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젖다 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이 아닌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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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축축하다. 가을비.. 오늘은 머리나 하러갈까 하다가 날씨가 너무 아까왔다. 옆에 있던 현옥샘도 오늘 '오빠가 벌초 가서' 시간이 있단다. 눈빛을 교환한 우리는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건수'를 만들었다. 늘 따뜻한 경희샘이 합세하고.. DMC에서 '연인'을 함께 보고 모르는 길 물어물어 내원사에 도착한 시간이 6시 10분전. 아저씨게 부탁부탁해서 오천원 내고 계곡을 10분동안 드라이브했다. 아~ 여기저기 자그마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골짝골짝.. 이 시처럼 흠뻑 젖었다. 가을비에, 가을 운치에, 천성산 내원사 계곡에, 그리고 언제나 끊이지 않는 우리 아이들 이야기에... 가을이 더 깊어지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계곡을 걸아봐야겠다. 그땐 침묵에도 젖어봐야지. 마침 선물로 받은 이 시.. 마치 내 기분 알고 보낸 듯한..
 

"그 책을 읽은 후유증이야. 이런 책 읽으면 꼭 오바한단 말이야" 너무 버거워서 내가 대뜸 뱉아낸 말이다.

어제.. 학교에 와서 컴을 켜자마자 뚱땅뚱땅 나는 또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야자자유권! 우리반은 유난히 미술, 음악을 하는 아이가 많다. 인문계에서는 특이하다 할 만큼 미용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둘이 있고 요리학원에 다니는 아니도 있다. 2학기 들어 몇달 후면 3학년이 되는 아이들이 그나마 공부를 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충은 대부분 하는 쪽으로, 야자는 선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긴 내가 뭐라 말 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거라고 맘먹고 있었다. 별다른 설득 작업 없이도 보충은 3명 빼고는 다 하겠다고 했고...  대신 야자는 미술, 음악, 미용 등 학원에 가는 아이들은 빼주기로 해서 11명이 야자를 아예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일별로 사정이 있는 6명도 가능한 날만 하기로 했다.  거기다 날마다 아파서 병원가야한다는 아이, 급한 사정 있다는 아이.. 등 다 빼주면 우리 반은 제일 적을 때는 20명 정도, 많을 때도 26명 정도가 교실에 남아있다. 나랑 몇분간 신경전을 벌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이가 '승리'하고 집으로 가는 쾌감을 맛본다.  나는 늘 "이번이 마지막... 다음 번엔..."운운하며 아이들을 다 보내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탈출' 하고 싶어했다. 말 못할 사정일 때, 말 안하고 싶은 사정일 때, 담임이랑 그 몇분조차도 씨루기 싫을 때 아이들은 그냥 가버렸다. 거짓말 하고 가는 것보다 이것이 나은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음날 야자감독 일지에 남겨진 불참 아이들의 이름이 나를 난감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어쩌지? 규칙은 규칙인데... 이러다가 정말 우리 반 공부 안하는 분위기가 박혀버리면?" 인문계 담임으로서 여러 가지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야자자유권이다.

1. 우리 반 모두 지킨다고 약속할 것.

2. 하루에 2명 이상은 안됨. (너희들이 서로 의논해서 날짜를 조정해올 것)

3. 그 달 사용하지 않은 야자자유권은 매달 말일  500원 상당 매점상품권으로 교환해줌.

4. 양도, 대여할 수 없으며 적발시에는 야자자유권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

'이 규칙들을 반 아이들 모두가 지키면 한달에 하루, 이유를 전혀 묻지 않고 특별히 자유시간을 주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대안이었다.

좋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예쁜 종이에 출력하고 조심조심 잘라서 교실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래? 말래?" 종례시간.. 너무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저희들이 손해볼 일은 아니니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이 규칙들 꼭 지킬거지?" 좋아하는 아이, 어리둥절해하는 아이, 뭔가 불안해보이고 불만스러워하는 아이.. 아주 짧은 시간에 아이들의 얼굴을 스쳤는데 나의 예상과는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녀석들... 이유가 뭘까?

설명을 끝내고 교무실을 나오는데 아이들이 또 달라붙었다. '응, ㅁ정이는 안과, 미@이는 치과... 뭐라고 ㅇ늘이도? 아&이는 생리통?' 난감했다. 지금 막 나눠줬는데 오늘 쓰겠다는 녀석만 네 명이다.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다 아픈 건데 뭐~ ㅁ정이와 미@이는 보충까지 빠져야한다고 했다. 마치고 가면 병원이 문을 닫는다고, 예약해뒀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아~ 나는 또 즉흥적인 감상으로 사고를 쳤나보다. 미덥지 못하게 쳐다보던 범생이들의 눈빛이 무얼 말하는 건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막 교실을 빠져나오는데 마침 우리반 보충이신지 부장선생님께서 앞문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보충 빠진다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북적거리는 그 장면을 그대로 다 들켜버리고 말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보충을 빠지겠다고 샘들을 찾아가 매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민망했다.

교무실로 돌아오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EBS 감독 문제로 신경이 서있는 상태인데 아이들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고 맨날 이 모양이다. 역시 내가 또 실수한건가? 옆에 앉은 현옥샘한테 사정을 이야기하며 계속 투덜거렸다. "그 책을 읽은 후유증이야. 이런 책 읽으면 꼭 오바한단 말이야" 요즘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읽고 있다.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자기자리로 아올 때까지 한결같이 기다려주는 선생님.. 감동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비슷하게라도 따라가고 싶었나 보다. 그러면서 이렇게 또 금방 후회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야자자유권'이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족쇄나 되지는 않을지... 스스로를 잘 다듬는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고 눈치보고..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나 않은지.. 나의 과욕은 아닌지... 불안하고 후회스러웠다.

오늘 아침, 어제 야자일지를 확인했더니 그렇게 보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명이 또 도망을 갔다. 지난 토요일 야단맞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한 녀석들이다. 역시 내가 잘못한 건가?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해야할까? 가슴이 갑갑했다. 섭섭하고 속상했다. 조치를 취해야한다. 조례시간에...

"눈을 감아보세요.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 여러분에게 '야자자유권'을 만들어 준건 자기 스스로 자신을 계획하고 조절해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수요일 수업시간에 얘기했듯이 중고등학교까지 스스로 통제하는 연습을 한 번도 해본적 없이 대학 갔을 때 느낀 허무와 공허가 얼마나 큰 지 알기때문에 여러분에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짐승입니까? 여기가 감옥입니까? 제가 늘 여러분을 협박하고 때리고 통제하고 그렇게 하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제가 늘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통제하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습니까? 이제 3학년인데 공부하는 연습, 해야하지 않습니까? 하늘은 노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집중하는 것도 연습해야되는 겁니다. 3학년이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되겠습니까? 그리고 평소에 늘 '야자' 성실하게 하는 아이들.. 여러분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맨날 도망간다고 야단만 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 칭찬도 하고... 그럴려고 어제 그거 만들어준 겁니다. 근데.. 내가 너무 아픕니다... 여러분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나에게 희망을 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노력하는 모습, 그게 제게 힘을 줍니다. 하루아침에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는 모습, 그래서 나아지는 모습.. 그게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픕니다... 오늘.. 제게 내려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무실로 와주세요."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1교시 후, 덕*가 내려왔다. "샘, 죄송해요. 다시는 다시는 안그럴께요." 빙그레 웃으며 "아플 때는 가야지." "안 아플께요." "그래 덕*야 올라가봐."

3교시 후, ㅁ혜, 현ㅇ, 지@이도 내려왔다. 녀석들은 덕*와는 달리 상습범이라 장황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느들 야자 안할래?" "아니요" "그럼 느들 필요할 때 할 수 밖에 없는데.. 느들이 그렇게 하는 거 일단 나한테는 부담이 된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분위기에 영향을 주겠제? 그럼, 느들만 편하고 나도, 아이들도 다 불편해지지? 그건 안되겠다. 그럼 어떡해야할까?" "우리가 열심히 해야돼요" "그래 그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자꾸 이런식이면 우짜노? 느그가 스스로 샘한테 와준 거 참 고맙다. 안 내려올 수도 있었을건데.. 그래 우짜면 좋겠노? 지금 말로 하기는 좀 그렇제? 그럼 올라가서 글로 함 써봐라. 다른 방법이 있으면 쓰고 느들 생각을 함 써봐라. 느들 가장 큰 장점은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거, 샘이 아니까 그렇게 함 써와봐라. 그런데 가끔 표현하는 방법이 나한테 상처가 되기도 한다. 느그 40명인데.. 느들 나는 다 받아들이는데.. 느들도 그냥 이런 나를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나?  .... 그래 일단 올라가라. 내려와줘서 고맙다." 횡설수설... 평소에 섭섭했던 부분까지 살짝 살짝 내비치며 내 얘기를 하고 아이들을 올려보냈다.

종례시간에 현ㅇ와 ㅁ혜가 쪽지를 내밀었다. 은ㅁ는 짧게 현ㅇ이는 길게....잘못했다고,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안빠지려고 생각중이지만 자기가 어떻게 바뀔지, 어떤 사정이 생길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겠다고...

이렇게 '야자자유권'은 나의 뒷통수를 쳤다.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있고 아이들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건 이런 장면 때문이다. 그리고 스친 생각 하나 더, 아이들이랑 나랑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 그것이 진짜 문제 아닐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담임이라해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잘 없다. 서로에 대해 알아볼, 알려줄 시간이 없다. 메일로 생각을 주고받기에도 아이들이 너무 많고... 좋은 방법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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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9-1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200

이야~ 방문객수 200번째네요.


느티나무 2004-09-1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윤제림시인의 시집(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한 편입니다.

함께 젖다 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이 아닌 것들과.

해콩 2004-09-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번째도, 200번째도 샘이! 오늘도 저희 업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놀러오세요. 남겨주신 시도 너무 감사.. 오늘 저도 '함께 젖'었어요. 너무 늦어서 절집에는 못들어갔지만 내원사 계곡에 떨어지는 가는 물방울과, 아스라이 보이는 산과, 들녁에 고개숙인 나락들과, 탁주잔 기울이던 샘들과... 일상들과 일상아닌 것들과.. 흠뻑 젖었지요. 함께. 가을비가 꽤 내리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
 

 “아이들보다 내 꿈이 더 커지지 않길”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 온 선생님이 하루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선배를 찾아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지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좀 더 큰 꿈을 갖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고.

  그러자 그 선배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보다는 지금 잇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보라고 조언해줍니다. 그리하여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길을 찾아보라고.

 

  몇 년 뒤, 선배의 조언에 힘입어 그 선생님은 신문지상에도 가끔씩 오르내리는 성공한 초등학교 교사의 한 표본이 되기에 이릅니다. 그때 그 선배는 자신의 충고가 적절했다고 생각하여 흐뭇한 마음에 그 사실을 알리고자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도 한 사람 독자로서 두 분께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처럼 아이들도 최고가 되었을까? 최고가 되신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은 더 작아지지나 않았을까? 아이들이 더 작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을 과연 교사로서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괜한 트집(?)을 잡게 된 것은 그 초등학교 선생님의 ‘꿈의 동기’가 아이들을 만나는 직업에 대한 초라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최고’ 보다는 ‘자기 분야’에 더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왜 끝내 최고여야만 하는지, 왜 최고가 아니면 안 되는지, 그의 맹목적인 최고 숭배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최고의 교사이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을 다잡이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교사에 가깝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제 담을 닮아서인지 최고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최고가 되라는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화초에 물을 주듯이 자기 삶을 잘 가꾸어 보라고 말해줄 뿐이지요.

 

  물론 최고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다우니까요.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아이들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고가 되라고 하는 것은 곧 꿈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최고가 되려는 욕심이 커질수록 더불어 사는 가치는 더욱 작아집니다.

 

  제가 근무하는 실업계 학교에서 저는 열여섯 남짓한 나이에 이미 삶에 지쳐 버린 아이들을 만나고, 가난으로 엇나가는 아이들, 가정 불화로 끊임없이 방황하는 아이들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현실은 곧 삶에 대한 무기력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열등감으로 이들을 이끕니다. 삶의 가치가 ‘최고’만을 지향할 때, 최고가 될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비극이 탄생합니다.

 

  이제 실업계 학생들마저 대다수가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학벌주의나 사회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도 염려스럽거니와, 비교적 입시로부터 자유로웠기에 인간교육 냄새가 남아 있던 실업계 학교마저 입시 학원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학교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머뭇거림의 이유는 지금의 학교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아이들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묻어나는 사람 냄새를 지켜주고 잃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로서의 제 몫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망과 희망은 안팎이 같은 한 줄의 고리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절망하다가도 희망을 갖고, 희망을 품다가도 다시 절망에 빠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절망의 지점으로 기울어지더라도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힘,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보다 제 꿈이 더 커지지 않기를 늘 기도합니다. 최고의 교사가 되기보다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아이들과 함께 위대해지는 사랑의 교사로 오래오래 교단에 남고 싶습니다.

 

  하여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퍼 줄 수 있는 것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대로는 서툰 사랑으로 아이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제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고, 그들은 끊임없이 제 사랑의 힘을 증명해 줍니다.

사랑이랑 큰 이름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지만, 이 책에는 제 얕은 사랑으로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커 가는 아이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제 삶을 힘겨워하고, 도 때로는 방황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우리교육.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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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과 거미줄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풀잎이 되고 싶다

흔하디흔한 빗방울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게 하는

 

나는 눈부시지 않아도

너를 눈부시게 하고

나는 반짝이지 않아도

너를 반짝이게 해 주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거미줄이 되고 싶다

어두운 풀숲 그늘 속에도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해주는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7쪽, 우리교육,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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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다가 아이들이 생각나서, 이런 생각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반 전체 멜을 보냈다. 짧은 편지와 함께..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안준철의 교육에세이
안준철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드뎌 안준철 선생님의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차안에서 우선 '서문'을 읽었다. 아~ 역시!!  '아이들보다 내 꿈이 더 커지지 않길' 바라시는 선생님.. 감동이다. 이 책은 보나마나 뻔하다. 내게 끝없는 '돌아봄'을 요구할 것이다. 맘은 다소 힘이 들겠지. 빙그레 웃음도 잦겠지만 또한 눈물도 그만큼... 그래도 분명 행복할 것이다. 이런 생각도 잠깐 스칠 것이다. '이런 분과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면 어떨까?', '서툴고 못 미쳐도 나는 나의 자리를 지켜야겠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감히! 책장을 다급하게 넘기질 못하고 있다.

   아침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 또 사고-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를 쳤을 것이다. 학교의 아침은 늘 바쁘다. 오늘 조례시간에 아이들이랑 가을 노래 한 곡 들어야지, 너희를 사랑한다 말해줘야지... 하면서도 늘 이것 가지고 왔냐? 저것 가지고 왔냐? 추석 전에 대대적인 두발 단속 있단다. 그전에 알아서들 하거라. 등등.. 옷만 갈아입지 않는다면 매일 그날이 그날 같다.

   **이 어버님께 전화를 받았다. **이... 개학하고 절반이 결석이다. 약하고 빼빼 마른 녀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아버님도 심한 당뇨로 여름방학에는 입원까지 하셨단다. **이네는 부녀가 서로 보살펴주어야 한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서 엄마가 안 계시다. 오늘도 **이는 못 온다. 지난 번 아픈 것이 아직도 덜 나아서 오늘 큰 병원에 정밀검사 받아보러 간단다. 아이가 아프다는데 나는 이젠 진심으로 걱정이 안 되는 것 같다. 의례히 알겠노라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5교시, 힘든 5반 수업을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샘~ 누구 왔는데요~"한다. 돌아보니 뒷문에 00이와 ##이가 서있다. 00이 눈이 발갛다. 왜? "샘, 담배 피다 걸렸는데요." " 뭐? ##이도?" "네" 반성문에 담임 싸인란이 있다. 점심시간에 10반 @@이랑 우리 반 두 녀석이 중간고사 치고 다 가버린 3학년화장실에 가서 어제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폈단다. 이상하게 마음은 담담했다. 그러나 표정은 삭막했을 것이다. 그냥 반성문 한번 씨익 읽어보고 싸인해주고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보냈다.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오니 교무실 앞에 두 녀석이 벌서고 있다. 학생부에서는 딸아이들이 담배를 핀다고, 남녀평등시대이니 여학생들도 피워야한다는 애매한? 소리가 들려왔다. 담임에게 알리지도 않고 학생부 차원에서 벌써 학부모 호출. 야단은 쳐야하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하기 보다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써야지. 그리고 쿨~하게 보내줘야지. 어차피 내일부터 학교봉사로 벌 받을 아이들... . 6교시 후, ##이를 불러 짧은 잔소리하고 편지를 쥐어 보냈다. 7교시 보충 수업 후, 00이도 불렀다.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깊은 이야기는 못하고 또 편지를 주어 보냈다.

  어제 ㅁㅁ이가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이가 'ㅁㅁ이 어머님께 무슨 일이 있어서 가봐야한다면서 갔어요. 선생님께 전화한데요.'전해주었다. 알겠노라 했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두둔하는 %%이도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버린 ㅁㅁ이도 못 미더워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ㅁㅁ아 내려오너라 했다. 종일 ㅁㅁ이는 내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7교시 보충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인적이 뜸해졌을 즈음 ㅁㅁ이가 왔다. "ㅁㅁ아 어젠 왜 갔노? 느들 사정 말하면 내가 다 보내주잖아? 어제는 더구나 내가 야자 감독이었고. 근데 왜 말도 없이 갔노? 지난 금요일도 아무 말없이 가고. 그래서 토요일 니가 뭐랬노?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죄송해요 샘... 근데 앞으로도... 일이 좀 있어서... 최대한 열심히 하겠지만..가끔 가다 한번씩 빠질 것 같아요..." "왜? 이유를 말해야 보내주지" "......." "무슨 요일 빠질건데?" "그게 아니고요 샘, 엄마가 방학 때 대장암 수술을 하셨어요......" "뭐라고!! 진작 말하지. 아이들은, %%이도 모르나?" 울먹울먹 하더니 그예 눈물보가 터져버렸다. 손을 잡아 주었다. "예,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요. .. 지금은 괜찮으신데 엄마한테 연락 오면... 보살펴 드릴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내가 큰 실수 할 뻔 했다.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필요한 일 있으면 꼭 말해줘.. 몰랐으면 내가 니한테 큰 죄책감 느낄 짓을 할뻔했다... 괜찮으시제, 지금은?" "네.. " "그래 알겠다. 올라가봐라"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다시 책을 펴들었다. 조금 읽다가 덮고 하루를, 나를 돌아보았다. 아슬아슬하게 겨우겨우 넘긴 하루... 여전히 나는 아이들에게 속을까봐 두려워하며, 상처를 감수하고 온 마음으로 믿기보다 의심하는 한 자락을 남겨둔다.  '사랑한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말을 하면서도 저 아래 깊은 속마음을 뒤져보면 항상 나의 입장, 나의 체면이 매사에 개입한다.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타고난 심성이라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내 꿈이 아이들 보다 더 커지지 않는'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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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9-08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해콩선생님!! 제 불찰로 그 때 안준철 선생님을 뵙지 못했어요. 제가 워낙 수줍음도 많고, 그렇잖습니까? 근데 이번 방학에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그게!(다시, 기회가 있을까요?) 다른 선생님들도 이 책 읽으시면 좋겠는데요. 독토모임가서 추천 좀 해 주세요. 독토 자료는 좀 그렇지만, 선생님들께는 강추~!

2004-09-08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4-09-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계 선생님이신가봐요. 파행적인 교육과정 운영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어떤 곳에 피어 있더라도 우리 아이들은 한 송이 꽃이 아닐까 합니다. 그 꽃송이들이 내 발에 짓이겨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 몫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주변의 이들이 그 풀꽃들을 밟지 않도록 주의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제도라는 이름의 발길이 풀을 짓누를 때, 풀은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힘을 저는 믿는답니다. ^^ 만나서 반가워요.

해콩 2004-09-1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쉰이 얘기했듯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한사람 두사람 지나면서 그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자연히 '희망'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저는 그 풀싹까지 잘라버리는 장면을 보곤 합니다. 이듬해가 되면 그렇게 잘려나간 풀들 다시 자라나 초원을 뒤덮을 수도있겠지만, 그것이 교사인 저의 희망이지만, 그럼에도 학교에서의 '오늘'이 너무 암담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제도 안에 있는 저 역시 나도 모르게 풀싹을 잘라버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되거나 그렇게 '강요'당할 때 좌절합니다. 역부족일 경우가 너무 많아서...그래서 글샘님 만나니 반갑습니다. 여럿이 함께 희망을 얘기할 때, 그 길은 더 넓어지고 탄탄해지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