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o는 더 잘 써야 한다
작은 개울이 있었다. 마을의 논밭을 다 축일 만큼 넓지도, 깊은 물을 등에 지고 산다는 물고기가 자리 잡을 만하지도 않은, 그저 낙낙한 개울이었다. 개울에서 낮이면 아이들은 멱을 감거나 두꺼비를 괴롭히고, 아낙들은 빨래를 두들겼다. 해걸음에 논밭에서 나온 사내들이 농기구에 묻은 흙을 씻으며 밥 짓는 냄새를 맡다 돌아가는, 작은 마을의 작은 개울이 있었다.
개울녘에 꽃을 심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조용히 마을로 흘러든 남자가 개울녘에 꽃을 심기 시작했다. 그게 몇 년 전인지, 혹은 몇 십 년 전인지, 사람들은 이미 잊었다. 남자는 어느 해는 밭의 흙을 골랐고, 또 어느 해는 논의 피를 뽑았으며, 더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때조차도 남자는 개울녘에 꽃을 심었다. 산이나 들에서 꽃을 옮겨오기도 했고, 마당에 씨를 뿌려 키운 꽃을 아까운 기색도 없이 옮겨심기도 했다. 개울녘은 한 뼘쯤 아름다워지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따뜻한 날 나비가 와서 앉았다 가기도 했으나, 궂은 날 개울의 물이 불면 꽃들은 뿌리째 큰물에 실려 가고 흙탕만 남기도 했다.
개울가를 적신 꽃들을 기꺼워하는 이들이 있었고, 고까워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자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의미 없이 피고 지는 꽃은 마당에 심어 놓고 개울녘엔 작물을 가꾸라고. 권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작은 개울을 떠나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모이는 큰 강에서 꽃을 심으면 어떻겠냐고. 북돋우는 이들이 있었다. 아예 개울로 가까이 와 살라고, 꽃을 심는 일로 살림을 꾸리라고. 그러나 이 모든 이들이 실은 묻는 이들이었다. 모든 말들이 결국은 가면 쓴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당신은 왜 꽃을 심습니까?
남자에게 그 질문을 가장 많이 한 것은 사실 남자의 마음이었다. 싹이 잘 트지 않는 날, 꽃대가 영 힘을 쓰지 못하는 날 밤이면 여지없이 마음이 찾아와 남자의 머리를 두드렸다. 나는 왜 꽃을 심습니까. 잊을 만하면 돌아와 집요하게 물어댔고, 대답을 듣지 못하고 휘 돌아갔다. 이유 없이 꽃을 심는 낮과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독촉당하는 밤이 해와 달처럼 남자의 일상을 운행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기보다는 한판 게임 같았다. 중력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그저 중력 같았다.
남자는 그저 꽃 심는 일을 잘 하였기에, 즐거웠기에 하였을 따름이었다. 그 이외의 일에 서털구털 소질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땅을 거느리는 일은 남자에게 어려웠고, 풍년이 와도 남자의 곳간만 옹색했다. 결국 꽃을 심는 일은 줄어드는 몸피만큼 마음의 덩치를 키우는 방편이었고, 배를 불리는 대신 마음을 불리려는 도착倒錯된 증세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둘 남자를 꽃 심는 남자라 알고 부르기 시작하자, 남자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이, 답을 구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그 무용한 질문이, 우주만큼 크고 무거워져 있음을 발견했다.
끝내 남자는 꽃으로 배불릴 수 없을 것이다. 허기를 채우는 꽃은 피는 꽃이 아니라 파는 꽃이고, 남자가 피우는 꽃은 팔아 배불릴 만한 품종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세상의 많은 개울녘엔, 강변엔, 바닷가엔 남자가 피우는 꽃보다 아름답고 튼튼하며 향기가 천 리를 가는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으며, 그 꽃들로 살림을 꾸리거나, 심지어 그 꽃들을 키우고도 배를 굶주리는 사람들이 세상의 많은 마을에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여, 남자는 없는 솜씨로 밭을 일구고, 느린 손으로 모를 심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심어야 하는가, 이 무용한 꽃을. 이것은 좀 더 작고 풀기 쉬운 질문이었다. 남자는 자기 손끝에서 피고 졌던 꽃들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나고 못난 모양들을 보았고, 그럼에도 그것들을 예쁘다, 냄새가 좋다 해준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으며, 무엇보다 그 모자란 것들의 싹을 틔우고 꽃봉오리를 들어 올리면서 아무렇게나 아낌없이 흘려보냈을 자신의 미소를, 그 살뜰한 시간들을 기억했다. 기억하면서 이 시간이 다시 풍성해짐을 느꼈다.
그리하여 남자는 꽃을 심는 이유를 찾지 못한 그대로, 혹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저 무용한 꽃들을 심어나가야만 함을 알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꽃들은 무용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피어야 했다. 아름다움이 무용을 유용으로 바꾸는 기적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무용하므로 더 아름답게. 아니, 무용할수록 더 아름답게. 꽃을 심는 이유를 꽃들이 대답해줄 때까지, 끊임없이 무용하고 아름답게.




인간은 자기가 공들여 일구고 가꾼 것들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일만 사람을 사귀고, 일만 가지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중 어느 하나도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일만 사람을 바쁘게 만나고 만 가지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느 물건에도,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새겨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애 내내 눈앞에 보자기보다 더 적은 시간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시간은 꺼져버릴 것이다.
_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우리 문학에 끝은 없습니다. 우리의 예술은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울며 외쳐도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의 읽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 말하는, 이 무한한 행동은 끝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의 의미고 인류가 살아남는 것 자체니까요.
_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나는 내 내면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적대와 모순에 맞서 싸울 만큼 내 문장이 단련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꿈을 이야기함으로써 꿈을 존재케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순결한 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를, 지금 여기를, 나의 헛된 상상과 치욕의 물이 뚝뚝 흐르는 기억과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사랑을 견디지 못해서, 그 견딜 수 없음을 조금은 견뎌보려고......
_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쨍한 볕과 한밤의 열기를 보내고 맞는 신선한 가을 저녁에는 누구나 걷는 자이고 싶고, 그렇게 걸을 때 혼자서도 혼자가 되고 둘이서도 혼자가 된다. 그때 혼자는 상태가 아니라 성질이다. 혼자라는 성질. 가을에는 누구나 한번쯤 그 성질에 가까운 채로 시간을 허비한다. 우리는 줄곧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음 그 자체로 이미 헛된 것이다. 그러니까 헛되이 쓰는 시간이 본질적으로 가장 시간에 가깝다.
가을에 헛됨이 없다면 겨울은 아름다울 수 없으리.
_ 김현, 『아무튼, 스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