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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사용법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지금은 2012년 10월 15일이고, 저녁 7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다. 시험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어서 빨리 과제를 와이섹에 제출하는 것을 마친 상태여야 한다. 그녀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과 딸리는 필력때문에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컴퓨터 화면의 창 안에는 로그오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여주는 청색의 작은 네모들이 몇 개 남아있지 않다. 타자를 두들기는 손가락은 초조함에 자꾸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그녀는 연세 맨투맨에 편한 스키니진을 입고 있으며, 운동화를 신은 발 역시 멈추지 않고 달달 떨리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 자기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대체 이 소설의 화자는 누구인가? 발렌인 것 같은데 발렌의 죽음 옆에 놓여져 있던 배치도는 소설의 미칠 듯한 섬세함과 치밀함과는 너무나도 대비되게 단순 명료하다. 혹시 발렌이 그 건물에서 누구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은, 아주아주 먼 옛날부터 살고 있던 존재로 죽지 않는 불사신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개개인의 사소한 비밀들, 과거들, 조상의 이야기들까지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책의 마지막에 발렌은 죽지만, 소설의 마지막 역시 끝나며 의미심장한 글귀를 남긴다. 그녀는 여기서 확인을 하기 위해 책 658쪽을 핀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거주하러 오지 않을지 모르는 어느 건물의 단면을 스케치한 것이었다.' 발렌의 죽음과 함께 이 건물 역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의심한다. 하지만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2012년 10월 15일이고, 조금 있으면 저녁 7시가 될 것이다. 그녀는 배가 몹시 고프다. 저녁을 먹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서 이 과제를 올리고 상록샘으로 달려가 커피와 밥을 사 먹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선 두 번째 의문을 풀어야 한다. 윙클레가 이루고자 했던 복수는 무엇인가? 처음에 그녀는 단순히 윙클레가 무시무시한 자신의 창조물인 퍼즐로 바틀부스를 괴롭히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틀부스의 죽음으로 ‘지금’의 이야기가 끝나면서, ‘진행 중’인 윙클레의 복수는 바틀부스를 향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가 충격적이었다. 난데없이 발렌의 죽음이 등장하며, 그 죽음의 이유에 명확하게 ‘옛 제자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혹시 윙클레는 발렌과 그의 죽은 아내 마르그리트 사이에 있었던 묘한 애정관계를 눈치 챘던 것이 아닐까? 그의 복수는 바틀부스의 죽음을 통한 발렌의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의심한다.
지금은 2012년 10월 15일이고, 저녁 7시가 조금 지났다. 그녀는 완벽히 소설을 패러디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한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가 위대한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의 친구 한 명이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도서관을 나간다. 그녀는 여전히 남아 타자를 두들긴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재는 멈춰진 것이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소설 속의 이야기는 멈춰진 어느 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이는 이미 사건은 종결되었고, 화자가 그 사건의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하나의 그림일까, 소설일까, 혹은 누군가의 기억일까? 그녀는 아마도 이것이 누군가의 기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소설, 영화처럼 기억 역시 남는다. 사람이 사라지고 건물이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바틀부스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설령 '무'로 돌렸다 해도 그에 관련된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쪽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억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일정한 규칙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새기고 있지만 항상 기억은 불완전하다. 완벽한 쪽글이라는 개념에 그녀의 쪽글을 일치시키고 싶지만 어딘가 빗나가는 기억과 규칙으로 그녀의 쪽글은 하나의 개체로만 남는다. 오늘도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싶다. 쪽글이 완성된 지금 그녀의 앞에는 그녀가 원했던 x의 쪽글이 아닌 w의 쪽글이 나타나 있다.
* 초록색 외계인 빛(외계인 조르주 페렉) 표지를 벗기면 하얗고 몽실몽실한 껍데기가 등장한다. 베개로 쓰지도 못할 저도로 토실토실한 인생 사용법은 저걸 들고 다니는 내내 내 어깨를 고문했더랬다.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 소설이 이런 식으로 쓰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준.. 페렉 아저씨 표정만큼이나 알쏭달쏭한 소설. 내 에세이도 덩달아 알쏭달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