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풀잎에서 가을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밤


1


너무 더운 여름이라 여름만 잔뜩 입에 올렸지 그리 많이 불러주지도 못했는데, 비와 바람을 앞세우고 알아서 척척 대구까지 찾아와 여름을 밀어낸 씩씩한 가을. 어린 가을의 이마를 만져주고 싶은 밤이다.

 

덜 자란 가을은 순하다. 해는 뜨겁지 않고, 가끔 뜨거워도 따갑지 않다. 나뭇잎들은 빛 먹은 녹색에서 물 먹은 녹색이 되고, 우듬지는 바람을 마시며 흔들흔들 제 몸 비울 궁리를 한다.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하늘이 자꾸 보고 싶어진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든 생각하고 싶어진다. 마음의 눈을 들어 나를, 너를, 우리를 톺아보고 싶어진다. 이게 다 가을이 하는 일이다. 아니, 가을이 시키는 일이다. 하늘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이 깊어지는 것이다.

 

책이 잔뜩 든 가방을 메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 덜컹거리는 마음이 나이테를 또 한줄 두르는 계절, 다정한 가을이 돌아오고 있다.

 

여름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올해는 유독 애썼다고, 오래 기억에 남을 거라고 도닥여주고 싶다. 수고했어. 부디 내년에는 올해처럼 무리하지 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너는 충분히 뜨겁고, 충분히 여름답고, 복숭아를 가져다주는 충분히 예쁜 계절이니까.

 


 

2


이틀 동안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 김영훈의 단어로 읽는 5분 한국사, 귄터 발라프의 버려진 노동,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 박선화의 남자에겐 보이지 않아, 최민석의 고민과 소설가, 가이 스탠딩의 기본소득, 함규진의 개와 늑대들의 정치학, 프랑수아 타부아요와 피에르앙리 타부아요의 꿀벌과 철학자를 읽었다. 앞의 네 권은 독서를 마쳤고, 나머지 아이들은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이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만난 것은 올해를 기억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된다. 이런 글은 syo에게 지도와 나침반이 된다.



꾸준히 달리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영문학을 번역하고, 에세이를 쓰고, 자국에서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는 동시에 이 사람보다는 누구누구가 더 괜찮다, 하는 칭찬들 속에서 보다는앞자리에 자주 위치하는 소설가. 이것이 syo가 김연수와 무라카미 하루키 중 어느 한쪽을 생각할 때 다른 쪽도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유인데. 물론 작품만 놓고 보면 한참 다른 두 사람이지만. 김연수의 가장 최근작과 하루키의 가장 오래된 작품은, 물론 장르도 다르지만, 왜 둘이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스스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만큼 다르고, 다르게 만족스러웠다.




 

우미인초는 아름답다. 소세키는 점점 세세하게 보고 세밀하게 그린다. 그의 눈과 붓이 가늘어질수록, 날카로운 아름다움이 피어오른다. 지나치게 고풍이고 가끔 까들거린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소세키는 지금 열심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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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9-05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읽고싶어요’ 체크 할랬는데 이미 되어있네요? ㅎㅎ (아무말)
우리집에는 아직 복숭아 있숑-

syo 2018-09-05 09:02   좋아요 1 | URL
우호여축은 그야말로 다락방님을 위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이시라니.... (syo무룩)

stella.K 2018-09-05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저 1번 문장 정말 좋습니다. 요런 문장은 어디서 뽑는 겁니까?
스요님네는 문장 뽑는 기계가 있나 봅니다. 국수 뽑는 기계처럼.ㅋㅋ

저는 어제 기어코 복숭아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앞으로 한번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올여름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라 수고했단 말 별로하고 싶지 않은데
역시 스요님은 감성이 남다르군요.^^

syo 2018-09-05 15: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국수 뽑는 것처럼 문장 뽑는 기계라는 표현이 더 맛깔납니다만.

어차피 가는 여름 욕하면서 뒷통수 후려쳐서 뭐하겠어요. 괜히 열받아서 내년에 더 뜨겁게 불타오르기나 하겠죠. 감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옹야옹야 잘 토닥여 보내고 싶습니다 ㅎ

카알벨루치 2018-09-05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의 이마...우째 이런 표현을~에세이스트 하시라니깐 소설도 좋아요^^

syo 2018-09-05 15:20   좋아요 2 | URL
로맹 가리 읽으시는 분이 저런 잔재주에 칭찬하시면 안됩니다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9-05 16:14   좋아요 1 | URL
로맹 가리가 뭐라고~로망 가리 읽어도 ‘가을의 이마’ 이런거 안 나옵니다 ‘다정한 가을’, ‘사람의 눈이 깊어지는’, ‘나이테 또 한 줄 두르는 계절’....etc 이게 다 시가 아니고 산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ㅋㅋㅋㅋㅋㅋ

syo 2018-09-05 16:3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뭐지? 어떡해야 되지??
어쩔줄을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양철나무꾼 2018-09-05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 너무 좋아서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외우는 것보다 까먹는게 더 가까운데,
몇번만 더 읽으면 외울 자신 있습니다~ㅅ!^^

syo 2018-09-05 18:00   좋아요 1 | URL
안 됩니다.... 양철나무꾼님의 소중한 뇌세포를 이딴 데 사용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