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일기 - 은둔과 변신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오늘도 정수복 선생님의 『파리 일기』를 읽으며 실망을 이어나갔다. 정수복 선생님의 글은, 정말 재미가 없고, 정말 정론이다. 정론인데 재미가 없는 글, 그것은 존경스럽지만 그렇다고 굳이 연락하고 지내고 싶지는 않은 꼬장꼬장한 인생선배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분명 좋은 책인데도, 읽는 내내 언제 끝나나, 계속 남은 페이지들을 뒤적거리다 다시 돌아와 끙끙대며 읽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흥미로운, 선생님도 저땐 별 수 없으셨군요, 싶은 부분을 발견했다. 선생님이 늦은 시간까지 연구에 몰두하다 그만 늦잠에 들고 말았는데, 사모님이 등장하여 이제 곧 아들 프랑스어 선생님이 올 시간인데 왜 아직 이러고 있느냐고, 오늘 뿐 아니라 당신의 그 밤낮 없는 연구 때문에 나도 요즘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다며, 어디 나가지도 않는 이런 답답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느냐며, 버럭 화를 내신 듯하다. 연고도 없는 파리에 이사와 반강제적 은둔 생활을 해야 했으니 선생님도 사모님도 쌓인 게 있었으리라. 어쨌든 선생님, 주무시다가 비몽사몽간에 물벼락 같은 말벼락으로 큰 봉변 당하시고 그날 일기에 이렇게 남기신다.
감정적 폭발은 심리적 미성숙의 표현이고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말한다. 두 사람 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해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적 폭발은 미란의 개인적 특성인가, 여성적 특성인가? 흔히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감정적인 반응이 빠르고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반면에 미세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이런 특성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남성은 수렵이나 채취 등의 일을 하기 위해 널리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을 했던 반면에 여성은 안정된 장소에 머무르며 출산과 양육, 농작물 재배 등의 일을 담당했던 성별 분업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따지는 일일 아니라 폭발적 감정을 적절하게 다스리고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상황을 합리적으로 처리해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넘어서 타인을 성숙한 자세로 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121 122)
이 글은 마치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객관적으로 쓰인 척 하지만, syo의 눈에는 세상 감정적인 글로 읽힌다. 감정적 폭발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감정적 낙진 정도는 되어 보인다. 선생님께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저지르신 실책 몇 가지를 언급해볼까 한다.
첫째, 아내의 감정적 폭발을 ‘심리적 미성숙의 표현’이라고 비난한다. 설령 정말 상대의 행동이 심리적 미성숙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니가 지금 이러는 건, 니가 아직 심리적으로 미성숙하다는 뜻이야, 알아?” 라고 대응하는 것은 정말 문제 해결에 도움이 1도 되지 않는 최악의 발언이다. 이런 발언은 일을 더 크게 만들 뿐이므로 실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라 하겠다. 오십을 바라보시면서 이런 연애의 기초적 주의사항조차 무시하시는 이유가 '감정' 아니면 뭘까.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수렵이나 채취 등의 일을 해온 남성’ 유전자를 보유하신 선생님께서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을 좀 더 발휘하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둘째, 선생님이 할 수 있었던 괜찮은 대응이 어차피, “당신, 그렇게 화낼 것 까지는 없잖아. 지금은 일단 진정하고 선생님 맞을 준비를 하고, 이따 선생님 가시면 찬찬히 더 이야기해 보자.” 정도였다는 걸로 미루어보면, 감정적 폭발이 개인적 특성인지 여성의 종특인지를 따져보는 부분은 정말 사족에 불과하다. 저 초보적 진화심리학 고찰의 합리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지금 사모님의 감정적 폭발을 개인적 특성으로 보든 여성적 특성이라고 우겨보든 어차피 선생님의 대응 방침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마당이다. 그런데 굳이 불필요하게 이건지 저건지 따져보는 척 하며 여성이 감정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 태도/의도. 이거야말로 감정적인 대응이다.
셋째, ‘흔히 ~ 라고 한다.’는 말로 ‘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남들이 다 그래.’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건 좀 비겁해 보인다.
넷째, 저 진화심리학적 명제가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 명제를 서술하는 어휘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다. 여성의 특성으로 들고 있는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와 ‘미세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라는 두 표현이 '반면에' 라는 단어로 연결되었음에도 syo의 눈에는 둘 다 부정적으로 보인다. ‘미세’? 뉘앙스가 더 중립적인 다른 단어 많다. ‘예민’? 이것도 마찬가지다. 진화심리학 서적을 보면, 이런 부분을 서술할 때 어휘나 대응 구조를 매우 세심하게 고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무슨 무슨 능력이 떨어지고’ 라는 표현보다는 ‘남성은 상대적으로 이런 능력이 뛰어나다’ 는 식의 표현을 선호한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오래 해 오신 선생님이므로, 충분히 조금 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을 고를 수 있었으리라 syo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러기 싫으셨던 것 같다.
다섯째, 결국은 최종적으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니가 감정적 폭발을 억제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니까 그걸 좀 키워라, 그래야 ’여자‘가 아니라 ’사람‘ 된다, 정도로 보인다. 진화심리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화심리학이 주장하는 여성의 특성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개인이 어쩔 수 없는 ‘특성’임을 고려하여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있다. “여성은 원래 특성 자체가 이렇게 열등하니까 여성 니들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 특성을 극복하여 남성처럼 합리적인 존재가 되도록 해라” 고 주장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결론은 “그냥 니가 똑바로 해”다. 그러기 위해,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까지 첨언하신다. 아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다 따져놓고? 깔 때는 다 까고서는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위해서 안면을 싹 바꾸셨다. 그러니까 제 말이요. 이러실 걸, 그 이야기를 왜 하셨냐구요. 결국은 ‘감정적 폭발’을 자행한 사모님에 대한 ‘감정적 툴툴거림’을 주욱 늘어놓으셨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넘어서 타인을 성숙한 자세로 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며 더 깊은 자기 성찰이라도 하실 것처럼, ‘성찰은 역시 나의 것’처럼 서술하시는 데는 정말 혀를 내두를 밖에.
한 문단 가지고 너무 성대하게 깐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있다. 진짜로 있다. syo는 남자인데, 분명 수렵과 채취의 본능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미세한’ 일에 ‘예민하게’ 구는 걸까?
몇 페이지 더 뒤에 발견한 또 다른 재미있는 대목.
나는 재스민 차를 마시면서 다시 툴루즈 여성학대회 자료를 읽었다. 자료를 읽다가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 정의롭지 못함으로 억압받은 자들에는 여성만이 아니라 노인,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아이들, 동물, 유대인, 흑인, 아시아인 등 상황에 따라 수없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130)
이미 이런 저런 사회 운동에 발을 담근 경험이 있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syo는 언감생심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정체성이 빨갱이에 가깝다 보니 노동운동이나 사회개혁 쪽에 더 관심이 많지만, 저런 발언을 볼 때면 좀 웃긴다. 노동 운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노동자의 억압만 발견한다. 그들의 눈에는 여성/장애인/외국인/생태계가 받고 있는 억압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환경운동가들은 생태계의 파괴가 너무 가슴 아프다 보니 노동자/여성/장애인/외국인이 받고 있는 차별은 물론 없어지면 좋겠지만 급한 일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 다양한 운동가들에게 이내 페미니즘에 대한 감수성도 좀 가지라는 이런저런 압력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읽든 마지못해 읽든 페미니즘에 대해 한두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들은 세상 전반에 대해 갑자기 눈을 뜬다. “그래, 여성 뿐 아니라 노인/외국인/노동자/장애인/아이들/동물/유대인/흑인/아시아인 모두가 다 억압받고 있어. 이런 상황에 여성 문제만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옳지 않아!” 맞다. 정론이다.
그런데 세상에, 원래 자기들이 하던 운동에 열중하던 시절에는 좀 봐 달라고, 봐 달라고 그렇게 외쳐도 전혀 보이지 않던 젠더 억압을 비롯한 세상의 갖가지 억압들이, 희한하게도 여성 문제에 대해 공부만 했다 하면 단기간에 모조리 다 발견되어 여성 문제에는 집중을 못할 정도라니. 이쯤 되면 페미니즘 이거, 정말 위대한 학문 아닌가?
이런 이유로 이 책이 나쁜 책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15년도 더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이유로 정수복 선생님을 폄하하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절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착용할 수 있는 안경은 여러 가지다. syo는 이 책을 정수복 선생님의 주된 관심사였던 ‘망명자’의 안경을 쓰고도 읽을 수 있었다. syo의 지금 생활이 정수복 선생님의 파리 생활의 하위호환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빨갱이의 안경을 통해 읽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syo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자주 착용하는 안경이다. 다른 안경을 쓰고 읽은 이 책은 나쁘지 않았다. syo에게 좋았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굳이 syo가 익숙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은 페미니즘의 안경으로 이 책의 한두 구절을 물고 늘어진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그다지 온당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짓도 아니었다. 페미니즘의 안경은 언젠가 syo가 꼭 제대로 갖추고 싶은 시선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므로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쓴다.
결국 syo에게 이 책은 책으로서 버젓이 역할을 했다. 문학책을 읽은 사람이 문학적 지식이나 감동만 얻고 마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를 다룬 책을 읽었는데 어쩐지 미적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 책과의 만남은 그걸로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