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읽은 후유증이야. 이런 책 읽으면 꼭 오바한단 말이야" 너무 버거워서 내가 대뜸 뱉아낸 말이다.

어제.. 학교에 와서 컴을 켜자마자 뚱땅뚱땅 나는 또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야자자유권! 우리반은 유난히 미술, 음악을 하는 아이가 많다. 인문계에서는 특이하다 할 만큼 미용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둘이 있고 요리학원에 다니는 아니도 있다. 2학기 들어 몇달 후면 3학년이 되는 아이들이 그나마 공부를 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충은 대부분 하는 쪽으로, 야자는 선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긴 내가 뭐라 말 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거라고 맘먹고 있었다. 별다른 설득 작업 없이도 보충은 3명 빼고는 다 하겠다고 했고...  대신 야자는 미술, 음악, 미용 등 학원에 가는 아이들은 빼주기로 해서 11명이 야자를 아예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일별로 사정이 있는 6명도 가능한 날만 하기로 했다.  거기다 날마다 아파서 병원가야한다는 아이, 급한 사정 있다는 아이.. 등 다 빼주면 우리 반은 제일 적을 때는 20명 정도, 많을 때도 26명 정도가 교실에 남아있다. 나랑 몇분간 신경전을 벌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이가 '승리'하고 집으로 가는 쾌감을 맛본다.  나는 늘 "이번이 마지막... 다음 번엔..."운운하며 아이들을 다 보내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탈출' 하고 싶어했다. 말 못할 사정일 때, 말 안하고 싶은 사정일 때, 담임이랑 그 몇분조차도 씨루기 싫을 때 아이들은 그냥 가버렸다. 거짓말 하고 가는 것보다 이것이 나은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음날 야자감독 일지에 남겨진 불참 아이들의 이름이 나를 난감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어쩌지? 규칙은 규칙인데... 이러다가 정말 우리 반 공부 안하는 분위기가 박혀버리면?" 인문계 담임으로서 여러 가지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야자자유권이다.

1. 우리 반 모두 지킨다고 약속할 것.

2. 하루에 2명 이상은 안됨. (너희들이 서로 의논해서 날짜를 조정해올 것)

3. 그 달 사용하지 않은 야자자유권은 매달 말일  500원 상당 매점상품권으로 교환해줌.

4. 양도, 대여할 수 없으며 적발시에는 야자자유권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

'이 규칙들을 반 아이들 모두가 지키면 한달에 하루, 이유를 전혀 묻지 않고 특별히 자유시간을 주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대안이었다.

좋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예쁜 종이에 출력하고 조심조심 잘라서 교실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래? 말래?" 종례시간.. 너무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저희들이 손해볼 일은 아니니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이 규칙들 꼭 지킬거지?" 좋아하는 아이, 어리둥절해하는 아이, 뭔가 불안해보이고 불만스러워하는 아이.. 아주 짧은 시간에 아이들의 얼굴을 스쳤는데 나의 예상과는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녀석들... 이유가 뭘까?

설명을 끝내고 교무실을 나오는데 아이들이 또 달라붙었다. '응, ㅁ정이는 안과, 미@이는 치과... 뭐라고 ㅇ늘이도? 아&이는 생리통?' 난감했다. 지금 막 나눠줬는데 오늘 쓰겠다는 녀석만 네 명이다.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다 아픈 건데 뭐~ ㅁ정이와 미@이는 보충까지 빠져야한다고 했다. 마치고 가면 병원이 문을 닫는다고, 예약해뒀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아~ 나는 또 즉흥적인 감상으로 사고를 쳤나보다. 미덥지 못하게 쳐다보던 범생이들의 눈빛이 무얼 말하는 건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막 교실을 빠져나오는데 마침 우리반 보충이신지 부장선생님께서 앞문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보충 빠진다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북적거리는 그 장면을 그대로 다 들켜버리고 말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보충을 빠지겠다고 샘들을 찾아가 매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민망했다.

교무실로 돌아오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EBS 감독 문제로 신경이 서있는 상태인데 아이들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고 맨날 이 모양이다. 역시 내가 또 실수한건가? 옆에 앉은 현옥샘한테 사정을 이야기하며 계속 투덜거렸다. "그 책을 읽은 후유증이야. 이런 책 읽으면 꼭 오바한단 말이야" 요즘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읽고 있다.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자기자리로 아올 때까지 한결같이 기다려주는 선생님.. 감동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비슷하게라도 따라가고 싶었나 보다. 그러면서 이렇게 또 금방 후회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야자자유권'이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족쇄나 되지는 않을지... 스스로를 잘 다듬는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고 눈치보고..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나 않은지.. 나의 과욕은 아닌지... 불안하고 후회스러웠다.

오늘 아침, 어제 야자일지를 확인했더니 그렇게 보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명이 또 도망을 갔다. 지난 토요일 야단맞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한 녀석들이다. 역시 내가 잘못한 건가?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해야할까? 가슴이 갑갑했다. 섭섭하고 속상했다. 조치를 취해야한다. 조례시간에...

"눈을 감아보세요.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 여러분에게 '야자자유권'을 만들어 준건 자기 스스로 자신을 계획하고 조절해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수요일 수업시간에 얘기했듯이 중고등학교까지 스스로 통제하는 연습을 한 번도 해본적 없이 대학 갔을 때 느낀 허무와 공허가 얼마나 큰 지 알기때문에 여러분에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짐승입니까? 여기가 감옥입니까? 제가 늘 여러분을 협박하고 때리고 통제하고 그렇게 하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제가 늘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통제하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습니까? 이제 3학년인데 공부하는 연습, 해야하지 않습니까? 하늘은 노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집중하는 것도 연습해야되는 겁니다. 3학년이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되겠습니까? 그리고 평소에 늘 '야자' 성실하게 하는 아이들.. 여러분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맨날 도망간다고 야단만 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 칭찬도 하고... 그럴려고 어제 그거 만들어준 겁니다. 근데.. 내가 너무 아픕니다... 여러분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나에게 희망을 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노력하는 모습, 그게 제게 힘을 줍니다. 하루아침에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는 모습, 그래서 나아지는 모습.. 그게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픕니다... 오늘.. 제게 내려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무실로 와주세요."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1교시 후, 덕*가 내려왔다. "샘, 죄송해요. 다시는 다시는 안그럴께요." 빙그레 웃으며 "아플 때는 가야지." "안 아플께요." "그래 덕*야 올라가봐."

3교시 후, ㅁ혜, 현ㅇ, 지@이도 내려왔다. 녀석들은 덕*와는 달리 상습범이라 장황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느들 야자 안할래?" "아니요" "그럼 느들 필요할 때 할 수 밖에 없는데.. 느들이 그렇게 하는 거 일단 나한테는 부담이 된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분위기에 영향을 주겠제? 그럼, 느들만 편하고 나도, 아이들도 다 불편해지지? 그건 안되겠다. 그럼 어떡해야할까?" "우리가 열심히 해야돼요" "그래 그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자꾸 이런식이면 우짜노? 느그가 스스로 샘한테 와준 거 참 고맙다. 안 내려올 수도 있었을건데.. 그래 우짜면 좋겠노? 지금 말로 하기는 좀 그렇제? 그럼 올라가서 글로 함 써봐라. 다른 방법이 있으면 쓰고 느들 생각을 함 써봐라. 느들 가장 큰 장점은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거, 샘이 아니까 그렇게 함 써와봐라. 그런데 가끔 표현하는 방법이 나한테 상처가 되기도 한다. 느그 40명인데.. 느들 나는 다 받아들이는데.. 느들도 그냥 이런 나를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나?  .... 그래 일단 올라가라. 내려와줘서 고맙다." 횡설수설... 평소에 섭섭했던 부분까지 살짝 살짝 내비치며 내 얘기를 하고 아이들을 올려보냈다.

종례시간에 현ㅇ와 ㅁ혜가 쪽지를 내밀었다. 은ㅁ는 짧게 현ㅇ이는 길게....잘못했다고,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안빠지려고 생각중이지만 자기가 어떻게 바뀔지, 어떤 사정이 생길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겠다고...

이렇게 '야자자유권'은 나의 뒷통수를 쳤다.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있고 아이들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건 이런 장면 때문이다. 그리고 스친 생각 하나 더, 아이들이랑 나랑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 그것이 진짜 문제 아닐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담임이라해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잘 없다. 서로에 대해 알아볼, 알려줄 시간이 없다. 메일로 생각을 주고받기에도 아이들이 너무 많고... 좋은 방법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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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9-1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200

이야~ 방문객수 200번째네요.


느티나무 2004-09-1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윤제림시인의 시집(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한 편입니다.

함께 젖다 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이 아닌 것들과.

해콩 2004-09-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번째도, 200번째도 샘이! 오늘도 저희 업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놀러오세요. 남겨주신 시도 너무 감사.. 오늘 저도 '함께 젖'었어요. 너무 늦어서 절집에는 못들어갔지만 내원사 계곡에 떨어지는 가는 물방울과, 아스라이 보이는 산과, 들녁에 고개숙인 나락들과, 탁주잔 기울이던 샘들과... 일상들과 일상아닌 것들과.. 흠뻑 젖었지요. 함께. 가을비가 꽤 내리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