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느티나무 > ‘교육의 얼굴을 한 시장’ 원하는가?

  학교 위에 국가가, 국가 위에 시장이 있으니 학교는 국가정책보다 시장의 이윤 여부에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해진다. 교사도 학생도 학교도 상시 구조조정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마당에 ‘지속가능한 교육’이 발붙일 여지가 어디 있는가.

  교육부가 교사 성과급을 굳이 차등해서 지급하겠다는 건 긴 서사의 서장이다. 그 끝은 ‘교육의 소멸’이다. 왜 그런가?

  교사의 성과를 계량화하기 위해 현재는 수업시수, 담임, 보직, 수상경력 등이 나열돼 있지만 이는 ‘미끼’일 따름이다. 곧 시행된다는 교사평가는 교장, 교감, 동료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하도록 돼 있는데 이 역시 문제가 많아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차피 교사에 대한 ‘평가’로 성과급을 ‘차등’해야겠다면 저항이 덜한 숫자로 기준을 삼을 수밖에 없다. 가장 분명한 숫자는 학생들의 학업성적이다. 즉 이 모든 혼란은 결국 ‘학교별 학생성적 평균’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이후는 뻔한 수순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미 학교를 시장화한 미국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부임하자마자 ‘낙오학생방지법’(No Child Left Behind)을 시행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쉼없이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목표한 학업 수준에 이르지 못한 학교는 교장·교사 해임, 학생들이 사립학교로 옮길 수 있도록 학비지급(바우처 제도), 자율경영의 차터스쿨 전환, 아예 사기업이 학교를 맡는 위탁경영 등 ‘시장화 구조조정’을 겪게 된다. 해당 학교는 망하고 교사는 학교를 떠난다. 낙오학생방지법이 시행된 후인 2003년, 5년차 교사의 46%가 학교를 떠났다. ‘퇴출’이라기보다 ‘이직’에 가깝다. 교직은 ‘더 나은 연봉’을 잡기까지의 비정규직, 혹은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추락한다. 그래도 시장주의자 눈에는 46%의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니 성공으로 보인다.

  더 중요한 건 다음이다. 학생들 학업성취를 측정하기 위해 객관적인 평가 기관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걸 민간에 맡긴다. 낙오학생방지법 때문에 미국 각 주는 6년 계약에 19억달러(객관식 유형)에서 많게는 53억달러(에세이나 자유주제 글쓰기)의 돈을 써야 한다. 간접비용까지 합하면 액수는 천문학적으로 불어난다. 초국적 거대기업들이 이 ‘엄청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학력평가업체를 차렸다. ‘하코트 교육평가’, ‘시티비(CTB) 맥그로 힐’, ‘리버사이드 출판사’ 등 3~5개 업체가 학력평가시험 시장의 메이저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 중 맥그로 힐이 부시 대통령 가족과 3대에 걸친 친분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2002월 1월 〈네이션〉 보도). 그렇다면 이는 ‘시장→로비→정책’으로 이어지는 시장국가 미국의 전형적 모습이기도 한 셈이다. 가히 ‘교육의 얼굴을 한 시장’이라 할 만하다.

  이쯤이면 한-미 자유무역협정 2차 협상에서 웬디 커틀러 미국 쪽 대표가 “교육평가 시스템에 관심이 있다”고 한 말이 새삼 생생하게 들리지 않는가? 국경의 문턱을 없애면 이들 평가업체가 물밀듯 몰려들 것이다. 학교 위에 국가가, 국가 위에 시장이 있으니 학교는 국가정책보다 시장의 이윤 여부에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해진다. 기업들이 학생과 교사와 학교 평가의 전권을 가지고 우리 교육을 쥐락펴락하게 되는 것이다. 교사도 학생도 학교도 상시 구조조정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마당에 ‘지속가능한 교육’이 발붙일 여지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은 자연스레 소멸한다. 이것이 ‘교사 성과급 차등지급’으로 비롯되는 서사의 종막이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원하고 있는가?

  경쟁, 효율, 평가, 구조조정으로 순환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시스템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것은 약인 동시에 독인 파르마콘(pharmakon)이며 ‘비시장 시스템’인 학교에서는 단연코 독으로 작용한다. 학교는 무엇인가? 경쟁하는 곳인가, 협력하는 곳인가. 계층분리하는 곳인가, 계층화합하는 곳인가. 완벽하게 승리하는 곳인가, 실패를 통해 성숙하는 곳인가. 먼저 이런 기본들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진짜 교육 경쟁력이라 본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할 것을 정부에 촉구한다.

이석범 /소설가·서울 신원중 교사

 

한겨레신문, 2006년 8월 10일, [왜냐면]에서 가져왔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諸子思想 과제]

諸子百家 사상의 교육적 의미가 구체적인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어떤 식으로 응용,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 정리하시오.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墨家思想的 側面


  墨子는 철저하게 피치자의 입장에서 기층 민중의 시각으로 세상의 문제점을 짚어나갔으며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세상이 불화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음’에 기인한다고 보아 兼愛야 말로 세상의 부조리를 일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유가의 영향을 받았지만 유가의 ‘차별적 사랑’을 부정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이상적인 사랑을 실천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까닭은 현실 사회의 상황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데 큰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墨家가 소수 무사집단에 한정되고 오래지 않아 소멸된 역사적 사실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 힘들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간혹 너무나 헌신적인 교사를 만날 기회가 있다. 항상 아이들의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함은 물론이고 그들의 불편을 줄여주고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다. 같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런 교사를 만나고 옆에서 아이들에 대한 그 마음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사들의 단점은 교사 본인이 지치기 쉽다는 것이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두 해에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백년을 기약해야하는 큰 도모이므로 교사가 오래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을 다칠까 노심초사하며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나가다 보면 교사의 심리적․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희생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교사의 善意를 무시하거나 이용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자기희생적인 교사의 정신적인 타격은 아이들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교사들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더 유념해야할 것은 ‘교사의 무조건적인 봉사와 희생이 과연 아이들에게 교육적이기만 한가’하는 점이다. 아이들은 곤란과 궁핍, 갈등과 다툼 등 어려움 속에서도 배운다. 주어진 문제 상황을 판단하고 선택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며 스스로 삶의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는 뜻이다. 세심한 것까지 하나하나 배려하는 교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아이들에게서 실패를 통해 배우는, 아주 소중한 기회를 박탈하기 쉽다.

  더욱이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교사 자신만의 희생과 봉사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개인 신상에 관계된 일이나 비교육적인 일이 아니라면 아이들에게도 공동의 짐은 나누어지도록 해야 한다.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몫을 책임감 있게 해나가는 것과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를 챙기는 것은 그들의 장래를 내다볼 때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교육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아이들과 의논해야한다는 것이다.

  교사의 차별 없는 사랑 아래에서 공동체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법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배워나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육의 실천이 될 것이다.

 

 

道家思想的 側面


  일체의 인위를 부정하여 그것이 가지는 허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인간 중심적인 잣대로 사물의 가치를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여 세상 모든 존재는 인간중심의 편협한 가치판단을 떠날 때 비로소 함께 평등한 존재가 된다는 ‘萬物齊同’의 원리 역설한 것이 도가이다. 그들은 사물이 가지는 다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며 인간 사고의 편벽됨을 지적, 겸허하게 우주의 커다란 원리인 자연의 道로 회귀할 것을 역설하였다.

  동일한 가치를 상정해두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이 그것의 획득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앞을 다투는 우리 사회의 교육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뒤집어 생각해볼 줄 알며 다양성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도가적 관점의 수용은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사의 교육관이나 학생관에 있어서도 도가적 측면으로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 넣는 기능을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불량품을 가려내고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제품만을 생산하고자 하는 공장의 기능을 연상시킨다. 우리 교육의 목적인‘弘益人間’이 무색해질 만큼 비인간적이며 강압적인 방법이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일도 잦다. 근대이후 발생한 ‘학교’의 성격 자체가 다음세대의 사회화를 위해 인류문화를 효율적 전달한다는 목적에 맞추어 성립된 것이므로 그 출발에서부터 인위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성정을 인정하는 도가의 無爲自然的 관점에 어긋난다 하겠다.

  수업이란 교과서나 참고서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행위일 뿐인가? 교과서의 내용은 정말로 불변의 진리인가? 사유하는 방법을 교육해야하는가, 사유의 결과물인 지식을 전달해야하는가? 공부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성적이나 등수는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현재의 삶을 저당 잡혀야 하는 교육은 바람직한 것인가? 어떤 학생이 모범학생이며 또 어떤 학생이 문제학생인가? 등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육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 대해 도가적 입장에서 답을 고민해 본다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문제는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적을 챙겨보고 그 방법을 반성해야한다. 아이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하며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의 가치로움을 일깨워주는 교육이 절실하며, 인간 자신도 커다란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물질적 대상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화하여 살아가야한다는 아주 소박한 진리도 교육의 일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경]을 교육적 관점에서 풀이한 파멜라 메츠의『배움의 도』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교사가 일을 다 마쳤을 때 학생들은 말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해냈어.”

‘교육’의 근본적 의미를 반성하는 일과 함께 道家思想的 側面에서 바라본 우리들 교사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荀子思想的 側面


  荀子의 ‘性惡說’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타고난 욕망은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惡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이를 예방하거나 교정하는 수단으로 ‘禮의 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한 僞란 사고력과 판단력을 길러 禮를 실천하게 하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단순히 노자의 無爲나 맹자의 性善說과 배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인간이 타고난 性은 그 자체로 善과 惡을 규정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사고하느냐에 따라 性善에 주목하거나 性惡을 주장한, 논리 전개상의 차이일 뿐이다. 노자의 無爲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

  ‘교육’을 인간의 성장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순자의 이론은 현대 학교 교육의 관점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순자가 말한 ‘禮’를 추구하는 것인지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한다. 사실 현대 학교교육은 欲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인격을 함양한다는 목적을 지향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개인적 욕심을 가능한 한 높은 수준으로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고백해야한다. 이는 荀子的 관점에서 볼 때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라 할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현실 교육을 비판․반성하고 공동체의 조화를 위한 교육, 스스로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교육의 본질을 회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法家思想的 側面


  중앙집권적 국가지상주의를 표방하는 法家는 강력한 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儒家에서 중시한 仁과 義에 의한 이상적 사회건설을 비현실적이라 비판하였으며, 堯舜의 정치철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상정하여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가의 논리에 부합하여 세워진 秦나라는 創業 15년 만에 무너져 守成에 실패하였다. 이것은 法家의 논리적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학교교육 현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교칙’이다. 엄격한 ‘교칙’은 교사들에게는 아이들을 지도할 확실한 명분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게는 교사의 지도에 무조건 순응해야하는 굴레가 된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교칙이 있어서 학교생활이 더욱 편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된 적 없는 교칙에 의해 두발, 복장, 심지어 양말색깔에 머리핀 종류까지 규정받는 현실을 숨막혀한다.

  작년 두발자율을 주장하는 아이들의 요구가 수용되어 각급 학교에 아이들의 두발을 가급적 ‘자율화’ 하라는 권고공문이 전해졌다. 교칙을 정할 때 아이들의 의사를 반영하라는 내용 또한 여기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난 지금, 교육청에 보고된 회신공문과는 달리 학교 안에서 바라보는 학교의 모습은 여전하다. ‘여전히’ 교칙을 결정할 때, 아이들의 의사가 수렴되는 과정은 생략되기 쉽고 두발을 포함하여 복장과 행동 하나하나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학생다움’이라는 기준에 의해 규제 당한다.

  학급에서 지켜야할 규칙을 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강력할수록 학생들의 생활지도가 편하다고 여겨지며 이렇게 교칙이나 학급규칙이 엄격한 학교, 학급일수록 ‘모범적’이라고 표현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막강한 교칙을 가지고 있는 학교는 규율이 엄격한 일사분란한 학교로 인식되어,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단정하고 모범적이라고 -혹은 모범적일 것이라고-여겨진다. 이는 또한 성적에도 영향을 준다고 인식되어 공부 잘 하는 학교로 소문나기도 한다. ‘외모 등에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하는 착한(?)학생들이 성적도 좋아 일류대 합격률이 높다’는 명제는 ‘엄격한 교칙을 적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교칙이나 학급규칙을 정하고, 여기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가는 것은 이젠 역부족이기도 하지만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아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이미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할 때, 그러한 방법이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교육적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생활지도 방법이며 장기적으로 그 효과가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일정한 규칙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다. 그러나 秦의 예에서 보았듯이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강력한 법은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최소한 인간관계를 악화하기 쉽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강력한 법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불신한다는 전제하에 시행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성과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해야 하는 ‘교육적’ 공간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강압적인 규율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인간을 불신하게 하는 방법 보다는 인간성을 길러주는 교육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믿고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儒家思想的 側面


  儒家 학설의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상정한다는 데 있다. 孔子가 강조한 ‘仁’과 ‘禮’, 孟子의 ‘良知’, ‘良能’, ‘浩然之氣’ 등은 인간의 선험적 도덕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도덕의 실천은 늘 주체적인 것이며 그러한 인간은 누구든지 존엄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儒學은 이렇게 주체적인 방법으로 자신과 타인을 다스려 가는 원리, 즉 윤리적 규범인 동시에 정치와 교육의 원리이다. 자신이 도덕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그것을 주체적인 판단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이끌어 내는 것이 ‘교육’이며 ‘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모습에 근접하려면 儒家的 理論을 따라야 할 것이다. 儒家에서 말한 교육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덕의 주체적 실천자로서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易地思之와,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推己及人의 정신을 내면화하여야 할 것이다. 禮로서 자신을 조절하는 것이나 詩나 樂의 공부도 인격완성을 위한 교육내용으로 유가적 교육에 포함된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그 목적이나 내용, 방법적인 면에서 근본을 망각한 교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으면 서슴없이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대부분의 학부모나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은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목적부터 어긋났으니 그 내용이나 방법 또한 바로서기를 바랄 수 없다. 진리탐구가 되어야하는 교육의 내용은 물질과 지위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니 교육방법 역시 단순 암기나 주입에 그치기 마련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이 필수적인 孔子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같은 교육방법은 아이들은 너무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며 전해주어야 하는 내용은 쌓여있는 오늘날 현실에 있어서는 거의 실천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에 비인간적인 생활지도가 개입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이다.

  儒家的 敎育의 실천이 어려운 오늘날 학교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참된‘교육’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아닐까 한다. 십 년도 안 되는 짧은 경험이지만 교사로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교육적’ 방법은 ‘학생을 신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신규로 4년간 근무했던 실업계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경계 대상으로 간주하기 바빴다. 상처를 주는 대상으로 서로를 바라보니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생겨 더욱 냉담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너무 쉽게 거짓을 말했고 학교 규칙은 그들에게 有名無實한 덕목이었다. 그들에게 수업이나 공부는 이미 필수사항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펴보니 이런 아이들은 살아오면서 어른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너무 컸다. 정서가 불안하거나 어른을 무조건 적대시 하는 아이들일수록 이런 저런 결손가정의 아이들이었으며, 그들이 받은 상처와 그들이 내뿜는 폭력성은 비례했다. 당연히 학교성적도 그들의 정서적 안정정도에 비례했다. 처음엔 잔소리도 하고 벌도 주고 때려보기도 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어온 아이들은 그 폭력에 너무 쉽게 순응하여 교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폭력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 교사를 난처하게 했다.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대화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천천히 조금씩 마음을 열어왔다.

  사실 아이들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는다. 대화로 해결하려는 동안에도 지각과 결석과 사고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최소한 ‘거짓’을 말하는 횟수는 줄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늘어났다. 무엇보다 상대를 서로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것,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물론 끝까지 믿음을 져버리는 아이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 아이에게 주어진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인 환경 때문이며 어른들의 잘못이므로 누가되든 어른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육의 방법은 대화와 믿음이어야 하고 궁극적 목적은 ‘이해’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그 아이들을 보며 깨달았다. 자신을 이해하는 마음을 넓혀 타인을 이해하며 나아가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는 것, 비단 아이들에게만 주어진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과의 대화, 자신에 대한 긍정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믿고 타인과 대화해야하는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삶을 숙명적으로 타고난 ‘인간’이어야 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할 때, 끝까지 믿고 지켜봐주는 일 외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6-08-15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法家思想的 側面과 儒家思想的 側面에서의 교육 방법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교칙이나 학급규칙을 정하고 이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가는 것은 法家的인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기에 엄격한 교칙을 적용하기에도 쉽지 않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수의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할 때는 그러한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장기적, 교육적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생활지도 방법이다. 물론 일정한 규칙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다. 그러나 秦나라의 예에서 보았듯이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강력한 법은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최소한 인간관계를 악화하기 쉽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강력한 법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불신한다는 전제하에 시행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성과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해야 하는 ‘교육적’ 공간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강압적인 규율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타인을 불신하게 하는 방법 보다는 인간성을 길러주는 교육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에 가장 근접한 것은 儒家的 理論을 따른 교육일 것이다. 儒家에서 말한 교육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덕의 주체적 실천자로서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易地思之와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推己及人의 정신을 내면화하여야 할 것이다. 禮로서 자신을 조절하고 詩나 樂의 공부도 인격완성을 위한 교육내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좋은 학벌은 좋은 직업으로 이어지고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미래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목적부터 어긋났으니 그 내용이나 방법 또한 바로서기를 바랄 수 없다. 진리탐구가 되어야하는 교육의 내용은 물질과 지위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니 교육방법 역시 단순 암기나 주입에 그치기 마련이다.
이렇듯 유가적 교육의 실천이 어려운 오늘날 학교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참된‘교육’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십 년도 안 되는 짧은 경험이지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적’ 방법은 ‘학생을 신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더디더라도 아이들을 믿고 대화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도덕적 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해쳐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산문강독 과제]

‘積善之家必有餘慶’라는 명제는 언제나 ‘참’인가? 즉 인간 사회에서 ‘積善’은 ‘餘慶’이라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가? 그렇다면 그 필연성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현실적으로 이 명제는 부분적으로만 참인 듯하다. 즉 積善이라는 원인과 餘慶이라는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積善의 결과로서 餘慶은 일종의 가능성만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이 둘은 반비례하는 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善을 많이 쌓은 집안의 후손들이 현실적으로 더 고단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러나 둘 사이의 인과관계와 그 필연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 명제 속에 포함된 ‘善’과 ‘慶’의 의미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積善’의 개념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른바 ‘善’이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하는 인류보편적인 ‘정의로움’이어야 한다. 그것은 孟子가 말했듯이 모든 인간이 생래적으로 타고난 양심에 의한 행위이며, 내 안의 善意志를 외물에 흔들림 없이 그대로 드러내 실천하는 것이다. 一身의 安危보다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奉公滅私의 행위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행위자 자신에게 그것은 ‘積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할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積善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餘慶이라는 대가를 결코 전제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적 고통과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라야 가능하다.


  인간 본연의 양심의 실현인 ‘善’은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것임에 반해 ‘慶’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리 정의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慶’은 주로 물질적인 부나 사회적인 지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적, 역사적 정의를 실천한 積善의 행위자가 파악하는 ‘慶’이란 세속적인 인간들이 바라보는 그것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積善之家’에 주어지는 ‘餘慶’이 필연적인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慶의 속성을 세속적인 잣대로 재단하여 물질적․권력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면 이 둘의 관계는 일종의 가능성만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慶’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경사인지 흉사인지는 積善을 실천한 사람과 그 후손이 판단할, 그들 자신의 몫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積善之家’에 ‘餘慶’을 내려주는 주체인 ‘天’의 입장에서 그 필연성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도덕성을 믿는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積善의 행위자와 그 후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 모두가 공유하는 도덕적 공감대가 있음을 최후까지 믿어야한다 뜻이다. ‘정의’의 실천에 대한 실천자 자신의 양심적 떳떳함과 그에 대한 후세의 올바른 평가 그 자체가 이미 자신과 그 후손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餘慶’의 실체가 아닐까? 굽힘없이 정의를 실천한 조상 때문에 지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는 후손이라도 조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존경이 주어진다면 결국은 조상의 積善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떳떳함을 깨닫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조상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과 후손으로서 느끼는 자랑스러움, 그것이야말로 세속적인 부나 지위 따위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넉넉한 ‘餘慶’이 아니겠는가? 積善의 실천자 그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에 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축복받은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스스로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후손에게 주어질 ‘餘慶’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한 성격일 것이다. 따라서 積善이라는 씨앗과 餘慶이라는 열매에 대한 필연성의 선언은 결국 積善을 실천한 사람과 그 후손에 대한, 그리고 정의를 반드시 정의로 평가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의 윤리성에 대한 ‘天’의 믿음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사람들과 그 후손은 미군정 아래 정권을 장악하여 지금까지도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휘두르며 정계․재계․학계의 요직을 점하고 있다. 반면 그 엄혹했던 시대에 一身의 安樂은 물론 가족들의 희생까지 감수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은 나라가 독립된 후에도 그 功을 보상받기는커녕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방치와 사람들의 무관심의 대상으로 여전히 그 비극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 ‘積善之家에 반드시 餘慶이 주어진다’는 言明은 이러한 상황을 직면할 때 무색해진다. 그러나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 그들이 끝내‘친일파 청산법’의 통과를 저지하는 등 안간힘을 써도 無所不爲의 행위에 대해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지난 역사에 대한 준엄한 평가는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명제가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작업임을 사마천은 『史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 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여 이 사회에 정의와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積善之家’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후대의 평가가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라 할 것이다. 積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그 고귀한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 사회적 존경과 경의를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餘慶’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절대자로 표상되는 ‘天’이 하는 일이며 그 ‘天’이란 바로 이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합의에 다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경전강독 과제]

규정 속도보다 다소 천천히 추월선으로 조심조심 가고 있던 여성 초보운전자의 소형차 앞에 맹렬 추월해온 대형 트럭이 끼어들더니 갑자기 속도를 줄여 위협을 가했다. 충돌 위험에서 겨우 벗어난 여성 운전자는 계속 운전을 못 할 만큼 위축된 마음상태로 갓길에 차를 세웠고, 그 사이 트럭기사는 유쾌한 듯 속도를 높여 달아나버린다. 초보운전자의 뒤에서 이러한 상황을 모두 지켜본 운전자, 즉 제3의 관찰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정리 비판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등을 풀어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자유롭게 제시하시오.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초보운전자와 트럭운전자에게 모두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초보운전자는 운전이 아직 미숙하므로 가급적 추월선을 이용하지 말아야했다. 추월선은 그야말로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차선이다. 운전이 아직 서툰 상태에서 추월선을 이용하게 되면 뒤따라오는 차량들의 무리한 추월을 유도하게 되고 사고의 위험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초보운전수에게도 바쁜 일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맘처럼 운전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규정 속도보다 천천히 추월선으로 운전한 것이 트럭운전수의 폭력적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트럭을 운전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삶의 조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택시나 버스, 트럭 등 운전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다. 또한 그들에게 매일같이 주어지는 강도 높은 노동과 그에 비해 낮은 수입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자본인 그들에게 ‘너그러운 양보’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상대방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동을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숙한 운전자에게 ‘트럭’은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공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갈등상황을 모두 목격한 뒤차 운전자가 이런 비판에 그친다면 이는 발전적인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양비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민해봐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익명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트럭운전수와 초보운전수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과연 저렇게 행동했을까? 그가 혹은 그녀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이었다면? 익명성이 보장되어있다면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불편에 대해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이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와 ‘나’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의식과 그에게 나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조건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염치가 없어지고 상대방에게 폭력적으로 행동한다. 전방위로 나를 드러내야하는 열린 공간이 줄어들고 서로에게 닫힌 개인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현대인들이 점점 서로를 소외시키고 상대방에게 무관심하며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커다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의 역사는 流轉한다. 위 사건은 사실 인류가 끊임없이 고민하며 해결방안을 찾아오던 크고 작은 갈등 상황의 구체적 일례에 불과하다. 미숙하고 여린 약자에게 ‘힘’을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지식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춘추전국시대는 그 혼란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지식인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던, 그야말로 ‘百家爭鳴’의 시대였다.

  한비자와 같은 法家的 입장에 선 지식인이라면 교통법규를 엄격히 적용하여 범칙금을 높이 책정한다든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다든가 하는 등의 외적․물리적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벌을 주고 감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힘’으로 파생된 문제를 더 큰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맹점을 지닌다. 눈앞의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해결되는 듯 보일 뿐 사실 그 안에 더 큰 문제들을 잉태하기 일쑤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신뢰하는 儒家的 입장이라면 각 개인에게 내재된 선한 의지를 믿고 그에 따른 해결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그 자신이 약자의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변화가능성과 善意志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이 방법은 ‘교육’과 ‘교화’라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갈등상황이 재발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믿음 없이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해결하는 문제는 과연 갈등 근본 원인까지 제거한 것일까?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열린 공간에서 소통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현대는 유교에서 말하는 易地思之, 推己及人의 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알고, 나의 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귀찮은 존재, 걸그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도 나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의식과 다른 사람들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귀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성은 선험적, 법적차원에서만 성립한다. 현실에 있어서의 인간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능력이나 환경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현실의 어떠한 두 사람도 똑같지는 않다. 하여 荀子는 “무조건 똑같은 것은 참된 평등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 정의와 공정을 실현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약자의 입장을 좀 더 배려할 줄 아는 사회, 법과 제도가 힘없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적용되는 사회라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크고 작은 사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오늘도 미국을 위시로 한 몇몇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더 엄격히 말해서 그들 패거리의 지위-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비극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운전수는 초보운전수를 위협했을 뿐이지만 그들이 도발한 전쟁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다. 고민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외면하고 혼자 高高하면 그만일까? 孔子는 말씀하셨다. 인간을 버리고 새와 짐승들과 함께 할 수는 없다고. 교육받은 자로서 매일같이 진행되는 이 비극을 관망하기만 한다면 이는 분명한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 힘없는 소수자의 편을 들어주어야한다. 지금 당장 트럭운전수를 제제할 방법은 없다 하더라도 놀란 마음 쓸어내리며 맥을 놓고 있는 미숙한 운전자를 위로하고, 이것이 정의롭지 못한 행동임을 부단히 알려야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 않는 주제적이고 능동적인  지식인의 자세일 것이다.


  국제사회의 비정한 ‘힘의 논리’ 속에, 그저 관망하고만 있는 지구촌 여러 나라들의 무관심 속에, 오늘도 이라크에서 레바논에서 죄 없는 아이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나부터 易地思之, 推己及人을 실천해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고발한다 ‘조직적 강간제도’를
기획부터 꼬박 3년…서양인 위안부로 첫장
감정적 슬픔 아닌 역사적 진실 알아야
“왜곡·포장 없는 균형 잡기 가장 힘들어”
한겨레 이유진 기자
[이사람] ‘일본군 위안부’ 실상 다룬 만화책 낸 정경아씨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鞭? 일본군 ‘위안부’가 그렇다.

작가 정경아(37)씨가 위안부 이야기를 만화로 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실을 알리고 싶어서다. ‘나는 고발한다’는 부제가 붙은 〈위안부 리포트〉는 일본군 ‘위안부’와 2차대전의 실상을 르포형식으로 그린 ‘만화 르포르타주’다. 역사책이지만 너무 전문적이지도, 너무 간단하지도 않은 교양서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작가는 2001년 데뷔 만화 〈빠담빠담〉을 통해 에디트 피아프 일대기를 그려 대한민국 출판만화 대상을 받았다. 그는 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 갖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전쟁과 여성문제에 골몰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모두 3권 분량으로 기획했다. 이번에 낸 책은 그 1권.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그저 감정적으로 슬퍼하고 마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인 누구나 알기 쉽게 역사적 사실을 그리려 했지요.”

기획부터 꼬박 3년이 걸렸다. 50여권의 국내외 관련 서적과 보고서를 섭렵했다. 자료수집 뒤엔 중국 현지취재를 거쳐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했다.

첫머리에는 92년 위안부 경험을 고발한 네덜란드인 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자바에서 태어난 얀 할머니는 일본이 재점령한 자바에서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다. 서양인 위안부 존재사실에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얀 할머니는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우리들은 일본군에 의한 ‘강간 희생자(rape victims)’”라고 했다. 작가 또한 동의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군인이 전쟁을 하면서 여성을 어떻게 지배하고 짓밟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직적 강간 제도였습니다.”


작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균형’이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면 안 되고, 감정적으로도 무겁기 때문에 화려하게 포장하거나 희화화해서도 안 되었다. 작가는 “쉬우면서도 극적인 재미를 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왜 ‘위안소’를 만들고 여성을 납치해 강간했는지, 이 문제가 왜 과거가 아니라 현재적 문제와 연관이 돼있는지 등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도서출판 길찾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6-08-1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경아 만화가, 기억하고 갑니다.^^

반딧불,, 2006-08-16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해콩 2006-08-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서 아이들이랑 돌려가며 봐야겠어요. ^^; 무더위...--;; 내일부터 비가 온다니 기다려봐야지요. 다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