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사진관

 

작년 오늘, 신림동에는 비가 왔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비를 보고, 듣고, 만지다가 슬쩍 젖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독 비가 많았던 여름, 파란 함석지붕 처마 아래서 누군가와 함께 비를 긋던 어느 여름을 떠올리며 짧은 글을 남겼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다 그 여름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지나간 여름을 오늘에 덧대는 일은 참 부질없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으깨진 빗방울이 더는 빗물이 아니라 그저 쏟아진 한 덩이의 물일뿐이듯이. 또한 구름으로부터 지상까지 젖은 허공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는 동안만 비가 비이듯이, 여름은 내가 그 안에 있는 동안만 여름이었다. 바깥에서 돌아보면 그것은 한낱 지나간 계절일 뿐이었다. 지나간 여름은 이제 여름이 아니다. 그 여름처럼 나를 뜨겁게 끓이지 못하기 때문에라도. 그러니까 비가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느 애틋한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지니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순간에 박제된다. 그날 그곳 그와의 사랑은 보존될 수는 있으나 재현될 수는 없다. 다시 그를 만나도 더 이상 그는 그가 아닐 것이다. 여기는 그곳이 아닐 것이다. 그때가 아닐 것이다. 기적처럼 그날 함석지붕 아래의 그 장면 속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이젠 내가 그날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둘러싼 많은 조언들 가운데서도 좀 식상한 축에 들긴 하겠으나, 그저 아는 사람과 알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는 사람은 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사랑이 어제와 다르다면 그건 오늘이 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가 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붕 아래서, 나와 당신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사랑을 크기나 무게의 문제로 여기는 순간 어제의 사랑이 오늘의 사랑을 목조르기 시작한다. 어떤 것도 무한히 커지거나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 수는 없으므로 변화는 종종 변질로 오해받고 변모는 얼른 소모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랑은 한 손에 붓, 다른 손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의 페인트 통을 든 두 사람이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만나 서로의 구도를 버무리면서 추상화를 함께 그려가는 과정에 가깝다. 당연히 그 그림은 형태와 색채가 계속해서 변할 테고, 우리가 오늘의 그림을 또다시 그려낼 확률은 어차피 극히 낮다. 그러니 나와 당신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어깨를 붙이고 앉아 손에 든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수증기 너머로 오늘 우리가 그린 그림을 조용히 응시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래도 다시 만나지는 못할 이 작품을 구석구석 살피고 만지고 알아채서, 오늘의 이 그림에서 내일의 새 그림이 시작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일의 그림은 조금 다를 것임을 미리 인정하는 것. 그리고 기대하는 것.

 

내일, 다음 주의, 그리고 그보다 더 먼 어느 날의 그림을 더 잘 그리려는 욕심에 오늘의 그림을 소홀히 그리지 않는 것.


오늘도 작년처럼 비가 온다고 한다. 하늘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머그잔을 채우고 조용히 비를 기다리고 있다. 창틀에 화분 하나를 올려놓았다. 키 작은 줄기, 귀여운 잎사귀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는 대구다.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박준겨울비」 전문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작년 가을을 생각해본다천장에 금이 가는 줄도침대 밑에 먼지가 쌓이는 줄도 모를 정도의 사랑이었지만 악의와 당황 속에서 그 사랑은 어떻게 끝나버렸던가그러나 장차 우리를 죽이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이는 현기증에 고생하던 남자가 택시에 치여 죽어버리는 경우와 비슷하다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음에도 내게 주어진 날을 낭비하고 있다.

존 치버존 치버의 일기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11 / 박시백 지음

본격 한중일 세계사 1 / 굽시니스트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허수경 지음

누구를 위한 높이인가 / 박현찬, 정상혁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지음

멜랑콜리 해피엔딩 / 강화길 외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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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4-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면 좋을 날씨인데...^^ㅎㅎ

syo 2019-04-23 13:46   좋아요 0 | URL
온다던데요? 3시쯤에는 온다고 네이버가.....

레삭매냐 2019-04-23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순간에 박제된다

캬하, 정말 멋진 표현인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리면, 밤중에 몰래 빠져 나가
닭똥집에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싶네요.

예전에는 참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했
더랬죠... 그땐 그랬더랬죠.

syo 2019-04-23 14:07   좋아요 1 | URL
닭똥집에 막걸리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입맛이 다셔집니다 ㅎㅎㅎ

동그란 양철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가게 유리문 너머로 비 내리는 걸 보던 기억이 나네요.... 아, 좋은 그림이다.

목나무 2019-04-23 15:47   좋아요 2 | URL
얼마전 연남동에서 오돌뼈에 소주를 마시는데 정말 맛나더라구요.
오돌뼈가 좀 느끼할 수도 있는데 그 집은 파채를 곁들여서 진짜 중독되는 맛이었습니다! ㅎㅎ
비내린다고 하니 별의별 안주가 다 떠오르네요. 이렇게 나이를 먹는 건가요. 센치 대신 입맛 다시며...ㅋㅋㅋ

2019-04-23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23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
지금 밖이고 우산도 없지만..
비가 왔으면... 여기는 서울입니다^^

syo 2019-04-23 16:15   좋아요 0 | URL
여기는 소슬소슬 오는 중입니다.
비는 좋은 거니까, 우리 나눠 먹어요 ㅎ

목나무 2019-04-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디에 사랑이란 게 있지?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욕을 모르는 헌신적인 것 아닌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헌신적이어야 해, 인생을 바치고 고뇌도 마다 않는 그런 사랑은 결코 노동이 아니지. 일종의 기쁨인거야. ... 사랑은 비극일 수밖에 없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신비야! 그 어떤 삶의 안락, 계산, 그리고 타협도 사랑과 관련지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_ 알렉산드르 쿠프린의 <석류석 팔찌> 중에서...

오늘 외근길에 저런 글이 담긴 단편소설을 읽고 아침부터 사랑이 뭘까... 그러던 차에 syo님의 글을 봤네요.

서울과 대구의 물리적 거리만큼 syo님의 어떤 거리는 짧아졌으려나요. 아님 길어졌으려나요.
여기도 아직 비님이 올 기척은 없네요. 따뜻한 봄비 기다려지는 오후입니다. ^^


syo 2019-04-23 16:18   좋아요 1 | URL
뭔가 어마무시한 애정관이네요. 저러다 사랑이 없어지겠어요 ㅎㅎㅎ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정말.

사랑이란 게 답이 없는 것 치고는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언젠가 어떤 형식으로든 보답을 해주는 놈이잖아요. 설해목님의 사랑생각을 응원하고, 계신 곳에 봄비 내리는 일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