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온 비와 새로 올 아이들

 

1

새벽에 빗소리가 찾아와 잠깐 깨어 만났다가 다시 잠들면 어쩐지 물여울처럼 맑고 또렷한 꿈을 꾼다. 통유리 벽 바깥으로 어깨를 대고 늘어선 침엽수들이 빗물을 받아 떨구고 있다. 숲의 얼굴이 밝다. 한 팔을 테이블과 턱 사이에 괴고, 다른 한 손에 쥔 작은 책을 나는 읽고 있다. 머그잔 속 절반만 남은 커피가 구름 그림 같은 김을 뿜어내고 있다. 커피에서 침엽수의 맛이 난다. 사철 푸르고 느긋한 맛이 난다.

 

책을 읽는 나는 기쁘다. 꿈에서도 기쁘다. 기뻐서 꿈임을 알아챈다. 숲이 있고, 비가 있고, 통유리 너머로 숲과 비가 보이고 들린다. 엉덩이가 편한 의자, 맞춘 듯한 높이의 테이블, 커피, . 시간과 공간이 다정하다. 이 꿈 밖에 서면 시간은 험한 얼굴로 나를 뒤쫓고 공간도 내 목을 죌 셈이다. 그래도 이 안에서는 우린 모두 다정하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하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기쁨의 지반이 조금씩 흔들리듯이, 이게 꿈이 아니기를 바라자 빗소리가 잦아들고 먼데부터 숲이 천천히 바스라진다. 커피가 식는다. 이제 깰 시간이고 세상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책을 쥔 손에 세게 힘을 준다. 나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활자를 부여잡으려 애쓴다. 이 세상에서 눈을 감는 일이 저 세상에서 눈을 뜨는 일이 되고, 이 세상의 것을 한 자도, 또는 한 획도 저 세상으로 들고 가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노려본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끝없이 눈을 뜨고 있으려고.

 

그리고 눈을 떴다.

 

 

 

2

어제는 오전 예정이었던 데이트가 오후로 미뤄지면서, 계획에 없이 도서관에 들러 책을 안고 돌아왔다. 가는 길 오는 길이 모두 덥지 않았다. 또 한 무더기의 책을 침대 발치에 쌓아놓고 얼음커피를 만들었다. 마이클 부스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장석주의슬픔을 맛본 사람만이 자두 맛을 안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미코시바 요시유키의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 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나누어 읽었다. 어떤 애는 다 읽었고 또 어떤 애는 아직 읽는 중이다. 한 권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내는 사건(그야말로 사건이라고 할 것인데)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내 탓이겠으나 책 탓도 하고 싶고 그렇다.

 


 

3


정말 사랑하는 작가인데도, syo는 장석주가 좋으면서 식상하다고 해야 할지 식상하면서 좋다고 해야 할지 항상 애매하다. 그의 글은 아름다움이 적당하고 성찰이 적당하지만, 해석이 늘상 정론에 가깝고 어떤 서술은 책마다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장석주의 책 두 권 중 한 권에는 syo출석체크라 부르는 다음과 같은 식의 글이 꼭 들어있다.


사춘기에는 헤르만 헤세프란츠 카프카알베르 카뮈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고서 서툰 문장을 끼적이고한국문학전집에서 염상섭이태준박태원이상손창섭오영수최일남김승옥서정인 등의 소설을 읽으며 문장을 배우고 익혔다내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장의 스승이 있었다프리드리히 니체헨리 데이비드 소로가스통 바슐라르롤랑 바르트발터 베냐민질 들뢰즈 같은 철학자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와바타 야스나리리처드 브로우티건 같은 작가들그리고 고은한창기김우창김현김화영김훈 같은 이들의 책에서 감명을 받고 그들의 문장을 본받고자 했다. (224 225) 

 

처음 출석체크를 만난 게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전이니, 한 해에도 몇 권의 책을 내는 장석주의 생산력에 비추어 보면, 그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는 syo에게 저런 이름들의 나열을 보는 일이 얼마나 지겨울까. 제발, 다음 책부터는 출첵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럴 걸 다 알면서도 읽으라고 시키지도 않은 책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어놓고 웬 지랄이냐, 지겨우면 안 보면 될 것 아니냐, 고 하시면 맞는 말씀이라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도 입을 틀어막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또 아니잖아요.



  

4

어려운 책을 좍좍 찢어 꼭꼭 씹어 삼키듯 읽는 이웃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좀 복잡한 심경이다. 태생이 꼼꼼하지 못해서일까, 끈기가 부족해서일까. syo도 종종 하나의 분야를 정해 몇 권의 책을 읽는 사업을 벌이긴 하는데, 그 끝이란 늘 용꼬리, 하물며 뱀 꼬리는커녕 마치 웰시코기 꼬리처럼 웃음을 자아내며 부끄럽게 소멸한다. 요즘은 대체로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렇게나 읽고 있다. 그래도 딱 하나 주제를 정해 읽고 있는 게 있다면 기본소득이겠다. 얇은 책 몇 권을 읽다가, 갖춰 두고 뒤적거릴 책이 하나쯤 필요할 것 같아서 두꺼운 놈으로 주문했다.



 

애정하는 작가 목록에 올라오려고 맹렬하게, 거의 폭력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작가가 있었다. syo는 힘겹게, 정말 힘겹게 저항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명분이 없는 저항은 결국 진압되는 법. 그는 결국 syo거기 올라온다고 딱히 뭐 영광스럽거나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한테는 못내 소중한애정작가 리스트에 등재되었는데, 그 이름은 박형서다. 최근 얇은 책 한권을 읽었는데, 가벼운 잽이었음에도 얻어맞고 다운되었다. 그러니까 이미 데미지가 턱 끝까지 차 있는 마당이었던 것. 새 책을 주문했다.



 

뭐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최근 열흘 안에 읽은 어떤 글(열흘이라면서 기억을 못하냐.....)에서 언급하길, 이 나라 독서판에 많이, 그리고 꾸준히 읽기로 치면 왕좌에 모자람이 없는 세 명의 독서가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장석주, 한기호, 이현우이다, 하였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에게 저건 거의 공리나 정의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 이유로 역시 독서삼황 중 1인의 새 책을 주문하였다.



월요일쯤이면 저 아이들이 도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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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2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왜 이 페이퍼가 재밌을까, 하고 생각하고는 그 이유를 댓글로 쓰려니 정확하게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그냥 이런 게 재밌게 읽혔다, 하는 걸로 대신하기 위해 재밌게 읽은 글을 옮깁니다.

(복사 붙이기 함) - ˝제발, 다음 책부터는 출첵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럴 걸 다 알면서도 읽으라고 시키지도 않은 책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어놓고 웬 지랄이냐, 지겨우면 안 보면 될 것 아니냐, 고 하시면 맞는 말씀이라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도 입을 틀어막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또 아니잖아요.˝

syo 2018-08-26 12:4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일요일 낮부터 페크님 한 번 재밌으셨다니 보람있습니다.

장석주 책은 기본적으로 괜찮아요. 다만 제가 너무 많이 봐서 그런거죠^^

페크님 시원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8-08-2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책은 서평집이죠? 두꺼운 책 탐납니다 ㅎㅎ

syo 2018-08-26 15:19   좋아요 0 | URL
두꺼운 책은 언제나 독서인들의 로망이죠 ㅎㅎㅎ 책꽂이만 휘어나는거구요 ㅎ

단발머리 2018-08-2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박형서’라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네요. 가벼운 잽으로 syo님을 날리셨다니.. ㅎㅎㅎㅎㅎㅎㅎㅎ
저 웃는 거 아니예요~~~~~~

syo 2018-08-26 19:45   좋아요 0 | URL
아닌데?? 웃으신 것 같은데?? 길게 웃으신 것 같은데?? ㅎㅎㅎㅎㅎㅎ

stella.K 2018-08-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첵은 정말 작가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긴한데
장석주는 워낙에 많은 책을 썼으니 내가 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나서 그럴 수도 있고,
스요님이야 전작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진 않거든요.
그러니 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살포한 후 어느 책에서든
읽어라. 뭐 그런 뜻 아닐까요?ㅎㅎ
저도 가끔 했던 말을 또 다른 글에서 울거 먹기도 하는데
내 글을 처음 읽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데...ㅋ
암튼 저는 장 작가의 책을 두 권 정도 읽었는데 저도 좋긴 하지만 스요님이
말하는 게 뭔지는 알 것 같아요.^^

syo 2018-08-27 17:45   좋아요 1 | URL
기억이 안 났다는 건 말이 안 되겠죠. 저게 보통 인물들도 아니고 그야말로 저자가 인생 전체를 사용해 섬겨온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건 모순이니까요.

스텔라님처럼 했던 말을 또 하고, 다른 글에서 같은 소재를 다시 사용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요. 저도 종종 그러구요.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 장석주 작가님은 너무 다작이세요. 재사용을 감수하면서 지나치게 다작을 고집하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저 문단은 거의 변형 없이, 그리고 너무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맑고 좋은 이야기도 한 작가의 손에서 오랜 세월 아무런 변형도 없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숭배 대상 목록을 암기라도 시킬 요량이 아니고서는 저러면 곤란하죠.

작가가 대상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쓸 때,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반영해서 내용을 채울 수는 있어도, ‘이런 사람들은 읽지 않았으면‘ 혹은 ‘이런 사람들은 읽지 않을테니, 이런 걸 또 써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쓰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저런 대목을 만난 책의 이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바로 다섯 권을 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권이 끝이 아니라고 확신해요.

저도 장석주 작가를 전작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책을 많이 읽고, 장석주 작가님이 책을 많이 쓰시니 자주 만나는 것 뿐이지요. 스텔라님 말씀처럼, 장석주 작가님이 내 책 한두 권 읽는 사람이 더 많고 syo처럼 여러 권 읽는 사람의 수가 훨씬 적으니 괜찮겠지, 하는 식의 안일한 마음으로 저 대목을 반복하는 거라면 그야말로 실망이겠습니다. 더 많은 새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몇 안 되는 단골손님의 기호를 뒤로 미루는 방식이 경영전략상 합리적일 수는 있겠으나, 단골 손님 입장에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냥, 장석주 작가님은 책을 줄이셔야 해요. 지금 지나치게 많이 쓰고 계시고, 인간의 역량은 무한대가 아니니까, 한 권 한 권의 매력이 부족해질 밖에요. 스텔라님 말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권 읽고 말아 못 느끼실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면 그걸로 괜찮은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