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먹는 가을
1
빨갛고 노란 잎사귀에 잠깐 들러서 조랑조랑 떠들다 제 무게 못 이겨 뚝 떨어지는 가을 햇살을 올려다보는 일은, 빛을 마주하는 사건인데도 눈이 편하고 시원하다.
늘어선 가로수 아래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각별한 때가 가을이다. 사방에서 빛살이 노랗게 떠들고, 이파리들 끄덕끄덕 대답하고 성질 급한 녀석들은 빛의 손을 잡고 따라 나서기도 한다. 사람이 걷는 속도로 하늘하늘 허공을 밟아 내려오는 이파리 위에 올라탄 빛 손님의 얌전한 얼굴을 보며,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아야 성에 찬다는 저 무진장 바쁜 녀석을 쉬어가게 만드는 가을의 중력이 혹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예쁘게 노란 가을이 빛낯을 하고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끌어당기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 같다. 가을 길을 가는 사람은 마음의 질량이 대단하다.
아침에 엄마가 호박전을 부쳐냈다. 호박을 즐기지 않는 입맛에도 잘 감겨드는 맛이었다. 호박으로 만든 먹을거리라면 가리지 않는 엄마의 손이었으니.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고, 사선으로 떨어지는 아침볕을 바라보다가 접시위의 호박전을 바라보다가 했다. 참 많이 닮았다.
가을 아침에 내린 빛살 한 접시 그득히 먹고, 나는 도서관에 들러 어느 알바니아 작가가 파리에서 썼다는 자전 소설을 빌렸다.
2
우리에게는 ‘영향을 선택할 권리’, 좋은 영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선택의 폭은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넓지 않고, 그 선택권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협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태어난 곳에 고정되어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가 받는 영향들을 선택하는 데 참여할 수 있고, 이미 참여하고 있다.
_ 김한민, 『페소아』, 19쪽
사서 꽂아놓는 작가들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읽는 이들의 행복이다. 펼치면 바로 점령될 수 있게 기꺼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맞이할 책들이 자꾸 발견되고, 그 책들로 인해 나라는 인간의 바닥이 발각되고, 불모지가 개척되는 일.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드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모든 일은 책이 하는데 나는 그저 책의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 벌레일 뿐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글이 될 때까지 뚝심과 욕심을 가지고 쓰는 일 속에서 나는 내 안에다 나도 만들고 행복도 만든다. 페소아도, 페소아를 읽고 페소아를 쓰는 김한민도, 새로운 syo를 만든다. 페소아를 읽는 syo와 페소아를 읽고 페소아를 쓰는 김한민을 읽는 syo를 만들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든든할 때가 있다. 아, 그렇다면 페소아가 수많은 페소아를 만들어낸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쯤은 나도 안다고 해도 혹시 괜찮을까?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_ 이현우, 『책에 빠져 죽지 않기』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인생의 어떤 시기를 기억할 때 나는 책을 떠올린다. 힘들어질 줄도 모르고 즐거이 읽은 책. 힘들었던 나를 붙잡았던 책. 힘듦을 잊게 했던 책. 힘듦을 극복하게 해준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허무로 다시 힘들어지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 책.
_ 김겨울, 『독서의 기쁨』
3
“아마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봐...... 그냥 그의 주소나 가르쳐 줘. 아냐,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말만 좀 전해 줘. 내가 꼭 만나야겠다고 하더란 말만 전해 주었으면 해......”
노에미는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전해 달라니요? 내가 형부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 이제 그만두지 않을래요? 제롬은 가끔 우리 집에 와요. 그게 어때서요? 숨길 게 뭐 있어요? 사촌끼리! 참 우습네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상처받을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언니가 여길 와서 이런 소란을 피우더라는 말을 하면 형부가 참 좋아하시겠네요!”
퐁타냉 부인은 뒤로 물러섰다.
“너 꼭 거리의 여자처럼 말하는구나!”
“아! 그럼 한마디 더 할까요?” 노에미가 대꾸했다. “여자가 남편한테서 버림받는 건 아내 잘못이에요! 만일 제롬이 찾고 있는 걸 언니가 만족시킬 수 있다면야 이렇게 다른 곳을 찾아다니게 되지도 않을 거 아니에요?”
‘정말 그럴까?’ 하고 퐁타냉 부인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해졌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제롬의 주소도 모르고 그를 돌아오게 할 아무런 방법도 없이 다시 외롭게 자기 자신과 대하게 될 것이 두려워졌다.
_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회색 노트』, 48-49쪽
딱 봐도 개새끼는 제롬새낀데도, 그녀들이 주고받는 말을 보면 놀랍고 쓰리다. 세상 어딘가에 여성 혐오 이데올로기의 교범이 있다고 한다면, 그 문건에 "오랜 역사를 통해 효율성이 검증된 최고의 정신적 구속 기구"라고 기록되어 있을 두 가지 전략적 혐오 발언을 그녀들이 몸소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흠집을 내고 있다.
첫째,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갈라 쳐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 싸움 속에서 성녀는 제 스스로 더욱 성녀가 되도록 하고 창녀는 창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 싸움을 영속시키라.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즐기라.
둘째, 남자가 성녀를 찾는 것은 창녀가 성녀가 아니기 때문이고 창녀를 찾는 것은 성녀가 창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도록 하라. 모두 여자 탓이라는 걸 끝없이 강조하라. 스스로 남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역시, 그 사이를 오가며 즐기라.
제롬새끼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노에미는 소파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며 제롬이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어린 여자와 눈이 맞아서 벌써 달아났다고 진술한다. 남편이 그런 새낀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퐁타냉 부인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애초에 제롬이 노에미와 있다는 제보의 출처가 퐁타냉 부인의 집에서 일하다 남편과 눈이 맞았다는 이유로 쫓겨난 어느 여자(역시 어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퐁타냉 부인이 자신의 남편이 아직 여자 A와 함께 지내고 있으리라 예상한 동안, 제롬새끼는 확인된 경로만 따져도 여자A->노에미->여자B로 아주 착실히 옮겨갔던 것이다.
와, 내가 저 제롬새끼 말년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라도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 읽고야 말겠다. 전 5권에 별권까지 총 2500페이지만 읽으면 되겠구나..... 이야 신난다...... 와아......






-- 읽은 --




김한민, 『페소아』
존 조던, 『로봇 수업』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회색 노트』
정은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읽는 --






이스마일 카다레, 『인형』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아네트 C. 바이어, 『데이비드 흄』
콜린 베번,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
조홍식, 『문명의 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