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루탄을 쏘지 마라"
"위통을 벗어 던진 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쳐들고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아스팔트를 달리는 청년이 갑자기 카메라에 들어왔다.
1984~1990년 사이 시위현장만 집중적으로 지켜 보았던 당시에 그 동안 찍어 왔던 무수한 사진이 대부분 폭력장면투성이여서 데모 현장 속에서도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사진이 찍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이날,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은 부산 출장 3일만의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80년대 최대의 시위로 불리던 이날 부산 문현동 사거리는 8천여 데모군중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팔이 다탄두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펼쳐지고 그 태극기 앞에 위통을 벗은 청년이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튀어나온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이거다' 하며 목에 걸고 있던 세 대의 카메라 중 니콘 F2 300밀리 렌즈로 후다닥 2컷을 찍었는데 찍자마자 쳥년과 태극기는 인파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이 영상은 나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고 기억에 남는 걸작 사진이 되었다.
그 청년의 절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 공권력,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오류와 이 세상을 향애 외치는 양심의 상징 같았따. 이 사회의 폭력, 탐욕, 무지, 저속, 잔인, 부정에 대해서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5공화국과 6공화국의 정치형태에 분노하며 최루탄과 함께 눈물 흘리며 돌아설 때 나는 갈망했다. '이제 다른 사진을 찍고 싶다' 정말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은 이것 뿐인가. 노동자가 임금을 올리고 대학생들이 민주사회를 요구하는 방법이 이것뿐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공권력 모두가 답답하고 울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명진)기자는 특별히 민주화의 현장에 관심을 갖고 시위현장만 계속 다니다 보니 '데모 사진기자'로 소문난 기자였다.
역사적인 현장을 제일선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사진기자는 항상 진압경찰과 시위대의 중앙에서 시달려야한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시위현장에서 방독면과 헬멧, 그리고 사다리, 무전기, 카메라 가방을 메고 시위대들의 돌멩이, 화염병과 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를 피해가면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행위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폭력경찰을 사진 찍는 사진기자의 경우 폭력이 가해 오는 것을 각오해야한다. 최루타노가 파편이 피부에 박혀서 병원에 입원도 해야하고 화명병에 화상을 입고 붕대를 동여맨 채 쥐재다는 것도 다반사로 되어 있다.
[ 이 한장의 사진] 해설 전민조. 행림 출판 1994. 114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