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죽은 시인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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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에 뭐라도 쓰려니까, 손끝이 영 무디다. 꼴에 재주랍시고 이것도 쉰만큼 퇴보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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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에서 면접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말한다. 드물게는 또라이들이 있어서 필기 성적과 무관하게 탈락시키고, 더 드물게는 난놈들이 있어서 필기 성적과 무관하게 합격시키기 위해 면접이 존재한다. 절대 다수의 경우 면접은 요식행위에 가깝고 어차피 필기 성적순으로 합격 결정이다. 지난 4월에 치른 시험의 경우를 보자. syo는 드물지도 더 드물지도 않은 평범한 인물이었으므로, 최종 선발자의 1.4~1.5배수를 뽑아 올리는 필기 합격 커트라인에 납작 붙은 득점으로는 최종 탈락이 자명했다. 며칠 전 발표된 결과 역시 선명했다. 이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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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에서 면접이란 무엇인가. 혹자의 말을 달리 해석해 보면, 결국 필합 커트라인을 훌쩍 뛰어넘는 득점만 올린다면, 면접장에서 세계 3대 성인으로 히틀러, 스탈린, 김정은을 꼽는달지 하는 짓거리를 하지 않고서는 곧 합격이라는 말이고, 또한 그건 필기시험을 보고 나온 다음날쯤이면 이런 저런 학원들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통해 합격 여부를 상당히 낮은 오차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올해는, 시험 일자 조정으로 인해 상당히 낮아진 경쟁률, 예년과는 상당히 다른 출제 경향, 그리고 그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냈던 이런저런 행운 같은 요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자리에 모여 syo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로 결심한 듯하다. 작년 실제 합격선에서 0.22점 밖에 벗어나지 않았음을 내세우는 모 학원의 노스트라다무스급 합격예측 시스템이 syo의 무난한 합격을 예측하였다. 그놈의 말을 믿는다면, 이제 서울 모 지역 주민 센터 창구에 앉아 온갖 종류의 등, 초본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떼어주는 똘똘한 지역인재로 거듭나는 날까지 관문은 두 개 남은 셈이다. 첫째, OMR카드 마킹 실수를 (한 일곱 개 정도) 하지 않았을 것. 둘째, 이 나이 먹도록 몰랐는데 내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히틀러, 스탈린, 김정은을 사모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면접장에 들어서는 순간 불현듯 깨닫게 되어, 콧수염 기른 면접관 앞에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은 충동을 느끼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부디 이번에도 결과는 선명하고, 이변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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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는 이제껏 이런 저런 시험장을 거쳐 오면서 ‘선생님, 살려주세요, 선생님’을 외치는 경우를 유독 많이 목격하였다. 거의 매번에 가까울 정도로. 처음 몇 번 봤을 때는 그런 사람들을 ‘시험 끝났는데 마킹 다 못한 사람’ 정도로 표현했었는데,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선생님, (안 돼요 / 제발요 / 한번만 봐 주세요 / 살려 주세요 / 어어어 / 허윽허윽 / 조금만요 / 잠깐만요 / 금방 끝나요), 선생님’ 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그들을 ‘죽은 시인’(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부르고 있다. 죽은 시인들은,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서 시험장 시계를 믿었는데 역시 처음 만난 시계는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었달지, 시계를 가져오긴 했는데 걔가 뜻밖에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는 스타일이어서 남들 100바퀴 돌 동안 99바퀴만 돌았달지, 아니면 OMR 카드 마킹 전략 구상이 잘못되었달지, 그것도 아니면 한 문제와의 스킨십이 지나치게 길었달지, 하여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태어난다.
어쨌든 마침 종이 울리면 수험생들은 OMR 카드에서 손을 떼야 하는 법이다. 그건 그야말로 법에 가깝다. 누군가에겐 참 잔인한 법인 것도 같다. 종이 울렸는데 아직 10문제 정도를 마킹하지 못했다면, 나 같아도 나라 잃은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정말 세상 다급하다. 선생님, 제발요, 한번만 봐 주세요, 제발, 제발...... 죽은 시인들의 절박함은 어느 시험장이나 똑같았지만, ‘선생님’들의 반응은 시험장마다 조금씩 달랐다. 대부분의 경우는 경고 후 단호하게 답안지를 걷어갔다. 경고를 듣고도 끝까지 선생님을 외치며 마킹을 이어나가는 응시자의 답안지를 낚아챈 다음, 부정행위로 실격처리 되셨다고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경우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모질지 못한 선생님의 경우는 안 됩니다, 얼른 제출하세요, 어허, 마킹 그만 하세요, 하면서도 끝까지 마킹을 마칠 시간을 주기도 하였다.
몇 년 전 모 자격증 시험장에서는 허허, 그럼요, 얼른 쓰세요 하면서 쿨하게 시간을 더 준 선생님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합격이 누군가의 불합격이 되는 시험에서 자기만의 추가시간이란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른 응시자가 외쳤다. 감독관님(아쉬울 것 없을 땐 선생님 아님), 걷어가세요. 답안지 걷으시라구요. 그때 감독관은 클레임을 건 사람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저 분한테는 인생이 달린 문젠데 그 정도 배려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장면을 지켜만 보고 있던 모든 응시생들이 와글와글 입을 열었다. 장난하세요? 저분 지금도 계속 마킹하고 있잖아요, 빨리 걷어가세요! 우리 인생도 달렸어요, 공정하게 하셔야죠, 감독관님 성함 말씀해주세요, 본부에 신고할 겁니다 등등, 말들이 일시에 시험장을 점령했다. 감독관은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뛰듯이 교탁 앞에서 나와 마킹을 이어가는 수험생의 답안지를 수거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말만 남기고 재빨리 퇴장했다. 응시생들은 책가방을 챙기면서, 나가면서, 아직까지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을 손에 들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 죽은 시인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직접 그를 저격하진 않았지만 들으라는 뜻으로 공중에 몇 개의 쌍시옷도 투척되었다. 죽은 시인은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syo가 시험장 뒷문으로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도, 죽은 시인은 책상 위에 그대로 엎어져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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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집 이외의 종이에서 활자를 빨아들여 본지도 오래되었고, 며칠째 지속적인 수면부족 탓에 글이 놀랍도록 후지지만, 이번만은 그냥 스스로를 용서해주기로 하자. 내일부턴 괜찮아지겠지.
한 번만 봐주세요. 선생님, 제발요, 선생님......
--- 읽은 ---


+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이승우 : 92 ~ 184
+ 우리 고전 읽는 법 / 설혼 : 9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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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변증법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 13 ~ 29
- 한국요괴도감 / 고성배 : 4 ~ 199
-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 악셀 린덴 : 7 ~ 112
- 정신의 고귀함 / 롭 리멘 : 5 ~ 137
-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 106 ~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