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안디잔과 광주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시청을 지키고 있는 정부군 탱크(위)와 1980년 광주에 진출한 국군 탱크(아래).
시위대에 대한 정부군의 발포로 11일 발발 이후 500명 이상의 시민이 사살된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사태는 25년전 600여명(5·18민주유공자유족회 2005년 통계자료)이 사망한 우리의 광주를 떠올리게 해 씁쓸하다.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1980년 5월18일 신군부가 평화시위를 벌이던 광주 학생·시민들을 유혈진압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 나아가 6월항쟁 등 군사독재에 대한 시민의 총체적 저항을 촉발시킨 것처럼, 범죄단체 구성 혐의로 23명의 이 지역 무슬림 사업가들을 구속하면서 인권탄압과 폭정,경제난에 대한 시민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두 정권은 사태의 원인을 일부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몰아붙이는 것에서도 닮았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광주항쟁을 이지역 야당인사의 ‘내란음모사건’으로 몰아간 것처럼 카리모프 대통령은 사태의 배후세력으로 ‘이슬람 급진세력’을 언급했다.

타 지역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소요 지역을 봉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유혈 진압작전을 펴는 것도 섬뜩할 정도로 똑같다. 우즈벡 당국은 사건 발생 직후 자국 언론사는 물론이고 CNN, BBC 등 외국 유수 방송사들의 현장 촬영과 송출을 금지했다. 우즈벡 외무부는 14일 가장 호의적인 러시아 언론에 대해서도 취재를 하기 위해선 수도 타슈켄트에서 임시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 발생 후 이 지역 소식을 전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차단했으며 이후 허가된 보도도 계엄사령부의 보도지침에 따라 시민·학생들을 “폭도” “불순분자” 등 철저히 왜곡되거나 날조된 내용만을 내보내게 했다.

안디잔 사태와 광주 항쟁의 빼놓을 수 없는 유사점은 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 혹은 의도적 묵인이다. 미국은 80년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 목적이 아닌 광주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보내도 되겠느냐”는 신군부의 문의를 동의했으며,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는 등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천명한 ‘자유와 민주주의’나 시민 보호보다 자국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미국의 태도는 우즈벡 사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군에 2곳의 공군기지를 제공하는 등 친미적인 카리모프 대통령이 퇴진하는 것을 원치않는다. ‘소요’가 성공해 급진적인 이슬람 정권이라도 들어선다면 지금껏 공들여온 ‘독립국가연합(CIS)의 반러시아’ 대오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인근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등 인근 이슬람국가로 ‘신정 이슬람정권’ 도미노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백악관은 15일 논평을 통해 “우즈벡 국민이 좀 더 대표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원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러한 것은 평화적 수단에서 나와야 하지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다”며 외면했다.

열흘간의 투쟁으로 한국 민주화의 성지로 다시 살아난 광주처럼, 비극의 현장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잔이 민주화의 성지로 거듭날 지 주목된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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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묘비가 필요없다

 

나에게는 묘비가 필요없다. 그러나!

만약에 나의 묘비가 당신들에게 필요하다면

거기에 이렇게 써주기 바란다.

"그는 많은 제안을 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 들였다."

이러한 묘비명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1956

 

* 브레히트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아무런 공식행사 없이, 그의 서재에서 내다보이던 도로테 공동묘지에 묻혔음. 마리안네 케스팅의 [브레히트 평전]에 의하면 그의 묘비에는 성명만 새겨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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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아침 일찍 잠이 깨어

지빠귀의 노래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만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들려 올 지빠귀의 온갖 노래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56

* 1956년 5월 독감으로 베를린 자선병원에 입원. 같은 해 8월에 사망.

 

베르톨트 브레이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옮김, 한마당, 1990,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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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떻게 우리기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어떻게 우리기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띄는데?

아,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그 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 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던가?

 

1954/55년

 

베르톨트 브레이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옮김, 한마당, 1990,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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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0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의 어느 한 꼭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 시이다.. 독어샘께서는 브레히트가 죽음에 직면했을 즈음.. 한 송이 장미꽃조차 눈에 새롭게 다가왔다.. 라고 평하시지만 내 생각은... 장미 한 송이를 피워내는 경이로움, 평범한 삶의 경이로움.. 쯤이 아닐까.. 출발한 적도 없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런 평범하고 위대한 삶!!..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1944

 

베르톨트 브레이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옮김, 한마당, 1990,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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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5-06-0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 나도 가지고 있는데, 아마 이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을 묵묵히 견디고 있을테지요? 샘 같은 사람이라도 빠졌으니 다행입니다. ^^

해콩 2005-06-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묵묵히 견딘다.. 좋은 표현이에요. 나도 나를 묵묵히 좀 견뎌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샘(나) 같은 사람? 어떤 사람? 당연히 칭찬이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