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문강독 과제]

‘積善之家必有餘慶’라는 명제는 언제나 ‘참’인가? 즉 인간 사회에서 ‘積善’은 ‘餘慶’이라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가? 그렇다면 그 필연성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현실적으로 이 명제는 부분적으로만 참인 듯하다. 즉 積善이라는 원인과 餘慶이라는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積善의 결과로서 餘慶은 일종의 가능성만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이 둘은 반비례하는 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善을 많이 쌓은 집안의 후손들이 현실적으로 더 고단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러나 둘 사이의 인과관계와 그 필연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 명제 속에 포함된 ‘善’과 ‘慶’의 의미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積善’의 개념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른바 ‘善’이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하는 인류보편적인 ‘정의로움’이어야 한다. 그것은 孟子가 말했듯이 모든 인간이 생래적으로 타고난 양심에 의한 행위이며, 내 안의 善意志를 외물에 흔들림 없이 그대로 드러내 실천하는 것이다. 一身의 安危보다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奉公滅私의 행위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행위자 자신에게 그것은 ‘積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할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積善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餘慶이라는 대가를 결코 전제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적 고통과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라야 가능하다.


  인간 본연의 양심의 실현인 ‘善’은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것임에 반해 ‘慶’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리 정의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慶’은 주로 물질적인 부나 사회적인 지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적, 역사적 정의를 실천한 積善의 행위자가 파악하는 ‘慶’이란 세속적인 인간들이 바라보는 그것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積善之家’에 주어지는 ‘餘慶’이 필연적인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慶의 속성을 세속적인 잣대로 재단하여 물질적․권력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면 이 둘의 관계는 일종의 가능성만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慶’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경사인지 흉사인지는 積善을 실천한 사람과 그 후손이 판단할, 그들 자신의 몫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積善之家’에 ‘餘慶’을 내려주는 주체인 ‘天’의 입장에서 그 필연성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도덕성을 믿는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積善의 행위자와 그 후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 모두가 공유하는 도덕적 공감대가 있음을 최후까지 믿어야한다 뜻이다. ‘정의’의 실천에 대한 실천자 자신의 양심적 떳떳함과 그에 대한 후세의 올바른 평가 그 자체가 이미 자신과 그 후손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餘慶’의 실체가 아닐까? 굽힘없이 정의를 실천한 조상 때문에 지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는 후손이라도 조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존경이 주어진다면 결국은 조상의 積善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떳떳함을 깨닫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조상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과 후손으로서 느끼는 자랑스러움, 그것이야말로 세속적인 부나 지위 따위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넉넉한 ‘餘慶’이 아니겠는가? 積善의 실천자 그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에 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축복받은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스스로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후손에게 주어질 ‘餘慶’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한 성격일 것이다. 따라서 積善이라는 씨앗과 餘慶이라는 열매에 대한 필연성의 선언은 결국 積善을 실천한 사람과 그 후손에 대한, 그리고 정의를 반드시 정의로 평가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의 윤리성에 대한 ‘天’의 믿음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사람들과 그 후손은 미군정 아래 정권을 장악하여 지금까지도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휘두르며 정계․재계․학계의 요직을 점하고 있다. 반면 그 엄혹했던 시대에 一身의 安樂은 물론 가족들의 희생까지 감수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은 나라가 독립된 후에도 그 功을 보상받기는커녕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방치와 사람들의 무관심의 대상으로 여전히 그 비극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 ‘積善之家에 반드시 餘慶이 주어진다’는 言明은 이러한 상황을 직면할 때 무색해진다. 그러나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 그들이 끝내‘친일파 청산법’의 통과를 저지하는 등 안간힘을 써도 無所不爲의 행위에 대해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지난 역사에 대한 준엄한 평가는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명제가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작업임을 사마천은 『史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 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여 이 사회에 정의와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積善之家’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후대의 평가가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라 할 것이다. 積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그 고귀한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 사회적 존경과 경의를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餘慶’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절대자로 표상되는 ‘天’이 하는 일이며 그 ‘天’이란 바로 이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합의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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