하고 싶게 되는 거죠.....

2019-09-01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1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문서를 읽으면 오래 전의 어떤 사람에다, 그 사람을 위해 인생 또는 최소한 젊음의 한 때를 바친 누군가까지 동시에 만날 수 있잖아요. 원전 한 편에 단 한 사람 만난 누구들보다 n명 만난 syo님이 개꿀 개이득 메롱메롱 하시며..그보다도 이미 죽은 누군가가 남긴 글을 보며 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 보는 것 자체가...사람에 대한 사랑이 팍팍 느껴지네요. 진정 필로소피 필로소피아.

syo 2019-09-03 00:15   좋아요 0 | URL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반님은 뭔가, 칭찬과 비행기태우기의 따라갈 수 없는 지존 같은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무슨 오구오구 학원 같은 거 다니시는지 궁금했거든요? 이젠 아니에요.
혹시 무슨 오구오구 학원 같은 거 운영하세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9-03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덕후되는 과정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입문서를 읽는다 입문서를 읽는다 입문서를 읽는다, 에서 저는 마음이 그만 좋아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뭐랄까, 계속해도 요가 초보자에 머무르는 제 상황과 같다고 할까요..

음..
아닌가??

syo 2019-09-04 09:50   좋아요 0 | URL
비슷한데?? 비슷해요 ㅋㅋㅋㅋㅋㅋ
가끔씩 다음 단계에 도전했다가 쎄게 좌절하고 나여 너는 뭐니 나여, 하는 것도 혹시 비슷한가요? ㅋㅋㅋㅋ

AgalmA 2019-09-0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셔틀러로 살다가 인생 망할 거 같다 싶어서 원서를 읽으려 무진 노력 중이오ㅋㅜ)... 일단 집에 책을 사놓은 것만 해도 어디냐 하며ㅋㅠ)

syo 2019-09-05 11:20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께서야 이미 입문서에서 깔짝거릴 단계는 훌쩍 넘어서셨지요! 그리고 탈출도 깜냥 되는 사람이나 하는 겁니다. 저는 이미 늦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