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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항상 이건 일기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일기’를 쓰는 경우가 드물다. 개놈(개그병 걸린 놈)이나 중놈(중2병 걸린 놈)이나 보면 항상 추억/감성 팔이를 하고 있을 뿐이지, 그날 벌어진 일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놓고 뻔뻔하게 일기라고 우기는 이유, 그러니까 일기장에 그날을 기록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이 재미도 감흥도 없는 그저 그런 하루였는데, 실은 어제도 그랬고 극히 높은 확률로 내일도 그럴 예정이기 때문이다. 밍밍한 기록이라도 남기는 이유를 이해는 하는데 공감은 못하는 것이다.
일기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장르라는 게 통설인데, 생각건대 이건 이유도 근거도 없는 개소리에 가깝다. 왜 그래야 되는지 납득 불가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도 어느 날 문득, ‘아, 오늘 양촌이랑 작두랑 메뚜기 잡고 개구리 잡아 구워 먹었더니 너무 행복했어, 이걸 기록에 남겨야지. 그리고 이 기록을 앞으로 일기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하는 깨우침을 얻어 자발적으로 일기를 시작하지는 않는다. 일기란 왜 쓰는 것이며, 어떻게 쓰는 것인지를 우리는 남에게 배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준 남(대체로 부모나 선생)은 우리가 쓴 일기를 합법적인 강제력을 동원해 ‘검사’한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물론 잘하는 짓이라고도 하지 않겠다). syo에게 일기란 다른 모든 장르의 글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다. syo가 syo를 ‘나’라고 하지 않고(가끔 한다) 자꾸 syo라고 지칭하는 것은 3인칭 귀요미체(syo 와떠염 뿌잉 뿌잉)를 구사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굳이 이런 짓 안 해도 syo는 대충 좀 귀여운 편이다. 맞잖아요. 뭐왜뭐), 애초부터 남들 보시라고 쓴 글에 자꾸 ‘나’, ‘내가’ 라고 지칭하는 것이 어쩐지 좀 머쓱해서다. 그러니까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 보여줄 건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일상의 찌꺼기를 달여서 만든 싸구려 보리차 같은 글을 써서 되겠는가.
그랬는데, 오늘 정수복 선생님의 2002년도 일기들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내기 위해 파리에 왔지만 결국은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시선이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그 일을 위해 많은 정성을 쏟고 정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
_ 정수복, 『파리 일기』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렇게 추측하기 쉽다.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쏟자는 이야기니까, 이제 syo란 놈이 남들 신경 안 쓰고 일기를 쓰겠다는 다짐을 했겠구먼’ 하고.
땡!
그게 아니라, (아직 반도 못 읽었지만 최소한 지금까지)정수복 선생님의 일기는 너무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뭐 굉장히 아름다운 문장이 꽝꽝 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힌 삶의 지혜가 듬뿍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정도 이야기는 잘 보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것 같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도덕책 수준의 지혜라고 해도 되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정수복 선생님은 저 일기를 쓰던 젊은 날(오십에 가까우셨지만) 이걸 누구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 없이, 그야말로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예견된 고난의 삶을 뚫고 나가기 위해, 코뿔을 갈고 다듬는 코뿔소 같은 마음으로 썼던 것이다. 그러기엔 충분하고 충만한 글이다. 그랬는데 15년도 더 지난 시점에 갑자기 떡하니 그걸 책으로 내셨다? 남들 읽어보라고? 그러니까 syo가 얻은 깨달음이란 ‘응? 그래, 이랬겠다. 이래도 된다는 거지?’ 하는 것에 가깝다......
쓰고 보니 시원하게 돌려 깐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느낀 바가 크다. 앞으로는 syo도 어딜 걸었다, 뭘 읽었다, 뭘 먹었다, 참 맛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소소한 하루를 기록하는 글들을 써 봐야겠구나 하고 있으니, 이건 사실상 독서가 행동을 바꾼 게 아닌가? 와, 그야말로 카프카의 도끼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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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같은 고시원에 사는 친구입니다)이 카톡으로 제보하길 “맑스 200주년 기념으로 고향에 거대동상 세워졌다는 기사에 베댓이 ‘막시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막시즘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자가 된다’ 라는데, 자본주의자가 되나? 어이없네.” 했다.
사실 그다지 어이없을 일은 아니다. 비슷한 버전으로,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못된 놈이고 나이 먹고도 공산주의자인 놈은 등신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돈다. 이것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로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이상론에 가까운 비현실적 사상이라는 비난이다. 두 번째로, 젊은 날 운동에 뛰어들어 혁명을 제 손으로 이루겠노라며 극단 투쟁하던 인간이, 세월이 지나자 일순간 변절하여 자기 보신과 자본의 배를 불리는 데 급급한 꼴을 너무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니까 그 새끼 개인도 나쁘지만, 마르크스주의 자체도 별 볼일 없다는 일타쌍피형 비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syo는 이렇게 읽는다. 마르크스는 역시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분석가라고. 『자본론』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다채로운 수단과, 그 수단의 작동 원리를 속속들이 기록해 놓은 그야말로 자본가에겐 '노동착취 무작정 따라하기' 같은 책이다. 장래 희망이 ‘부르주아’인 어린이라면, 그 아이가 공부해야 할 것은 한글과 『자본론』이다. 심지어 한글은 필수도 아니다.『자본론』이 영어, 독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등 기타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막시즘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syo의 독창적인 생각도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를 읽고 그가 던진 문제를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어쨌든 그 대표적인 책 제목이 『자본론』입니다. 이 책에는 노동자를 '정당하게' 착취하기 위한 이론이 쓰여 있습니다.
뒤집어보면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바이블'이며 '좀 더 유능한 자본가가 되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실제로 구소련의 지도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해가며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 방법으로 일본 경제의 번영을 이뤄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입니다.
_ 마토바 아키히로, 『위험한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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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 출판계가 들썩들썩한다(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일 년에 2, 3종은 꾸준히 나오던 마르크스주의 책들이지만, 올해는 좀 더 주목할 만한 책들이 퐁퐁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새로 나온 이 마르크스 평전이, 내가 작년 여름 2권만 구해 읽고 진한 감동에 몸부림쳤던 ‘칼 마르크스 전기’와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번역자도 출판사도 다르긴 하지만, 그 책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가 만든 책을 저본으로 했었는데. 잘은 몰라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는 국책기관 급은 될 텐데 전기를 두 권이나 내진 않았겠지 싶기도 하고. 만일 그렇다면, 이 평전은 그야말로 마르크스의 업적을 가장 풍부하게 드러내는 평전인 동시에, 거의 마르크스라고 쓰고 하느님이라고 읽어도 될 정도로 빨아주는 평전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교리로 생각하는 곳에서 만든 책인데 어련할까. 일단 바로 사 놓긴 했는데 찬찬히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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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행사 대상 도서로 마르크스주의 서적 70권을 선정했다. 리스트를 훑으며 세어보니, 이 가운데 35권을 이미 읽었다. 역시 알라딘 빨갱이 syo. 호는 알빨. 그보다 실은 입문서 빠돌이라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호는 입빠.
알빨이든 입빠든, 마르크스 200주년을 맞이해 가만히 있을 syo가 아니다. 실은, 마르크스 관련해서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모든 입문서와 개론서를 다 읽은 다음, 그야말로 쌩초보를 위한 ‘입문서/개론서 읽는 순서 안내’ 같은 페이퍼를 써 볼까 소소하게 기획 중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개론서는 너무 많다. 니체를 제외하면 나머지 철학자들에 대한 책은 그 수가 대체로 마르크스의 반, 혹은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는 가려야 할 옥석도 있고, 읽기 좋은 순서도 있다. syo 역시 맑알못 시절에는 표지만 보고 이게 이유식인지 홍어삼합인지 구분할 줄 몰라서 부득이 코도 뻥뻥 뚫리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다.
사실 기존에 나와 있는 입문서/개론서는 거의 다 일독씩은 했지만, 희미한 기억만으로 테크트리를 짜면 사회에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으므로, 한 번씩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지금은 이래저래 다독할 처지가 되지 못하여 쉬엄쉬엄 읽는 중이다. 7월에 시험이 끝나면 예년처럼 미친 듯이 읽을 수 있을 테니, 아마 10월 언저리에는 뭐라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얼른 기억나는 괜찮았던 책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