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시인이었다면
동굴벽화에 그렸을 법한 상상의 새를 주말에 만났었다.
새는 예뻤을 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깃털을 가졌으며 비슷한 소리를 냈으며 나와 비슷한 날갯짓을 하고 이었다. 그녀를 본 첫 순간 '세상이 나를 위해 새 한 마리는 남겨 두었구나.' 생각 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에게 소중한 것을 호락호락 쉽게 내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조카들의 해맑은 미소를 가진 그녀는, 그 작은 새는 미소를 걷어내고 새가 가진 모든 용기를 쥐여 짜며 깃털 속에 가려진 암울한 흉터를 내보였었다. 나로선 근접할 수 없는 깊고도 참담한 상처였다. 아니, 그것은 상처라기 보단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처벌인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척 혼란스러웠다.
새가 끊임없이 머리 위를 맴돈다. 운전을 해도 기계 앞에 서도 끊임없이 나를 어지럽힌다.
새가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새를 쫒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니라.
새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이 정신없이 바쁠 때가 오히려 행복하다.
경험을 통해 나는 잘 안다.
곰처럼 미련스럽게 속으로 삭히다보면, 시간을 보내다보면 ... ...
시간이 약인 것이다. 비겁해도 좋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억지로 우기면 아픔만 더 커질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때론 나의 감성을 짓누르는 이성이 미워지지만
사랑이 이성보다 강할 순 없겠지?
( 강한가? ... ... 강해 버릴까? )
이런 글귀가 생각난다.
"머리 위를 나는 새는 어쩔 수 없어도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상념이 내 머리에 떠도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닌 것은 아니 것으로 감내해야만 한다.
새는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다. 새는 단지 날개를 쉬어 갈 조용하고 따뜻한 공간을 찾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예쁜 새를 다시 만난 들,
나와 같은 소리와 나와 비슷한 날갯짓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자리에 들자. 또 한 번 우직하게 잊자. 곰탱이처럼 미련하게 굴자.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다 보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 못 이루는 일도 없이
예전처럼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쉽게 잠에 빠져들 것이다.
개운한 하루가 시작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