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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2005-03-1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이 제일 큰 이가 제 친구입니다.
 

사촌기의 물이 바짝 오른 고등 1년 시절, 나는 한 여학생과 교제 중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의 사정으로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였고 당시 나는 누나의 보호아래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역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나에겐 경상도의 무뚝뚝함이 흘렀고 그녀는 끝말이 살짝살짝 올라가는 서울말씨로 나를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게 바꿔 놓곤 했었다. 그녀는 우유처럼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엔 많은 공장 때문에 해가 가려져 서울 사람들 모두가 하얀 줄만 알았다. 어느 초겨울, 그녀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그녀는 정신없이 속삭였고 그 숨결이, 그 입김이 하얗게 내 뺨에 와 닿았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지만 수면제라도 섞인 듯한 그녀의 입김에 정신이 혼미해 졌던 기억은, 힘든 군 시절 나의 좋은 추억이 되었었다. 그녀가 무척 좋았었다. 학교가 멀리 떨어져있어 우린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는데 의미 없는 날들을 보내며 주말만을 기다렸었다. 고2 여름 방학 땐 친구들과 4쌍의 짝을  이뤄 계곡으로 캠핑을 간 적도 있었다. 달빛아래 우리 둘은 우리의 꿈을 얘기했었다. 나는 의사가 되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고 그녀는 내 꿈이 이뤄지길 빈다며 격려하며 한없이 나를 고무시켜 주었다. 어느 큰 명절엔 서울에서 내려 온 그녀의 형부를 소개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점점 점입가경으로 빠져 들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소개 자리가 우리의 미래, 혼인을 약속하는 상견례 자리쯤으로 착각했었다.

그러던 고2 가을, 드디어 나는 일을 냈다. 언제나 그랬듯이 토요일 방과 후 우리의 약속장소는 시내에 있는 ‘채플린’이란 커피숍이었다. 나는 그날 연필 칼과 흰 천을 가져갔었다. 그리고 그녀와 만나 그것들을 테이블위에 올려놓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 얘기는 장황하게 시작되었다. 풍신수길이 노비였으나 손 지문을 고쳐 찢어 대성할 수 있었다는 고사와 함께 나도 내 지문을 찢고 그 피로 그녀와 꼭 결혼하겠다는 혈서를 쓰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깜찍하고 엽기적인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던 내 기대와 다르게 그녀의 반응은 놀라는 가운데 차분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으며 누나가 동생을 타이르듯 말을 시작했다. 우린 아직 어리고 결혼은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고 지금은 좋은 친구관계로 지내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백번 천 번 옳다. 그러나 그땐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옳다 여기면서도 알 수 없는 화가 났다. 그 일이 있었지 얼마 뒤, 조급한 성격 탓인지 입시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이유는 분명히 기억해 낼 수 없으나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그녀가 싫어졌다. 나는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했고, 안타깝게 여겼던 친구들의 연극으로 다시 만남의 자리를 갖았지만 돌아 선 내 감정은 영영 굳어버린 뒤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싫어진 이유에 대해 세월이 흐른 뒤 틈틈이 생각해 봤었다.

내가 잘 되어 성공하면 애인이 되고 내가 별 볼일 없이 평범해 지면 친구로 지낼 것 같은 그런 모호한 관계가 싫었던 것이다. 좋으면 그냥 좋고 싫으면 딱 부러지게 싫어야지, 천칭에 나를 올려놓고 다른 놈들을 분동처럼 바꿔 올려놓으며 나를 가름하는 듯한 상황이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아리송한 관계가 싫었던 것이다. 나만의 성격 탓인지 대부분 사람들이 모두가 겪는 고통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한 모호한 관계의 지속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었다. 그래서 나의 결정은 절교였던 것이다. 그런 아리송한 분위기에 처해 있느니 차라리 깨끗이 단념하고 혼자인 것이 그땐 더 현명한 선택이라 믿었고, 나의 풋사랑은 얄팍한 내 자존심보다 못난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 3때, 또 다른 여학생을 사귀었으나(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지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왜 순수하게 그냥 좋아 할 수 없나하는 문제의 해답이 궁금했고 줄 곧 이 문제가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 뒤, 나도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가지고 중립적인 자세로 이성 교제를 가볍게 해 왔지만 이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 줄 해답은 찾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은 TV를 볼 시간도 없고 멀리하지만 예전엔 ‘동물의 왕국’을 보이는 대로 보곤 했었다. 그때 한 번은 아마존의 깊은 계곡에 사는 새들을 촬영한 장면이 방영되었었는데, 암놈을 앞에 두고 수놈들이 차례로 날갯짓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레이터가 하는 말이 “암놈은 깃털이 윤기 나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수놈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희귀한 새조차도 짝짓기를 할 때 조건을 따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야 오죽하랴? 는 것이었다. 정말 속이 시원했다. 비로소 피가 동맥에서 흘러나와 정맥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고 음식물이 식도를 지나 위에서 소화가 제대로 되는 느낌이었다. 인간으로서 여생을 같이 살아 갈 반려자를 선택함에 조건을 따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었고 '동물의 왕국'을 통해 심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결혼 조건에 재력, 학벌, 사회성, 도덕성……. 등 무수히 많이 있겠지만, 나의 첫 맞선 상대자는 나의 기준에서 안타깝게도 외모가 부족했고, 이제는 나 역시 조건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 그녀가 오히려 나보다 더 순수했을지 몰라도 그때의 풋사랑은  이렇게 굴절되어 내 중심생각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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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흑백 TV로 전설의 고향을 즐겨 봤었다. 워낙 겁이 많은 탓에 귀신이 나오는 장면에선 TV옆에 숨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가장 재미있어 했던 프로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전설에 이런 것이 있었다. 마음씨 착하고 효심이 강한 가난한 농부가 하루는 생시 같은 꿈을 꾼다. 다음날 아침, 농부는 꿈이 이끄는 대로 나뭇가지 위 새둥지에서 새알처럼 생긴 옥돌을 얻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 옥돌을 아픈 사람에게 갖다대면 아픈 사람은 거짓말처럼 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농부는 단번에 부자가 되었다. 전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옥돌엔 작은 티가 있었다. 말 그대로 옥에 티였다. ‘저 옥에 티만 제거한다면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려 내지 않을까?’ 하고 농부는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래서 농부는 옥에서 티를 제거해 버린다. 어떻게 되었을까? 옥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신비로운 기능도 잃어버리고 흔해빠진 옥돌이 되고 만다.

 나는 항상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게 되면 이 전설이 떠오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티가 있음으로 해서, 허물이 있음으로 해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수 있고 나는 나일 수 있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서 그 티를 함부로 제거하려해선 안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런 티가 있음으로 해서 그 사람은 더 값진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전설을 나름대로 해석했었다.

어제 맞선 자리에서 나는 한 번 더 이 전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보다 여섯 살 어린 상대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가량 차를 몰아 감포 바닷가에서 캔 커피를 나눠 마시며 같은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에도 들렀으며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같이 했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수가 적은 편인데 상대는 시끄럽지도 않고 적은 것도 아니고 적당하게 쫑알쫑알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외롭지 않게 형제도 셋인 집안의 맏딸이었다. 나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심성을 보려 애썼으며, 이런 나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상대는 조심스러웠고 예의 발랐다.

하지만 그에게도 티는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의 티는 얼굴에 있었다. 눈언저리의 주름을 가리기위해 한 화장 때문인지 오히려 나이에 비해 주름이 엄청 많아 보였다. 그리고 코가 옆으로 많이 퍼져 있었다. 노란 이빨이 단단하다지만 그 사람의 이빨은 노란 것이 아니고 누런 것이었다. 함께한 여섯 시간동안 줄 곧 마음이 아팠다. 절세미인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예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애쓰면 애쓸수록 마음은 더욱더 아파왔다. 나의 마스코트인 조카가 그 사람에게 안기면 울 것만 같았다. 나의 2세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외모보다 심성인데 ……. 나도 별 수 없는 속물이었던가?

그녀를 정중히 내려 주고 ... ...

찬찬히 다시 생각해 보자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왔다.                                < 9월 6일 씌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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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5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쁘띠아 2004-11-1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아!~ 홧팅...

파란운동화 2004-09-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 고맙다.
하지만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말 마음이 예쁜 사람이라면, 나는 순수한 영혼에 작은 상처를 남긴 사람밖에 안되잖아.
그녀는 나같은 놈을 쉽게 잊고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뿐이다.
노래 반복해서 여러번 듣는다.
네가 째려봐서 기분 나쁘다. 잘 자라....^^

쁘띠아 2004-09-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익~~ 째려보는거 아닌데...쩝~
 

10여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건전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큰마음 먹고 연극을 보러 갔었다. 배우들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큰 감동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실로 컸었다. 마로니에 공원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소극장을 찾아 들어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목이 ‘바쁘다 바빠’로 기억하는데, 2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간 것을 몹시 후회 했었다. 시나리오, 배우들의 연기, 엉성한 무대 장치 등 어느 하나 내 기대에 차는 것이 없었다. 우리 일행을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박수부대의 동원이었다. 좌석 제일 뒷자리에 10여 명이 앉아 크게 우습지도 않는 부분에서도 억지웃음을 크게 내었다. 얼마나 크게 웃던지 웃음소리에 위협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나의 연극에 대한 동경은 사라져갔고, 연극 관람을 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더 주워 졌으나 사양하거나 관람권을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렸다. 모든 연극이 이처럼 순 엉터리는 아닐 텐데, 처음의 잘못된 만남으로 연극과는 영영 담을 쌓고 말았다. 모든 일에 마무리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시작도 너무나 중요한 것 같다.

지난 일요일 어머니 칠순연(사진 나오면 올려야지...)이 있었는데, 그날을 위해 어머니께 형제들이 한복을 한 벌 맞춰 드렸다. 그 포목점 할머니의 주선으로 내일 난생 처음 선을 본다. 학창 시절에 보던 소개팅, 미팅 개념이 아닌 맞선이다. 연예로 결혼에 골인 못하고 선을 봐야 하는 처지까지 와야 했나는 자책도 잠시, 아주 무덤덤해 진다.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듯, 모든 이가 연예로만 결혼에 골인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나의 인연을 맞선을 통해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내일 자리에서 만날 수 없다면 그 다음에 맞선을 통해서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 우려하는 것은 연극의 경험처럼 처음에 너무 연연해 아예 포기는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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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4-09-12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칠순연!! 추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