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강독 과제]

규정 속도보다 다소 천천히 추월선으로 조심조심 가고 있던 여성 초보운전자의 소형차 앞에 맹렬 추월해온 대형 트럭이 끼어들더니 갑자기 속도를 줄여 위협을 가했다. 충돌 위험에서 겨우 벗어난 여성 운전자는 계속 운전을 못 할 만큼 위축된 마음상태로 갓길에 차를 세웠고, 그 사이 트럭기사는 유쾌한 듯 속도를 높여 달아나버린다. 초보운전자의 뒤에서 이러한 상황을 모두 지켜본 운전자, 즉 제3의 관찰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정리 비판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등을 풀어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자유롭게 제시하시오.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초보운전자와 트럭운전자에게 모두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초보운전자는 운전이 아직 미숙하므로 가급적 추월선을 이용하지 말아야했다. 추월선은 그야말로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차선이다. 운전이 아직 서툰 상태에서 추월선을 이용하게 되면 뒤따라오는 차량들의 무리한 추월을 유도하게 되고 사고의 위험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초보운전수에게도 바쁜 일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맘처럼 운전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규정 속도보다 천천히 추월선으로 운전한 것이 트럭운전수의 폭력적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트럭을 운전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삶의 조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택시나 버스, 트럭 등 운전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다. 또한 그들에게 매일같이 주어지는 강도 높은 노동과 그에 비해 낮은 수입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자본인 그들에게 ‘너그러운 양보’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상대방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동을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숙한 운전자에게 ‘트럭’은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공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갈등상황을 모두 목격한 뒤차 운전자가 이런 비판에 그친다면 이는 발전적인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양비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민해봐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익명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트럭운전수와 초보운전수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과연 저렇게 행동했을까? 그가 혹은 그녀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이었다면? 익명성이 보장되어있다면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불편에 대해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이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와 ‘나’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의식과 그에게 나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조건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염치가 없어지고 상대방에게 폭력적으로 행동한다. 전방위로 나를 드러내야하는 열린 공간이 줄어들고 서로에게 닫힌 개인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현대인들이 점점 서로를 소외시키고 상대방에게 무관심하며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커다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의 역사는 流轉한다. 위 사건은 사실 인류가 끊임없이 고민하며 해결방안을 찾아오던 크고 작은 갈등 상황의 구체적 일례에 불과하다. 미숙하고 여린 약자에게 ‘힘’을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지식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춘추전국시대는 그 혼란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지식인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던, 그야말로 ‘百家爭鳴’의 시대였다.

  한비자와 같은 法家的 입장에 선 지식인이라면 교통법규를 엄격히 적용하여 범칙금을 높이 책정한다든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다든가 하는 등의 외적․물리적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벌을 주고 감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힘’으로 파생된 문제를 더 큰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맹점을 지닌다. 눈앞의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해결되는 듯 보일 뿐 사실 그 안에 더 큰 문제들을 잉태하기 일쑤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신뢰하는 儒家的 입장이라면 각 개인에게 내재된 선한 의지를 믿고 그에 따른 해결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그 자신이 약자의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변화가능성과 善意志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이 방법은 ‘교육’과 ‘교화’라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갈등상황이 재발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믿음 없이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해결하는 문제는 과연 갈등 근본 원인까지 제거한 것일까?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열린 공간에서 소통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현대는 유교에서 말하는 易地思之, 推己及人의 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알고, 나의 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귀찮은 존재, 걸그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도 나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의식과 다른 사람들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귀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성은 선험적, 법적차원에서만 성립한다. 현실에 있어서의 인간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능력이나 환경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현실의 어떠한 두 사람도 똑같지는 않다. 하여 荀子는 “무조건 똑같은 것은 참된 평등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 정의와 공정을 실현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약자의 입장을 좀 더 배려할 줄 아는 사회, 법과 제도가 힘없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적용되는 사회라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크고 작은 사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오늘도 미국을 위시로 한 몇몇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더 엄격히 말해서 그들 패거리의 지위-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비극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운전수는 초보운전수를 위협했을 뿐이지만 그들이 도발한 전쟁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다. 고민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외면하고 혼자 高高하면 그만일까? 孔子는 말씀하셨다. 인간을 버리고 새와 짐승들과 함께 할 수는 없다고. 교육받은 자로서 매일같이 진행되는 이 비극을 관망하기만 한다면 이는 분명한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 힘없는 소수자의 편을 들어주어야한다. 지금 당장 트럭운전수를 제제할 방법은 없다 하더라도 놀란 마음 쓸어내리며 맥을 놓고 있는 미숙한 운전자를 위로하고, 이것이 정의롭지 못한 행동임을 부단히 알려야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 않는 주제적이고 능동적인  지식인의 자세일 것이다.


  국제사회의 비정한 ‘힘의 논리’ 속에, 그저 관망하고만 있는 지구촌 여러 나라들의 무관심 속에, 오늘도 이라크에서 레바논에서 죄 없는 아이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나부터 易地思之, 推己及人을 실천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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