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인난견難人難犬
1
syo는 멍뭉이를 좋아하고 멍뭉이는 syo를 좋아한다. 그래서 늘 우리의 만남은 그저 만남이 아니라 상봉이라 부르는 게 적당하다 싶은 광경을 낳는다. 아구우우이뻐어어우우어어우워어(syo) 헥헥헥할짝할짝(멍뭉이) 아코하짝하짝해떠요으구으구(syo) 갸르르으으우왕깡깡(멍뭉이) 깡깡짖어떠요으구이귀요미녀석같으니(syo) 헥헥헥헐떡헐떡(멍뭉이) 헥헥헐떡헐떡(syo뭉이)...... 나는 이러면서 몇날 며칠을 보낼 수가 있다. 쑥과 마늘을 주면 동굴 속에서 사람이 될 때까지 강아지와 물고 빨고 놀 수가 있다......
벼락아, 때려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유리벽을 부수어다오.....

잔망
2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두 개의 벽에만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고, 그것도 나와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빈곤한 내 일생을 통틀어 흡수할 기회가 전혀 없을 지식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내 나이가 겨우 스물둘이기는 했으나 설사 내가 백 살을 산다 해도 이 책들의 문자를 배울 가능성은 희박했다. 여기, 바로 여기에, 나와 절연된 인류 문명의 유산이 우뚝 서 있었다.
_ 양자오, 『자본론을 읽다』
양자오가 내놓은 입문서들이 다 그렇듯 이 책 역시 자본론 입문서로서 자체 훌륭하지만, 왜 이 책을 권하느냐고 syo에게 묻는다면, 저자 서문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표적인 반공국가인 타이완에서 태어나 배우고 자란 양자오 선생. 선생은 금서 『자본론』의 일어판, 영어판을 손에 넣기 위해 대학 도서관 지하서고에 숨어들고, 금서를 대출해 줄 호구를 물색하고, 대출이 안 되면 남의 시선을 피해 복사기를 착취했다. 이런 작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책을 사랑하는 자들은 왜 이렇게 남 보기에 별 거 아닌 일로 스스로 고달프고, 고달픈 일로 변태처럼 행복한 인생을 이어나가야만 하는지 생각하느라 코끝이 다 시큰해진다. 명색이 알라디너라면 이 마음을 전혀 모를 수는 없다.......
그리하여 계몽의 원칙은 어떤 계율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그래서 삶의 나날의 경험현실 속에서 다시 실행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영원하고 불변적인 근본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계몽의 정신은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면서 동시에 부단히 보완되고 수정되는 경험적 규칙이다. 그것은 이념과 역사, 규범과 일상을 오고 가고, 조금 더 크게 말하여, 보편성과 구체성 사이를 오고 간다. 이렇게 오가면서 그것은 자신을 부단히 갱신해간다. 그러므로 진정한 계몽의 사유는 생활 속에 녹아 있고, 이 생활 속에서 구현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활 너머의 이상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아가면서 그것은 삶의 가능성과 조건을 부단히 문제 삼는다.
_ 문광훈,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영원하고 불변적인 것은 없으면 불안하고 있으면 불편하기 쉽다. 또한 자신의 규범을 보편 안쪽으로 진입시키기 위해 생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제게 유리한 규범이 보편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몽니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안에 있는 사람들도 한때는 밖에 있었다. 지금 밖에서 두드리는 이들도 안에 들어가면 조금씩 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럴 바엔 울타리를 아예 걷어버리고 다 함께 불편하고 다 함께 불안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누구보다 나은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 열린 공간을 원하는 이들이 생긴다.
보편의 권좌는 매력적이다. 상식이라는 말을 휘둘러 때리고, 역사니 본성, 윤리니 하는 말로 상대의 입을 막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맹목적인 자리다. 보편성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규범을 검사하고 고쳐나갈 때 생활 영역 안에서 생각한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이런 말,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결과가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자신의 규범이 보편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규범 도전을 받아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링에서 결투를 벌이기를 좋아한다. 아니, 지금 ‘표현의 자유’를 핍박하자는 건가? 아니, ‘차별’을 ‘철폐’하자는 사람들이 왜 다른 차별에는 눈을 돌리지 않지? 그건 ‘집단이기주의’ 아닌가? 이래야 자신에게 덤비는 이들을 보편적 진리에 덤비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자들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야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지킬 만한 것이 못된다. 지킬 만한 것이 못 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만 보편 규범이 필요한 것이라면, 보편 규범 역시 지켜줄 만한 것이 못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지킬만하고 지킬 수 있는 보편, 영원, 불변의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들이 그 권능을 함부로 전용하지 못하게 할 장치를 고안해야 한다. 일이 점점 커진다.
3
양자오의 『자본론을 읽다』, 문광훈의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강화길이 짓고 키미앤일이가 그린 『우리는 사랑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김중현의 『루소가 권하는 인간다운 삶』,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미에코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리링의 『집 잃은 개 1』,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읽었다. 3일을 읽었는데, 여전히 읽고 있는 녀석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