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소년의 개구리의 개구리의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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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이란 정말 각양각색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는 난생 처음 해보았던 것 같다. 진짜, 비를?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럼 바람도 별로야? 잔잔하면 괜찮아. 아, 세상에.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지?
비 이야기 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애기 syo에게 노랑 장화가 있었다. 눈이 방울만한 개구리가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그림이 장화 코에 그려져 있었다. 그 개구리도 노랑 장화를 신고 있었다. 개구리의 장화를 가리키며 syo가 물었다. 엄마, 이 개구리가 신고 있는 장화에도 개구리 그림 있을까? 슬쩍 보더니, 엄마가 대답했다. 아니. 왜? 왜 아냐? ......산업기술력이 부족하니까. syo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엄마. 개구리 장화에 개구리 그림 있고, 그 개구리도 개구리 장화 신었고, 그 개구리도 또 개구리 장화 신었고, 그 개구리도 또 개굴...... 엄마가 말을 끊었다. 그러면 너도 개구리겠네? 너도 누가 신은 장화 속 개구리 그림이겠네? 아니 이 엄마는 왜 미취학 아들에게 아득바득 이기려 들지? 어머니, 이런 식의 교육방침을 고수하신다면 과연 제가 장차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당시에 대꾸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어머니의 말씀을 잘 받들어, 그날 이후 청개구리 아들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성실히 제멋대로 살아왔다.
syo는 비가 좋다. syo의 정체가 알고 보면 초월적 존재가 신은 노랑 장화 위의 개구리 그림에 불과하다고 해도, 내리는 빗방울을 보고 듣는 중에는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비 내리면 옷 젖는 것. 옷 젖다보면 맘 젖는 것. 젖으면 말랑말랑해지는 것. 우리는 종종 말랑말랑해져야 하는 것. 가끔은 감기도 앓아 줘야 하는 것. 비와 같이 산다는 건 그런 일이니까.
비 / 황인숙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여들고 싶게 하는.
2
황인숙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 전석순과 훗한나의 『밤이 아홉이라도』, 박완규의 『리바이어던』, 양자오의 『묵자를 읽다』, 김응교의 『일본적 마음』, 이하준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이사카 고타로의 『악스』, 서동욱의 『생활의 사상』,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루소의 개』, 한자경의 『칸트 철학에의 초대』를 읽었다.



읽을 장르를 줄이고 처내고 나면 결국 철학이 남는 것은 왜일까. 나는 공대를 나왔는데. 전자기학 전자회로 반도체공학 운영체제 통신이론 시스템프로그래밍 이런 걸 잔뜩 배우고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왜 골라서 읽는 책은 홉스, 묵자, 칸트, 루소, 마르크스 이런 애들일까. 쟤네들은 맥스웰 방정식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는 애들인데......
홉스의 자연상태를 악이 판치는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홉스는 그걸 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규범이 존재한 이후의 이야기고, 자연상태에서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 안에는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건 악이 아니라 그냥 권리 추구고 자연이라는 것. 악은 추후에 규정된다는 것. 기존에 알고 있던 성악설과 큰 차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역시 성선/성악/성무선악 이딴 식의 구획 속에 뭘 처넣는 방식으로 배우다보면 어딘가 뒤틀어진 것들만 기억에 남기게 된다.
100쪽쯤 읽었는데, 이 계몽주의자라는 인간들 하나같이 별로다. syo는 누가 날 계몽해주는 것에 대해 1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지적/인격적으로 계몽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계몽되고 싶다. 계몽새들이 어딘가 졸렬해 주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로구나.
칸트 읽을려는 놈이 이것보다 더 친절하길 바라면 도둑놈 심보라는 평을 발견하고 빌렸다. 확실히 ‘읽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